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약은 사라 작약이다. 작년에 코랄 작약 주문이라고 메모를 해두었지만 막상 주문을 하려고 보니 코랄 작약은 일찍 핀다는 설명이 있어서 사라 작약으로 변경했다. 작년보다 풍성한 5송이를 주문했는데 결과는 살짝 아쉽다. 작년의 레드 참 작약은 도착하자마자 물올림을 하니 활짝 피었는데 이번 사라 작약은 조금 더디다. 지난 화요일에 도착했는데 방긋 열렸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올해의 작약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 얼마나 활짝 열렸을까 방에서 나오자마자 거실의 작약을 확인했다. 5송이는 다 달랐다. 제일 먼저 꽃 잎을 연 한 송이, 나머지 네 송이는 천천히 움직였다. 나를 애태우게 만들었다. 꽃잎의 색이 바래지기도 했고 떨어지기도 했다. 피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올해의 작약은 색다른 작약을 알려준 셈이다. 올해의 작약답게!





초록의 줄기도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당연한 과정인데 왠지 더 아쉬웠다. 아쉬움을 안겨준 올해의 작약. 그래도 작약의 주는 기쁨은 줄어들지 않는다. 제철 작약을 보는 일, 고개를 숙여 작약 꽃봉오리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는 일. 색이 짙을수록 향이 진한 것 같다. 작년 레드 참 작약과 비교해 보니 그렇다.


작년과 다르게 작약도 화병에 꽂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화병은 길고 입구가 작은 게 좋은 것 같다. 그래도 올해는 도자기에 쭉 꽂아두려고 한다. 다음에 주문할 수국도. 작약은 활짝 핀 대로 아주 느리게 피어나는 과정도 다 좋다. 작약을 향한 내 마음이 변한다면 작약은 서운할 테니까.





작약도 샀지만 책도 샀다. 그리고 쫀드기도 사 보았다. 김이설의 장편소설을 사면서 무료 배송을 위해 쫀드기를 추가했다. 맛은 좋았다. 오랜만에 먹는 쫀드기라 그런지 나중에도 쫀드기를 구매할 것 같다.





커다란 솜사탕 작약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솜사탕을 상상한다.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하게 공간을 지배한다. 작약에겐 작약의 향이 있다.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겠다는 작약의 마음 같다. 작약을 볼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올해의 작약은 올해의 작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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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5-1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자목련님께서 올리신 작약 페이퍼 기억하는데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작약은 언제나 예쁩니다.
저는 산책로에 핀 작약을 감상하고 왔습니다.
사라 작약, 코럴 작약, 이름도 다양하네요^^

자목련 2024-05-14 15:45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벌써 1년이 흘렀어요. 시간 정말 빠릅니다.
산책로 에 핀 작약, 얼마나 예뻤을까요!
다양한 이름도 있지만 함박꽃이란 이름도 좋은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4-05-1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칠보산 나들이 갔다가
길에 핀 작약을 보고 사진을 찍었답니다.
포스팅해야겠네요 :>

저도 언제 작약 한 번 심어봐야지 싶었는
데 벌써 만개했네요.

자목련 2024-05-14 15:44   좋아요 0 | URL
길에 핀 작약을 만나셨다니 부럽습니다.
포스팅해주세요!!!
베란다에 심어주시면 더 좋고요^^

독서괭 2024-05-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작약이 이렇게 생겼군요. 너무 예쁘네요~ 향기도 좋은가 봅니다. 킁킁🌷

자목련 2024-05-14 15:43   좋아요 0 | URL
꽃송이가 커서 환한 달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ㅎ
향기도 나쁘지 않고요!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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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을 흘려듣는 이가 있고 진위를 가리려는 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호기심을 뛰어넘은 그 무언가가 있다. 이야기의 앞뒤를 살피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할까. 무경의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속 ‘천연주’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궁금증을 불러오는 제목의 탐정소설이자 추리소설이다.


