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2 소설 보다
김지연.이미상.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으면서 행간의 의미,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를 낱낱이 해석하고자 하면 소설 읽기는 급 피곤해진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짧은 이야기로 여기며 읽는 게 좋다고 여기는 편이다. 어쨌든 소설은 픽션이고 인물 역시 가상의 인물이니까. 그렇다고 소설이 현실과 아주 별개의 세상이라는 건 아니다. 살짝 현실을 틀어 소설 속 세계로 옮겨놓다는 말에도 나는 동의한다. 『소설 보다 여름 2022』 을 읽으면서 소설 속 인물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을 해석하려는 나를 만났다. 작가가 의도하는 게 무엇인지 그 고통과 절망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는 말이다. 


김지연의 「포기」는 현재를 사는 청춘들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도대체 평범함이란 무엇인가, 평범한 삶이라는 게 가능하긴 하냐도 묻는 듯했다. 화자인 미선이나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 미선의 사촌 호두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특별 그 이상의 복잡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호두는 민재에게 2천만 원을 빌려줬다. 미선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민재와 호두 사이에는 2천만 원 이상의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미선과 민재는 헤어졌고 민재는 사라졌다. 미선과 호두에게 민재는 불편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소설에서 미선과 민재가 생각하는 평범은 같은 듯하면서도 아주 다른데 그 부분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내가 평범하게 산다는 거, 보통의 수준으로 산다는 거, 하고 말하면서 상상했던 수준들도 다 보통 이상의 것들이었다.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란 게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거야말로 평범했다. (「포기」, 25쪽)


어찌 보면 민재의 말대로 미선과 민재, 호두는 모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평범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런데 또 평범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친구, 연인, 친척으로 맺어진 관계를 떠났다면 호두는 민재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었을까. 소설 말미에 민재가 돈을 다 갚으면 민재가 잘 지내는지 어떻게 아냐는 호두의 말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은 더욱 어렵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모래 고모라 불렸던 고모와 화자인 목경과 목경의 언니 무경이 어린 시절 함께 지낸 이야기다. 모래 고모의 장례식에 다녀온 목경이 들려주는 모래 고모와 그와 같은 사람인 언니 무경. 고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더 친하다고 여겼는데 고모가 바라본 건 언니 무경이었다. 그것은 같은 기질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이거다,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함윤이의 「강가/Ganga」도 마찬가지다. 소설 전체가 중의적인 의미로 가득하다고 할까.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여행 중인 화자는 그곳에 남자를 사러 간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호텔 직원에게도 강가의 가게에서 만난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화자가 남자를 사러 온 건 아니다. 화자는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화자가 다짐한 것처럼.


강가.

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불려야지, 다짐했다. (「강가/Ganga」, 107쪽)


화자는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냉동 음식을 포장하는 일을 했다. 친했지만 그들을 대변할 수는 없었다. 한국을 떠나 머문 도시에서 만난 여자들을 모습을 보며 한국의 자신과 그들을 떠올린다.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지내고 싶지만 불편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호텔로 돌아간다.

아니다 다르게 말해보자. 

강가는 호텔로 돌아간다. 

이렇게 말하니 모든 게 한층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가 아니라, 강가가 호텔로 간다. 공장에서 꾸역꾸역 모은 돈으로 항공편을 사서 낯선 도시에 도달한 사람은 강가. 어깨가 다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은 채 도시를 거니는 이도 강가. (「강가/Ganga」, 122쪽)


이전의 내가 아닌 ‘강가’로 지내면 달라질 것 같은 간절하고 쓸쓸한 희망이 전해진다. 처음 만나는 함윤이의 소설은 독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묘한 분위기를 지녔다.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오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할까. 아니, 잘 모르겠다. 그게 정확하겠다. 


