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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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산다라고 말한다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절대 죽음을 갈망하는 게 아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기에 쓸 수 있는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맥락이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잃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이들에 대해 타인과 사회는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한다. 그 심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그 심연을 깊게 파고든다. 죽음으로 닿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절박함에 대해, 인간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지와 권리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자살이란 말을 니체를 인용해 ‘자유죽음’이라 칭한다.


죽음이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벌어진 경우에만 자유롭지 못한 죽음이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아무런 사고 없이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61쪽)


누군가 자유죽음을 옹호하는 책이 아닐까 오해할 수 있다. 자유죽음에 대해 논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대한 담론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선택하는 이는 누구인가. 저자가 거론하는 이들은 유명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이거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존 인물이다. 우리 사회에서 접하고 만난 이들처럼 명예나 사랑 때문에, 성적의 압박이나 진로에 대한 두려움 등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이유 저마다 다르다. 그들과 자유죽음에 실패한 이들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동일하다. 그 용기로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사는 게 낫다는 동정심 같은 말들. 그렇게 말하는 이들 가운데 그들을 대신해 살아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저자가 ‘뛰어내리기에 앞서’, ‘손을 내려놓는’으로 정의한 자유죽음의 과정이자 실체를 마주하는 일은 힘겹다. 저자가 설명한 것처럼 ‘에세크’(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의 위협을 가장 분명하게 느꼈을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생각한다. ‘뛰어내리기에 앞서’, ‘손을 내려놓는’ 상황에 처한 이들의 메시지와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침내 자유죽음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게 시리고 아프게 다가온다. 동시에 지난 삶에서 ‘에세크’를 마주했을 때 나 역시 죽고 싶었다는 걸 나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


손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자아가 자신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가운데 혹여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실현하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다. 이제는 존재의 끝이기 때문이다. 있으므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이다. (137쪽)


자유죽음은 모든 존재로부터 해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로 사는 건 나,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이도 나뿐이니까. 어쩌면 이런 생각은 자유죽음은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건 자유죽음에 대한 변호나 두둔이 아니다. 끊임없이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을 겪으며 차마 거론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고문과 고통의 시간을 견딘 저자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과 사유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지 묻는 근원적 질문이다. 돌봐야 할 가족, 사랑하는 연인, 집단과 사회 구성원 속의 개인을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나라는 실존에 대한 뜨거운 고찰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유죽음에서 죽음이 아닌 자유에 집중해야 한다. 자유로운 나, 죽음을 선택하는 자유로운 삶을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결정적인 선택을 내려야 할 인생의 순간에 홀로 처절히 외로움을 곱씹는다. 이런 결정은 내가 나와 일 대 일로 마주 본다는 각오로만 내려져야 한다. 그 어떤 단체의 이상, 내가 보기에는 망상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 어떤 사회적 이상에 헌신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행동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실존적인 자기 결단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포기하려는 결정조차 그 개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일 따름이다. (186쪽)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없는 삶에 대한 저자의 독보적이고 거침없는 글은 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웅장한 울림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이제 자유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자유죽음을 품은 이거나 실행한 그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모두의 그것처럼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며 나 자신을 사는 일이 소중하고 중요하듯 말이다.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세상, ‘에세크’란 장벽은 여전하다. 그 세상에 나는 존재한다. 죽음이라는 실체와 맞닿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존엄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장 아메리의 말을 심연에 새기며 살고자 한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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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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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정면에 드러난 결과나 성과에 치중하다 보면 잃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작이 어떠했는지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야 정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떠나서 삶에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종종 혼란스럽다. 내가 아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의 실체가 나를 실망시킬까 봐.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으면서 소설 속 과학자의 마음도 어떻게 보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고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자신들이 연구하고 발명한 것들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증명하기까지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그로 인해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 막중한 변화를 가져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때문에 소설이라는 걸 인지하고 읽으면서도 역사의 기록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수식, 암호, 공식, 해제로 알았던 것들이 그들을 탄생시킨 과학자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프리츠 하버, 슈바르츠 실트, 아인슈타인, 모치즈키 신이치,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등 책에서 만난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증명한 것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이롭게 하는 선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세상을 파괴시키고 갈등과 대립을 조장한다. 환상적인 색채로 모두를 매혹시키는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속 푸른 색인 프러시안 블루의 이면에는 잔인한 죽음의 있다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화학적 반응으로 얻어진 결과를 수많은 이를 살리는 대신 죽이는 쪽으로 택할 수도 있다는 건 안다는 것의 공포를 증명한다.