1928, 부산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의 부산을 배경으로 들려주는 세 개의 이야기다. 그러니 세 개의 사건과 세 명의 범인이 있다. 현재가 아닌 100여 년 전에 일을 법한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이번에도 예외 없이 나의 추리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삶을 즐겁게 상상할 수 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천연주’는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 갑부의 무남독녀다. 일본 이름은 센다 아카네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작은 다방 ‘흑조’를 운영한다. 비서 야나 씨와 경호를 맡는 강 선생이 항상 그녀 곁을 지킨다.


천연주의 취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세상의 흔하디흔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고 진상을 쉽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자신이 본정本町에서 경영하는 작은 다방 ‘흑조’에 앉아, 종종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4쪽)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다른 추리소설이나 탐정 소설과 다르게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이 아니라 천연주란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다. 천연주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는 부산으로 요양을 떠나는 천연주 일행과 같은 기차를 탄 손 선생, 두 번째는 같은 여관에 묵게 된 일본에서 조선으로 여행을 온 부부 중 남편, 세 번째는 연주의 고보 선배인 상미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천연주의 이동에 따라 구포 야시고개, 동래온천, 장수통으로 장소가 변경된다. 아마도 부산이 고향이거나 부산에 거주하는 이에게는 더욱 남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시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과수원과 양계장을 소유한 일본인 개를 여우가 죽였다는 첫 번째 사건은 구전설화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동래 온천 여행을 온 일본인 아내가 귤을 먹고 죽은 두 번째 사건이야말로 범인을 추리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용의선상에 오른다. 천연주도 예외는 아니다. 살해 동기가 없는 인물을 하나씩 지우고 마침내 밝혀지는 범인. 쓰러질 듯 가냘픈 외모와 창백한 얼굴의 천연주는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슬그머니 실마리를 던질 뿐이다.


정말로 탐정이란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괴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이런 세상에서는 정말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179쪽)


마지막 세 번째는 연주의 고보 선배인 상미와 그의 남자친구 경석을 쫓는 회색 모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이야기다. 상미와 경석이 일본으로 가려는 이유에 대한 구제적인 설명도 없기에 가장 미스터리하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1928년과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면 그 둘의 계획을 예상할 수 있다. 회색 모자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추리하는 과정은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그와는 별개로 상미와 연주의 대화로 그들의 학창 시절과 연주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증은 커진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은 재미있는 소설이다. 천연주를 비롯한 야나 씨와 강 선생이란 캐릭터가 앞으로 어떤 사건을 해결할지 기대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내가 찍은 방점은 천연주가 중요하게 언급한 이런 문장이다.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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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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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려운 주제였지만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 책을 읽었기에 브라이언 키팅의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가 궁금했다.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란 제목과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는 살피지 않고 말이다. 누군가 대중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유튜버 궤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미리 언급하자면 이 책에 윤하의 노래로 잘 알려진 ‘사건의 지평선' 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물리학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물리학자는 내게 특별한 이름이 될 것이다. 물론 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우주론자이자 과학자인 브라이언 키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명과 만나 나눈 대화 인터뷰다. 물리학자의 삶과 연구자의 태도에 관해 중점적으로 들려준다. 저자의 설명처럼 여자 물리학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연구자의 삶이란 어떠할까. 수식과 실험이 전부일 것 같다. 성과를 내야 하고 남보다 빠르게 어떤 이론을 발표하는 일 그게 목표가 아닐까. 이런 나의 생각은 무지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물리학자들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안겨주었는데 동료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실패는 당연한 일이며 성과는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협력이 중요하며 실패로 인해 좌절하는 대신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9명이 연구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말이다.


모든 연구는 사실 어느 한 개인이 홀로 내놓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종합되는 겁니다. 새로운 뭔가가 출연할 때, 그게 맥락에 놓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요. (물리학자 덩컨 홀데인, 162~163쪽)


그들은 연구자이면서 과거에는 제자였고 현재는 누군가의 스승이었다. 생각해 보면 물리학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우주적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몇 십 년 이상 파고들어 연구를 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괏값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건 우리도 안다.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려도 당장은 결과를 보여줄 수 없는 일.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쓸모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뤄진 놀라운 발견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물리학자 셀던 글래쇼, 101쪽)






전자기약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셀던 글래쇼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을 말한다. 누군가 그의 강의 덕분에 물리학의 세계를 만나고 연구자의 길을 걸으며 물리학은 발전한다. 그가 연구에만 집중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시를 좋아한다는 물리학 교수 프랭크 윌첵의 말도 인상적이다.