어떤 언어를 쓰든 간에 우리는 모두 타인의 말을 오해하지 않나요. 타인의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뒤, 그 해석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곤 하죠. (함윤이 × 홍성희, 인터뷰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의 날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정한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 책 속에서 만난 글귀가 그러하다.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기억에 담아 한 번씩 꺼내 보고 싶은 마음과 그 장면과 글귀에 포섭되어 헤어 나오지 못해서다. 드라마나 영화의 인물이 나 같아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글이라서 말이다. 그것은 기쁨이나 환희보다는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울 경우가 많다. 안쓰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마음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한 『개의 날』 이란 제목의 카롤린 라마르슈 소설에서 그런 연민과 삶의 상실을 마주했다. 그것은 지독하게 쓸쓸하고 아픈 것이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개 한 마리를 목격한 순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자고 개가 고속도로까지 왔을까, 길을 잃었을까,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까.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서 멈춰 개는 잊고 달리던 대로 달리고 목적지를 향해 가지 않을까. 


그러나 『개의 날』 속 여섯 화자는 달랐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목격하면서 그들의 느끼고 발견한 것들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누군가는 그 개가 자신과 닮았다고 여겼고 누군가는 죽음을 성찰하고 누군가는 삶이라는 고독에 대해 마주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죽음이 예측되는 개의 모습은 여섯 명 모두의 삶에 귀속되었다.


작가는 여섯 명의 화자 중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그들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트럭 운전사가 화자인 「트럭 운전사 이야기」에서는 거짓으로 지어낸 가족 이야기를 여러 잡지에 보내는 한 남자가 고속도로에서 발견한 개를 보며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해 말한다. 육체적 욕망을 근절하며 살아야 하는 사제가 미사에 오지 않는 여신도를 찾는 과정을 다룬 「천사와의 싸움」에서 사제는 개의 죽음에서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소피라는 여성을 향한 감출 수 없는 마음과 마주한다. 


그 개는 죽어서 분해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도로변에 일부가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엄청난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죽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와의 싸움」, 49쪽)


죽은 뒤 영혼이 다른 육체에 깃드는 것은 사실이다. 영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부활의 연속일 뿐이다. (「천사와의 싸움」, 68쪽)


어쩌면 개는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사제가 갈망하는 것 역시 그런 죽음을 통한 부활이 아닐까. 어렵게 다가온 부분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삶에서 한 번쯤 떠올리는 출구가 죽음이라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개는 출구를 찾아 달리고 있던 건 아닐까. 


그런가 하면 연인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장소로 향하던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의 빨간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는 개를 보며 연인과 자신을 떠올린다. 그들의 지나온 사랑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 존재부터 버림의 대상이었던 유년 시절과 만난다.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 대신 자신을 돌봐준 유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못함에 대해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기억한다. 돌봄이 아닌 버림을 받았다는 건 모든 사랑에 대해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그러니 고속도로에서 개를 구하고만 싶었다. 심연 가득히 쌓인 버림받았다는 절망 때문에 그 개가 마치 자신과 같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개이며, 너는 그 개의 주인이다. 나는 그 개를 위해 울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동정심일까 아니면 절망의 이면일까. 학살을 은폐하기 위한 교훈적 감정이다. 언제나 누군가 나를 버렸다. 사랑. 사랑은 항상 당신들을 버린다. 아무리 짧은 순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환희의 순간에도 당신들을 버린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 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 87쪽)


달리는 개를 보면서 그처럼 달려가 스스로 생을 끝내고 싶은 「자전거를 타고」의 화자는 일하던 과일가게에서 해고된 게이다. 사장은 그가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옷차림이나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지만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내면을 꺼내놓는다. 그러니까 해고 사실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진정한 위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달리기 시작한 건 자신을 둘러싼 생각으로부터 단순해지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는 죽음을 원해서였다. 


