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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ㅣ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불순물과 찌꺼기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내버려 둔다. 상념과 상심, 복잡한 것투성이다.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 그 마음에 누구가 자리를 잡는다. 그에게는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의 불순물과 찌꺼가 따위는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만 남는다.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이꽃님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화된 마음의 반짝임을 보았다고, 연두와 초록으로 가득한 여름을 닮은 싱그러운 마음이었다고.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기대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꽃님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말처럼 나도 이 소설이 제일 좋았다. 상처를 치유하고 한 단계 나가는 성장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그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 이꽃님이 그려내는 소설의 특징이다. 속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용기라고 할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속 찬과 지오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그러하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 버거운 마음, 비밀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 일, 그리하여 비밀이 비밀이 아닌 조금 특별한 일상이 되고 편안해지는 것.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설 속 찬과 지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린 그 여름, 그 여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오는 엄마에게 전학을 통보받는다. 유도부가 유명한 고등학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온다. 그곳에서 한 아이를 만난다. 5년 전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사는 아이 유찬. 외지에서 온 자신에게는 찬바람이 부는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아이. 그 아이가 자꾸 지오 앞을 맴돈다. 교실에서도 유도부에서도 찬은 지오 곁에 머문다.
찬은 5년 전 화재 사고 후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소음이었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오가 곁에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좋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지오도 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열여덟에 혼자 자신을 낳은 엄마가 아픈 것도, 몰랐던 아빠의 등장으로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도. 화풀이처럼 내뱉은 말은 찬은 가만히 들어준다.
“그깟 마음 좀 들린다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마음? 네가 들린다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어. 하루는 조금 괜찮았다가, 그래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또 하루는 미칠 것처럼 화가 나 죽겠다고.” (57쪽)
그렇게 찬과 지오는 이제껏 혼자만 감당했던 마음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지오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들었던 상처가 된 말들, 엄마가 좋아해서 엄마를 지키기 위해 유도를 시작한 일을 찬에게 들려준다. 찬은 자신을 살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방화의 범인을 용서하는 동네 사람들을 향한 미움을 말한다. 지오와 찬이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닌데도 지오와 찬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쌓였다.
지오가 아빠 없이 엄마와 살아온 일, 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살게 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바라봐 주면 되는데 어른들은 애정과 관심이라는 이유로 숱한 말과 시선으로 거든다. 그 말과 시선이 지오와 찬을 아프게 하고 비밀을 만들고 그 세계로 파고드는 걸 모른다. 그런 어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 나는 미안하다.
지오와 찬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이꽃님은 너무도 예쁘고 담아냈다. 단 하나의 여름으로 남은 여름이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느 여름이 특별한 이유는 그 여름을 보낸 누군가 때문이다. 지오와 찬이 그런 것처럼. 찬의 뜨거운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어 찬을 지켜주겠다는 지오의 다짐처럼.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뭇잎이 초록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어떤 잎은 아주 연한 연두색이었고 어떤 잎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또 어떤 잎은 쨍한 초록색이었고 어떤 잎은 연둣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떤 잎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그 모든 잎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순간 유찬의 머리 위로 그토록 다양한 초록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85쪽)
지오와 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질문들을 꺼내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마음을 어림한다. 그것들의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찬과 지오는 성장할 것이다. 지오와 찬이 맞이할 앞으로의 여름을 기대한다. 벅차고 아름답게 빛나는 여름, 싱그럽고 맑은 마음의 열매가 단단해지는 눈부신 여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