세상은 여러 층위로 기술할 수 있는데, 시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제 말은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해야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양쪽 다일 수도 있어요. 같은 대상이나 현상을 다른 식으로 기술할 수 있고, 각 기술 방식은 나름대로 타당해요. (물리학자 프랭크 윌첵, 183쪽)


우주배경복사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메데의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대해 확신을 갖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꾸준하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 누구나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연구하지요. 따라서 매일 난 학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자 존 메더, 219쪽)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책이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실패로 인한 기억으로 도전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어설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 이 책은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에 우리의 삶을 대입하기에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실패를 저자의 바람처럼 물리학자처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삶이란 책의 원제(Into the Impossible)처럼 불가능 속으로 전진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할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하는 문제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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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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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에 취한 게 엊그제 같은데 초록에 반하는 날들이다. 나는 혼자 멈춰 있고 계절은 사부작사부작 제 길을 걷는다. 곧 모내기가 시작될 테니 여름인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의 움직임을 조금 안다.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이맘때의 절기를 찾아보는 것, 계절을 사는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해하지만 계절의 문턱을 지나 다음 계절이 온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김신지의 『체절 행복』 그런 일상의 감사를 들려준다. 제목 그대로 체절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일 말이다.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를 소개한다. 절기마다 어떻게 재밌고 즐겁게 지내는지 집중하게 만든다.


누군가 사느라 바빠서 절기 따위는 챙길 여력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 지나 꽃이 피면 꽃이 반갑고 그 소식을 전한 기억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계절이 오고 가는지 체감도 못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계절이 지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적도 말이다. 엊그제 24절기 중 일곱 번째, 여름의 입구인 입하(立夏)였다. 벌써 올여름의 더위를 걱정한다. 제철이었던 주꾸미도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얼려 둔 머위 쌈도 먹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체절 행복』을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지 감탄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야 했지만 여름 더위를 피하고 겨울 추위를 피해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있는 세상이니 제철 절기를 알고 챙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난다면 나만의 제철 절기를 즐기는 기쁨을 쌓고 싶을 것이다. 봄마다 조팝과 이팝나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헷갈렸던 나는 이제 확실히 안다. 키가 큰 게 이팝나무라는 걸 말이다. 계절에 맞게 사는 일, 그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다.


새하얀 눈꽃 치즈를 수북이 뿌려둔 것 같은 이팝나무는 이맘때 어딜 가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꽃 좀 봐, 하고 멈춰 서는 순간에 우리 삶은 조금 느리게 흐른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말한 순간들만 모아 편집해둔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이 될까. (110쪽)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마다 심어야 할 작물이 무엇이고 수확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한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잊고 지낸 게 많았다. 요즘 마늘종 뽑을 때인데, 어렸을 적에는 그게 정말 싫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로 도망 치곤했는데,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는 것, 제철 절기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계절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이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141~142쪽)


바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려고 오며 가며 카페나 식당을 봐 둔다는 저자의 마음이 괜히 설렌다. 나도 더위가 몰려오기 전에,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맘껏 바깥을 즐기는 일상을 계획하고 싶다. 우선은 지금 한창인 작약을 보는 일에 몰두할 생각에 설렌다. 바깥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작약, 지금의 제철 행복이다.