구체적인 화학 구조물이나 수식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은 그것을 창조해낸 과학자의 피나는 연구와 노력, 절망, 고독을 알 수 없다. 어떤 시간을 살고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는지 모른다. 하나의 수식이 완벽해질 때까지 그들에게 인간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소설을 통해서나마 짐작한다. 과학자에게 연구의 삶은 태생적 운명적이었을까. 아이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의 해를 구한 슈바르츠 실트의 연구는 죽음을 압도할 정도였다. 소설 속 슈바르츠 실트가 이론을 완성시키는 설명을 1%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로 인해 얻는 성찰로 조국 독일에서 나타날 현상에 대한 염려(‘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71쪽)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천재 과학자나 수학자의 연구와 발전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때문에 많은 업적과 명성에 눌려 인류를 선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놓칠 수 있다. 아우비치 수용소에서 사망한 아버지와 프랑스 난민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지내야 했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그것을 인지했다. 그리하여 모든 연구활동을 멈추고 은거하며 은자처럼 지냈다. 학계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자신을 지키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실존하는 과학자를 등장시켜 과학의 원리나 분석을 설명하고 그들이 업적을 높이사려는 게 아니다. 앞선 과학자들의 이야기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의 논쟁을 다루면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건 하나의 대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이해하여 인간의 심연에 닿고자 하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한 철학적 고민 말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대상이 복잡할수록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래야 이 광선들이 수렴하여 우리가 많음을 통해 하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된 시각의 본질이다. 이미 알려진 관점들을 합치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는 것을 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실제로는 같은 것의 일부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105쪽)


하나를 더 정확히 파악할수록 다른 하나는 더 불확실해졌다. (215쪽)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세상은 불확실한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저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고 누군가는 곡해를 이해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의 이면을 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려운 소설, 분명 경이롭고 아름답지만 엄중한 무게감이 전해진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일이 나에게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나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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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8-17 2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짝짝짝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지점들을 느낀 걸 확인하는 과정은 늘 흥미로워요!

자목련 2022-08-19 09:13   좋아요 2 | URL
맞아요,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들과 놀라운 생각을 안겨주지요^^

그레이스 2022-08-20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는 말이 생각나는 리뷰입니다~!

자목련 2022-08-21 17:52   좋아요 1 | URL
좋았던 만큼 어려운 소설이었어요. 리뷰 쓰기도 너무 힘들었고요. ㅎ
 
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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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는 저항과 거역의 문화가 필요하다. 자본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비폭력 저항주의자를 통틀어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이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아룬다티 로이, 맨부커상 수상자, 사회운동가 (113쪽)


투표권이 있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정치적 견해를 낼 수 있다. 현재의 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영위한다. 내 어머니와 할머니는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들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내게 도달했을까. 아니다.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현재까지 세상 곳곳에서 부당과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 감옥에 갇히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애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기구 국제앰네스티 기획하고 작가이자 편집자인 조 리폰이 지은 『저항의 예술』에 그들의 뜨거운 함성과 목소리가 담겼다.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란 부제답게 이 책을 읽는 건 포스터를 읽는 일이고 그 안에 담긴 저항정신과 투쟁을 마주하는 것이다. 7개의 섹션(‘난민과 이민자, 모든 지구시민이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여성의 해방과 자유, 참여를 위해’, ‘성 정체성이 금지와 장벽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전쟁과 핵무기로부터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상과 이념이 감옥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피부색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는 세상을 위해’,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 각종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으로 모두 140 여개의 포스터에 담긴 메시지를 만날 수 있다. 과거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단순한 포스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지녔다.