달리는 것은 하나의 일이며, 나의 내면에 무언가를 철저하게 건설하는 행위다. 나는 아직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앞에 서 있는 방파제의 도도함과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도 아니고, 즉각적인 위험도 없이 습관처럼 단조롭게, 고속도로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이 모든 차량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자전거를 타고」, 114쪽) 


개를 보며 죽음을 원한 이도 있었지만 암으로 사망한 남편의 죽음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별수 없음」의 과부는 개를 구할 수 없음이 별수 없음으로 다가오고 그에 반해 「영원한 휴식」에서 과부의 딸인 ‘안’은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안은 개와 같은 죽음으로 제목처럼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딸이 서로를 바라보는 극명한 태도는 그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한 마리 개의 죽음은 개가 살아온 시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동시 우리의 지난 삶을 불러온다. 철학적 사유를 애틋하고 뭉클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한동안 멍해진다.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은 무엇일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나가는가 묻는다. 마침내 도달할 것이 죽음이라는 명확한 사실과 마주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면의 진실한 고백을 불러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장편소설 『류』는 제153회 나오키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일본 서점 대상을 수상한 소설이다. 수상 이력이 놀라운 만큼 소설도 다양한 장르로 읽을 수 있다. 누군가는 역사소설로 누군가는 미스터리 소설로 누군가는 성장소설로 말이다. 하나의 소설에 그 모든 걸 담았으니 대단하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생을 무엇이다 하나로 단언할 수 없듯 이 소설도 무엇이라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의 화자인 ‘나’ 예치우성이 마주한 할아버지 ‘예준린’의 삶이 그러하듯 우리의 생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할아버지 예준린이 자신의 포목점에서 사망한 현장을 처음 목격한 ‘나’가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을 들려준다. 그러나 대놓고 할아버지의 지난 생을 추적하는 건 아니다.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만의 모습과 당시 고등학생으로 겪는 학교생활과 친구와의 관계에 이어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고루 섞여 있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십 대 소년의 모습부터 친구와의 싸움과 갈등까지 평범한 보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70~80년대 우리의 모습과도 많은 부분이 닮았다. 아마도 그건 일본과의 전쟁과 본토(중국)를 떠나 대만으로 온 이들의 그리움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우리의 역사와 일정 부분 겹쳐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예준린을 죽인 범인에 대한 단서도 그의 이력에서 시작한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대립하던 시절, 국민당으로 활동하며 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는 그가 가족처럼 여겼던 의형제와 그중 한 사람의 자식인 위우원을 양자로 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손자인 예치우성에게는 좋은 할아버지였고 그의 죽음의 첫 발견자였기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찰들의 조사는 허술했고 그럴수록 예치우성은 할아버지의 행적을 쫓는다.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일만큼 예치우성의 인생에도 폭풍이 휘몰아친다. 대리시험을 치르다 발각되어 다니던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새로운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폭력 시비에 말려든다. 폭력배에 가담한 친구를 구하려다 삼촌 위우원의 도움을 받지만 결국 삼촌은 감옥에 간다. 예치우성이 선택지는 군대뿐이었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때 싸움을 벌였던 친구와 조우한다. 군사훈련이 강제되는 곳에서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는 말에 친구들은 분신사바를 시도하고 특정 이름을 제시한다. 분신사바라니, 대만이나 한국이나 그 시대 청춘은 이토록 똑같을 수가. 예치우성의 십 대는 그렇게 불온하고 불안하게 흘러간다.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할아버지의 죽음은 예치우성을 붙잡고 있다. 업무로 일본을 오가며 예치우성은 본토에 남은 할아버지의 친구에게 편지로 왕래한다. 공산당이었지만 국민당이었던 할아버지와 교류하는 친구였다. 대만에서 중국으로 편지조차 보낼 수 없던 시절, 그가 중국에 가는 일은 위험을 감수할 큰일이었다. 예치우성은 할아버지가 국민당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직접 마주하기로 한다. 할아버지를 친구를 만나 알게 된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예준린은 예치우성이 알고 있던 할아버지가 아닌 잔학무도한 인물이었다. 예치우성이 예준린의 손자라는 걸 숨겨야 할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죽여야 했던 시절을 견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위장하며 생을 이어갔던 할아버지였다. 본토를 떠나 대만에서 살았던 그를 향한 증오와 분노는 너무 당연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과거가 되었다고 해서 잘못된 과오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에 붙잡혀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서 거기서 나오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위우원 삼촌의 말처럼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우리 마음은 늘 과거 어딘가에 붙잡혀 있지. 억지로 그걸 떼어내려 해봤자 좋을 게 없단다.” (278쪽)