다가오는 절기를 헤아려본다. 절기를 안다는 게 참 좋다. 계획을 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까. 물론 나이가 들고 계절의 흐름이 더 놀라고 신기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는 마음, 같은 자리에서 좋은 이들과 작년의 이맘때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 이 역시 감사하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과 다르게 춥고 날카롭던 겨울에 점점 무뎌지고 한여름의 땡볕 더위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고도 안타깝다. 이 땅에 살면서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절기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 기록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333쪽)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334쪽)


눈이 부신 이 계절,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제철의 행복을 만끽하고 누리고 싶다. 내가 맞이하는 여름은 작년과 같지만 다를 것이다. 내가 맞이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봐야 할 것을 보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자. 계절이 보내는 기척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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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5-0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작약철이죠 저희집에도 작약이 조금 폈어요 활짝은 아니고^^ 며칠 지나면 또 장미철이고요 꽃 피는거 보고 있으면 제철행복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이 들이신 작약 보면서 5월 행복하게 보내셔요😄

자목련 2024-05-09 10:49   좋아요 0 | URL
작약에 반갑고, 장미에 설레고!
제가 들인 작약은 활짝으로 가고 있어요^^

서니데이 2024-05-1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둔 것 같은데, 샀는지 찾아봐야겠어요.
자목련님, 비오는 주말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시간 되세요.^^

자목련 2024-05-13 15:09   좋아요 1 | URL
지금은 이 책을 곁에 두셨을 것 같아요.
비 오고 깨끗하고 맑은 월요일이에요. 서니데이 님 좋은 오후 이어가세요^^
 

지레 겁을 먹는 책이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허먼 멜빌의 『모비 딕』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읽기도 전에 읽을 수 있을까, 읽다가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책. 고래를 잡는 포경선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면 나 같은 독자가 아무런 편견과 기대 없이 『모비 딕』를 읽기에 알맞은 독자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화자 ‘이슈메일’을 따라 나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했다. 살짝 고백하자면 이슈메일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친구 퀴퀘그와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 퀴퀘그만의 의식(피쿼드에서도 그는 대단하다)이 흥미로웠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항해가 아닌 추운 날씨도 모자라 크리스마스에 항해는 시작된다. 이슈메일과 함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모비 딕’에 미친 남자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 가려진 인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에이해브에겐 오직 모비 딕만 중요할 뿐 그 외 에이해브를 구성하는 건 없다. 한쪽 다리를 잃게 만든 모비 딕을 향한 복수,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모비 딕이 그의 인생에 전부라는 말이다. 친절하게 수록된 ‘피쿼드’호의 항해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대서양에서 출발해 희망봉, 인도양, 일본 연해를 지나 태평양에 도달하는 항해 끝에 운명의 모비 딕을 만난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모비 딕을 쫓는 에이해브의 복수심과 욕망, 그리고 피쿼드에 승선한 선원들과 그들을 관찰하고 소설 내내 이슈메일이 설명하는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정리해도 좋을 소설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항해사도 작살잡이도 아닌 포경선이 아닌 상선에만 타봤을 이슈메일은 왜 ‘피쿼드’호에 탑승했고 고래에 집착하는가. 포경선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사건들, 선장 에이해브와 항해사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에이해브를 제외한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향유고래를 잡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고래를 잡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피쿼드 호의 대장은 선장이니 선장 에이해브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기에 넓은 바다에서 다른 포경선과 만나는 이야기, 모비 딕을 만나기 전 고래를 잡고 해부하고 기름을 짜는 이야기, 모든 걸 이슈메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준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고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고래 사전, 고래 설명서, 고래 해부학, 고래 역사서라는 말이 이 소설의 부제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항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역경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났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120쪽)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403쪽)


일정 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에이해브와 모디빅이 언제 만날지가 궁금했고 그 둘의 대결, 그러니까 인간과 고래의 한판 승부를 기다렸다. 망망대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다른 포경선과 만날 때마다 에이해브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흰 고래를 보지 못했소?” 모비 딕을 기다리는 에이해브는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를 떠오르게 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모비 딕을 떠올려야 맞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낱 인간과 거대한 자연이자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모비 딕의 대결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모비 딕』를 향한 다양한 해석과 찬사도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모비 딕을 만났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다. 나는 모비 딕의 결말을 모르기에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팽팽한 대결에 빠져들었다. 에이해브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비 딕이 인간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가 추앙하고 마주하고 싶은 거대한 존재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하루하루의 생생한 묘사는 압권이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 속 긴장감 가득한 슬픔을 담은 잔인한 아름다움.