정치적 구호, 포스터, 운동, 그룹의 상징을 통해 우리는 단결한다. 개인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목소리를 포식하고 때에 따라 한 세대 전체의 목소리를 담기도 한다. 목소리를 담은 이미지는 모두 중요하며, 우리의 영혼에 존재하는 불안을 담고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순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는다. (서문 중에서, 9쪽)


하나의 예술작품인 포스터는 천천히 오래 보아야 한다. 이미지와 문구는 물론이고 각각의 포스터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상황 설명을 통해 간절하고 절실한 메시지를 보고 들을 수 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난민을 보여주는 <프랑스는 격렬한 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란 포스터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 포스터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식량에 대해 초점을 맞췄지만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삶이 파괴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고 난민에 대한 차별은 심각하다. 1993년 유엔 난민기구에서 레고 미니 피겨를 활용해 만든 포스터 <어디가 다른 가요?>는 아이들의 교육용으로 좋을 듯하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향한 환대와 연대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접근 방식이 친근하고 훌륭하다. 피부색이 다르고 사용 언어가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다른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교육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접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관심사를 다룬 포스터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여성인 나는 특히 ‘여성의 해방과 자유, 참여를 위해’란 섹션을 자세히 보았다. 여성 고유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에 대한 자유, 그것은 자신의 몸을 지키고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와 닿았기 때문이다. 3대에 걸친 여서의 옆모습을 제시한 <자녀… 내가 원한다면… 내가 원할 때>란 포스터의 문구는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교적 관습이란 틀에 갇혀 있다. 이어진 <잘 가>란 포스터가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옷걸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설명을 보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참정권 캠페인 이후 여권 단체를 상징하게 된 초록색을 배경으로 위험한 낙태를 연상시키는 우울한 상징물로 여겨졌던 옷걸이가 잘 가라는 단어와 함께 낙태를 처벌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강력한 뜻을 전한다. 부끄럽지만 옷걸이가 낙태 합법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록된 140여 개의 포스터를 읽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간결한 색상과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그 표현방식도 다양해 훌륭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세계 각국의 저항의 현장에 대해 알 수 있고 시대별 포스터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지난 시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저항의 물결을 확인할 수 있다. 촛불을 들고 함께 외치고 소리쳐 변화시켰던 우리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저항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외침을 듣고 동참해야 한다. 그 외침은 개인을 위한 외침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이기에. 한 장의 포스터로 시작되는 저항은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이 책을 만나는 작은 일로 우리는 그 저항에 동참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본 포스터, 그 문구를 알리고 기억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외침일지도 모른다.


불법인 사람은 없다. 불법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사람마저 불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순이다. 사람이 어떻게 불법일 수 있는가? - 엘리 위젤, 노벨평화상 수상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13쪽)


인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권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에 뿌리내리고 있는 규칙으로 인간성, 평등, 진실, 정의의 가치를 반영한다. 인권은 법률로 규정하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익과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정 권리만을 선별해서 보호해서는 안 된다. (후기 중에서,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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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16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룬다티의 저 문장도 그렇고 기억하고픈 문장이 참 많았어요. 옷걸이 포스터는 간명하고 냉정하게 강렬했고요. 아니 에르노의 레벤느망에 코바늘 같은 게 나옵니다. 그 충격이 저 포스터 보는 순간 떠올랐어요.