예준린 할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예치우성은 소설 밖에도 존재할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저마다 하나씩 비밀을 품기 마련이니까. 소설에서 예치우성이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할아버지의 생으로 들어간 일은 작가가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이 역사 소설의 역할을 한다. 중국, 대만, 일본, 한국을 비롯해 과거의 전쟁에서 자유로울 나라는 없다.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든, 강대국이라는 이유든, 그 어떤 이유로도 전쟁은 용납될 수 없다. 그래서 아프게 역사를 직시하는 이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한 울림을 전한다. 단순히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쫓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읽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할아버지든, 위우원 삼촌이든, 레이웨이든,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사람이 있던 세계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 없이 살아야만 한다. 원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더 애매하고, 차갑고, 무관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내 다리는 얼어붙는다. 따뜻한 외투가 하나씩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내 마음은 온기를 원하는데, 그러나 내 영혼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영혼은 그들과 있음을 느낀다. 그들의 눈으로 매사를 보고, 그들의 귀로 소리를 듣고, 그들의 태도로 영원한 동경을 품는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오랜 세계로 잠겨난다. 내 마음은 그렇게 위로받는다. (474쪽)


소설의 제목인 류(流)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간이 흐르고 인생이 흐르고 역사가 흐른다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과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미래로 향하고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흐르는 삶 어딘가에 나와 우리가 있다는 더없이 평범한 사실에 전율을 느낀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02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있던 세계가 사라진다는 말 확 와닿습니다.

자목련 2022-08-03 10:22   좋아요 2 | URL
네,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8-02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네요~ 말씀하신대로 역사소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듯합니다. 이 책 조용히 찜해놓아야겠어요^^*

자목련 2022-08-03 10:24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흥미로운 소설이에요. 역사적 이야기를 재미와 위트로 무겁고 힘겹지 않게 풀어가요.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2-09-0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9-09 10:38   좋아요 2 | URL
미니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맛나고 건강한 명절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8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자목련 2022-09-09 10:31   좋아요 2 | URL
응원의 댓글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09-08 0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9-09 10:32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화목하고 맑은 연휴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09-08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9-09 10:35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 인사 전해드려요. 달처럼 환한 명절 보내세요^^

새파랑 2022-09-08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합니다 ^^

자목련 2022-09-09 10:37   좋아요 3 | URL
저도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고 화목한 명절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9-08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22-09-09 10:37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 님, 항상 감사해요.
행복하고 건강한 명절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9-12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9-14 10:55   좋아요 0 | URL
하나의책장 님, 감사합니다. 맑고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만나는 작가의 소설에 대해 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내가 느낀 것들이 작가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작가의 일부이기에 처음 받아들인 느낌이 변화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단편과 에세이를 만나는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녹색 갈증』으로 처음 만난 최미래의 소설은 복잡한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모호하기도 했고 그 모호함이 신선하기도 했다. 


『녹색 갈증』은 연작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장편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과거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화자인 ‘나’는 ‘윤조’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윤조 때문에 ‘나’는 가족과 친구, 다른 관계는 단절되었고 결국엔 윤조와 연을 끊었다. 시간이 흘러 「설탕으로 만든 사람」에서 ‘나’는 모텔 종업원으로 일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그곳에서 배달 일을 하는 옛 연인 ‘명’과 재회한다. 그러나 과거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고 아는 체를 할 뿐이다. 함께 산에 오르며 다시 시작할 계기를 바라지만 서로의 간극만 확인하며 다시 이별을 한다. 