적에게 다가갈수록 바다는 더욱 잔잔해져서 물결 위에 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바다는 한낮의 목장처럼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숨죽인 사냥꾼이 아직 낌새를 채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냥감에 바짝 다가가자, 눈부신 혹의 전모가 또렷이 보였다. 그 혹은 독립된 별개의 생물처럼 바다를 헤엄쳐 갔고, 그 주위에서는 양털처럼 고운 초록빛 거품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맴도는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혹 너머에는 살짝 치켜든 대가리에 복잡하게 새겨진 거대한 주름이 보였다. 보드라운 튀르크 양탄자 같은 물결 위에는 그 넓은 우윳빛 이마의 하얀 그림자가 반짝거리며 머리보다 앞서 달렸고, 잔물결은 장단을 맞추어 장난치듯 움직이는 골짜기 속으로 푸른 물이 번갈아 흘러들고 있었다. 양쪽에서 비치는 물거품이 올라와 고래 옆에서 춤을 추었다. (726쪽)


나처럼 지레 겁을 먹고 『모비 딕』 을 두려워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설령 읽다가 멈추면 좀 어떤가. 한 편의 거대한 바다 뮤지컬 같은 소설, 바다라는 무대 위에 ‘피쿼드’ 승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비 딕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대신 돌아올 수 있고 원하는 순간 바로 ‘피쿼드’에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모비 딕과 에이해브의 목숨을 건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이해브에겐 항해 목표이자 삶의 목표였던 간절히 바랐던 모비 딕과 조우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에이해브의 집착은 고래를 향한 이슈메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건 하먼 멜빌의 고래를 향한 위대한 집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 놀라운 수고와 대단한 노력 덕분에 이제라도 『모비 딕』 을 만났고 흰 고래를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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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0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5-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드뎌 모비딕을 읽으셨군요! 뿌듯한 독서였을 거 같아요.
퀴퀘그하고 알콩달콩 재밌죠? ㅋㅋㅋ 둘이 그냥 결혼해라~!!
저는 에이헤브가(이런 인간 유형이) 싫어요;;;

자목련 2024-05-07 10:31   좋아요 0 | URL
드뎌 읽기는 했는데, 설렁설렁 읽었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ㅎㅎ
퀴퀘그와의 케미 좋았어요, 퀴퀘그도 살았더라면...

책읽는나무 2024-05-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모비딕 완독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겁을 먹고 있는 독자라 선뜻 구입하기에도 좀 망설여지는 책이었는데...괜찮다고 다독여주시니...언제 한 번 용기내 보아야겠어요.^^

자목련 2024-05-07 10:33   좋아요 1 | URL
완독이라는 의미가 무색합니다. 고래에 대한 사전 같은 부분은 대충 넘어가기도 해서 ㅎㅎ
저도 읽었으니 나무 님은 더 즐겁게 꼼꼼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새파랑 2024-05-0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드디어 읽으셨군요~!!
인간의 복수심과 맹목성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수 있는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마지막 싸움을 위한 빌드업이 좀 길긴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자목련 2024-05-07 10:34   좋아요 1 | URL
에이해브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정말 정말 피곤할 것 같습니다.
저는 결말을 몰라서 그 부분이 궁금해서 끝까지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

stella.K 2024-05-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인데 막상 읽어 본 사람들은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책이야 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잃시찾도 그렇다고 하던데. ㅋ
근데 같은 책을 두 권이나 갖고 계시는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2024-05-07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4-05-0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그냥 좋다, 최고다. 뭐 이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모비딕>은 말 그대로 ˝인류 문화 유산˝ 가운데에서도 앞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게 야단맞은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창세기˝보다 더 근사합니다.

자목련 2024-05-07 10:39   좋아요 0 | URL
소설적 재미는 별개로 언급하신 <인류 문화 유산>에 동의합니다.
인간과 고래, 그 역사에 대한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에 매우 놀랐어요.

잉크냄새 2024-05-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네요.

자목련 2024-05-07 10:40   좋아요 0 | URL
네, 디자인을 잘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