자목련 2022-08-17 17:34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의 말씀처럼 좋은 문장과 포스터가 많았습니다. 몰랐던 것들, 어쩌면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마주하게 만든 책이었어요.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아주 조금 느껴지는 날들, 편안하시길 바라요^^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 지하철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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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이 인과 예가 사라진 아사리 판이라면, 2호선은 정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뢰한들의 세상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공항철도와 연결되는 9호선은 출근 시간에 지옥도가 열립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쪼그라들 수 있는지, 어디까지 치사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막돼먹을 수 있는지를 보려면 고시원에 살면서 9호선 오전 급행을 타보면 됩니다.(…)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제가 공항철도를 이용해 출퇴근을 합니다. (「공항철도: 호소풍생」, 전건우)


같은 시각 같은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이들은 서로를 기억한다. 어쩌면 눈 인사를 하는 정도가 되어 하루라도 안 보이면 궁금할지도 모른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이들이지만 저마다의 사정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직장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간병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냥 집을 나왔을 수도 있다. 지하철 노선을 다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에게는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을까. 청량리에서 시작한 경춘선의 승객들이 모두 춘천으로 향하지 않듯 공항철도의 승객들은 모두 여행객이 아니다. 단순히 이동 수단이라 칭할 수 없는 지하철은 어느새 이용객 모두에게 일상이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6명의 작가가 지하철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집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에서 다채로운 지하철 풍경을 만난다. 지극히 현실적인 지옥철의 모습에서 어디론가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 줄 것 같은 마법의 공간으로 때로는 설레는 로맨스가 피어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어느 시절 아주 잠깐 지하철을 이용했던 내가 기억하는 지하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놀라면서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취객이나 잡상인과의 다툼 정도로만 예상했던 전건우의 (「공항철도: 호소풍생」은 이제는 한물간 협객 ‘편 관장’은 아들과 살기 위해 상경한다. 공항철도에서 그는 국정원 직원이라는 사람의 요청으로 승객 중 산업 스파이를 찾아 나선다. 아니 어느 시절이라고 국정원 직원이라는 말을 믿는단 말인가. 그러나 ‘편 관장’은 꿋꿋하게 그들과 맞선다. 하나의 엉뚱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었지만 소설에서 ‘편 관장’에 의해 산업 스파이는 검거된다. 소설처럼 지하철 안에서 할아버지가 난리는 피운다면 과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있을까. 저마다 도착할 곳만 생각하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하며 타인의 일이라 여기는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나와는 별개라는 생각들, 그리하여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나만 살겠다고 출입구를 향해 달려드는 이기적인 모습은 정명섭의 「2호선: 지옥철」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좀비라는 실체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공포에 휩싸여 매뉴얼 따위는 잊은 결과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과거의 그날을 회상하는 형식의 이 소설은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마주한 재난과 공포에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고로 희생한 노동자를 추모하게 만든다. 


단순한 죽음뿐만이 아니다. 가족들의 소멸은 그들이 공유했던 기억들이 모두 증발되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가족이 죽었다는 것은 자신이 기억될 공간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의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 「2호선: 지옥철」, 정명섭)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다종다양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 바로 지하철이다. 그곳에서 매일 누군가를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조영주의 「6호선: 버뮤다 응암지대의 사랑」 속 ‘해환’처럼 작가일지도 모른다. 서울 시내 유일한 단선 운행을 하는 6호선에서 해환은 고시생 남자를 만난다. 지하철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남자와 소설을 구성하는 여자. 가난한 연인은 조금씩 사랑에 빠진다. 새로 개통된 역의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주변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지하철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결말이 보여주는 건 지독한 현실 직시하라는 메시지처럼 들려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어디서든 사건은 발생한다. 그런 의미로 보면 지하철이라고 특별할까 싶지만 밀폐된 공간으로 여기면 김선민의 「5호선: 농담의 세계」처럼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이나 정해연의 「1호선: 인생, 리셋」처럼 특정 시간 특정 역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상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5호선: 농담의 세계」에서는 이곳이 아닌 그곳에 도달해서야 이곳이 주는 안전함에 감사할 수 있고 「1호선: 인생, 리셋」속 인물처럼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자 타임리프를 시도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후회를 안겨준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누군가 지금도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 지하철 안에 있을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용할 일이 없는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본다. 복잡한 노선들이 우리네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속에서 만난 이야기는 판타지나 SF든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더 이상은 모두의 지하철이 지옥철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쉬운 점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의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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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1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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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불행과 불운으로 둘러싸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접할 때 반사적으로 내 삶을 둘러보게 된다. 소설 속 인물보다 괜찮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안도한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그건 소설이고 현실의 불행과 불운은 얼마나 강하게 우리는 몰아치고 있는지 확인한다. 『소설 보다 : 가을 2021』에서 만난 인물들이 하나같이 행복과는 먼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왠지 다 알 것 같다. 삶이란 참 팍팍하고 고달프니까.