소설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어떤 질병으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간을 지낸다. 특히 1월 26일은 모두 슬픔에 잠식된 날로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는다. 모텔에 거주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지니고 ‘나’는 그들을 관찰하듯 지켜본다. 그러나 ‘나’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나’가 느끼는 고독과 결핍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조’로 인한 것이다. ‘윤조’는 ‘나’가 쓴 소설의 인물로 ‘나’는 여전히 윤조를 원하고 그리워한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글쓰기, 소설 쓰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내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밤에는 내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계절에는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꿈에서는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걸 놓아버리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모든 걸 무얼 말하는 걸까. 이 말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 말보다 내가 나에게 한 말이 더 많았다. (「설탕으로 만든 사람」, 72쪽)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다시 쓰면 되는 건 아닐까. 처음 윤조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 다시 윤조에게만 집중하니 현실에서의 관계는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언니와 엄마가 있는 집으로 온 「빈뇨 감각」에서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직장을 관두고 방에서 생활하는 언니와 매번 사랑에 실패하는 엄마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없다. 글을 쓰겠다고 집을 나간 나보다는 둘 사이는 조금 가까워 보인다. 


다시 모텔로 돌아가려 예전에 사용했던 방에서 물건을 챙기던 나는 보석함을 발견한다. 그건 윤조가 등장하던 소설 속 할머니의 물건이었다. 보석함을 열자 윤조가 기어 나왔다. 윤조가 등장한 후 일상은 활기를 찾는다. 「뒷장으로부터」는 예전부터 함께 지냈던 것처럼 윤조가 언니와 엄마에게 스며드는 일상을 그린다. 잘 웃고 언니와도 잘 지내고 엄마를 돕는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도시락을 싸서 산에 가자는 말에도 흔쾌히 동의한다. 엄마와 언니와 윤조를 따라 나도 산에 오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다. 


내가 원하는 건 윤조였을지도 모른다. 언니와 맥주를 마시며 소소한 수다를 떨고 다정하게 엄마를 위로하며 살고 싶은 나의 욕망이 윤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윤조는 내가 아니고 윤조는 곧 사라질 것이다. 소설 속 보석함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언제든 그곳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보석함뿐일까. 윤조는 어디서든 불러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 아닌가. 나는 혼자가 아니고 윤조와 함께 생활할 수 있고 이곳이 아닌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내가 꿈꾸는 모습의 윤조를 만나는 일을 꿈꾸면서 말이다. 그건 ‘나’가 쓰기를 놓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에세이 「내 어깨 위의 도깨비」에서 느낄 수 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형태는 황정은을 잠깐 떠올릴 수 있지만 황정은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득 소설을 읽는 일도 윤조를 불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무언가와 닿고자 하는 욕망, 누군가를 만나고자 하는 바람이 있지 않은가. 불가능했던 일상이 아닌 무한 가능한 세계.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 그 안에서 어떤 결핍도 없이 살아가는 상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더라도 말이다. 


연필을 굴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는 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윤조는 여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았던 장면은 내가 상상해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 있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곳의 날씨는 자유자재로 바뀌었으며 처음 디뎌본 곳인데도 이미 예전에 와본 적 있는 것처럼 익숙했다. 긴 시간 뒤에 찾아올 거라고 예상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당도한 것처럼. (…) 나는 다시 연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산과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윤조와 함께 라면 언젠가 눈을 감지 않고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프롤로그」, 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민이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인생에 있어 친구는 소중하다. 그렇다고 친구의 비밀을 무조건 알 필요는 없다. 내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의 비밀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하니까. 나는 그것을 ‘순환의 법칙’ 정도로 여긴다. 그런 삶의 순환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고 믿는다. 숨통이 조여오는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 생은 아름답게 빛난다.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 는 그런 소설이다. 켜켜이 쌓인 슬픔과 고통이 새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소설, 작은 틈을 벌려 그늘진 삶에 빛이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묘지기기 비올레트가 들려주는 담담한 자신의 이야기는 모두를 울린다. 단순하게 묘지를 관리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나는 소설을 읽을수록 점점 그녀의 삶에 빠져들었고 제발 그녀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올레트는 묘지를 관리하고 방문객에서 묘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화분을 팔고 정원을 가꾸며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남편 필리프 투생은 실종 상태고 죽음에 둘러싸였지만 평온을 느낀다. 