구소현의 「시트론 호러」는 유령 ‘공선’이 주인공이다. 굶어 죽은 10년 차 공선은 사람이나 사물을 만지지 못한다. 우리가 예의 생각하는 유령의 능력 같은 건 없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신 대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찾는다. 이른바 독서 메이트. 소설 창작 모임에 나가는 효주가 공선에게는 딱이었다. 함께 모임을 하는 태오는 형식적인 읽기에 그쳤고 지민은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효주는 한 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었다. 그런 효주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겨 학교에 나오지 않고 대신 태오와 지민을 통해 그의 소설을 읽게 된다. 태오와 지민은 효주의 소설 속 아쉬운 부분과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공선은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었다. 태오와 지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공선은 온전히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공선은 효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선은 소설을 친구로 여기는 유령이었기 때문에 소설의 하자는 사실상 공선이 소설을 더욱 자세히 읽게 되는 관계의 진입로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하자에서 고유한 사랑을 발견하고 고유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건 사람과 유령이 똑같았다. (「시트론 호러」, 25쪽)


구소현과 마찬가지로 처음 접하는 권혜영의 단편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도 역시나 우울하다. 교대 근무를 하고 돌아온 ‘나’는 화재 경보 소리에 집을 나선다. 진짜 불이 난 건지 경보기가 고장 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파트 비상계단을 내려간다. 자신과 같이 밖으로 나온 이들의 소리는 들리지만 기이하게도 그들을 확인할 수는 없다. 


계단 아래 계단, 그 아래도 다시 또 계단.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구렁텅이였다. 발밑으로 펼쳐진 공간의 밑바닥이 가늠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의 검은 머리통. 그리고 가운데로 수렴하는 계단뿐이었다.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54쪽)


어디가 끝인지 모르고 막연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건 몇 개의 카드와 빚뿐인 자신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암울한 상황은 화재경보기 오작동이라는 안내를 받았지만 ‘나’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그 어디에도 ‘나’가 기대하는 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제목만큼 울적하고 무거운 소설이다. 


이주란의 「위해」 도 다르지 않다. 다만 이주란의 소설은 언제부턴가 소설보다는 자세한 일기처럼 여겨진다. 이주란이 인물은 대체적으로 가난하고 소극적이고 자신의 아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주란은 그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들려준다. 주저하고 서성이며 내뱉지 못하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사람들은 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수현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수현의 생각은 달랐다. 난 어느 정도 행복하고 나야말로 긍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중요한 건 역시 몰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해」, 99쪽)


무언가가 좋다. 싫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그걸 하고 싶었다. 해본 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들. 그걸 하고 싶었다. (「위해」, 103쪽)


그리하여 수현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옆집 소녀 유리를 존중한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뭔가 강요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에 대해 묻지 않고 필요한 대화를 나누고 유리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한다. 얼마나 힘드니?라는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는 게 진정한 위함이라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그러니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주는 위해(慰解)는 우리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소설 보다 : 가을 2021』의 세 단편은 표면적으로 우울하고 애처롭다. 그럼에도 왠지 위로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도 소설 속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명확한 말은 떠오르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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