죽음이란 늘 그 모양이다. 죽은 지 오래될수록 산 사람들에게 끼치는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세월이 삶을 풍화시킨다. 세월이 죽음을 풍화시킨다. (21쪽)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비올레트, 소설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천천히 보여준다. 누군가 죽고 장례식이 진행되고 추모하는 이들의 모여 죽은 자를 위해 노래하고 편지를 낭독하며 그를 기억하는 일,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비올레트.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녀의 상처와 슬픔, 죽음이라는 사유를 통해 조금씩 회복하고 치유되는 시간은 그녀만의 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것이기에 때로 엄숙해지고 때로 먹먹함을 숨길 수 없다.


죽음은 도처에, 언제나 있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은, 늘 다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데도 우리를 물어뜯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개와 같다. 더 나쁘게는 우리 측근을 물었을 때. (117쪽)


아무리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삶은 너무 복잡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슬픔의 파도가 덮쳐온다. 비올레트에게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흔적은 하나도 모른 채 고아로 시작된 삶. 비올레트란 이름에 의미조차 생각할 수 없다. 이리저리 위탁가정을 옮겨 다니며 그녀가 바란 건 그곳을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등장한 필리프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첫 만남에 끌렸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필리프와 미래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없었고 사랑하는 일만 중요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필리프의 부모를 그가 막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곧 비올레트의 전부가 된 딸 레오닌이 태어났으니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차단기를 관리하는 건널목지기도 비올레트는 충분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를 웃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오닌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친구들과 신나게 캠프를 떠난 레오닌이 사고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레오닌의 죽음은 비올레트의 삶을 꺾어버렸다. 슬픔의 무게로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레오닌이 잠든 곳의 묘지지기로 일하게 된 건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레오닌을 만나러 간 곳에서 사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올레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침잠한 채 죽은 듯 살았을 것이다. 슬픔에 잠긴 비올레타에게 묘지지기를 하면서 그가 정원을 가꾸게 된 이야기를 듣고 흙을 만지며 그녀는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 레오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레오닌의 사고에 집착하는 비올레타에게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비올레트.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지. 내가 너에게 바통을 넘겨줄게. 언젠가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도록 해.” (383쪽)


그러나 비올레트와 다르게 필리프는 묘지지기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묘지를 관리하는 일은 비올레트만으로 충분했기에 그는 예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를 만났다. 그의 외출은 실종으로 이어졌다. 죽음이 정착하는 묘지를 살피고 기록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을 위해 묘지를 찾은 남자 쥘리앵의 등장으로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경찰인 쥘리앵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건넨다. 그 일기장에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록과 죽은 남자의 묘를 찾을 때마다 만난 묘지지기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발레리 페랭은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남편 필리프와 쥘리앵과 그녀의 어머니, 레오닌 죽음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엮었다. 소설 곳곳에서 모든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사건이니까요.’ (49쪽)), 죽음과 삶을 사유(‘우리는 목숨을 구하는 방법은 배우지만, 자신 혹은 타인의 삶을 되살리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496쪽))하고 통찰한다. 동시에 아름다운 한 편의 연애소설이자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형식도 지닌 놀라운 소설이다. 부서질 것 같은 비올레트의 생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신비를 배운다. 저마다 생의 비밀을 간직하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상실과 회복을 반복하는 모든 생을 위로한다. 좋은 소설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소설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22-07-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덕분에 좋은 소설 하나 더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7-28 08:20   좋아요 0 | URL
저는 무척 좋았던 소설입니다. 오거서 님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 2022-08-0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저..자목련님 리뷰읽고 바로 책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8-08 15:17   좋아요 0 | URL
좋은 느낌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게 만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