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새소설 11
류현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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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갈등은 봉합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사회 어디에서나 가장 힘든 문제가 되었다. 경험을 토대로 건네는 조언은 잔소리가 되었고 자신의 상황이 제일 어렵고 중요할 뿐이다. 그건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관계 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가족이라서 그렇다는 근본적인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예상하게 만드는 류현재의 소설 속 가족도 그러하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입에 든 찹쌀떡 때문에 숨이 막혀 죽어간다. 그 곁에 아버지도 칼에 찔려 죽음을 맞는다. 부부는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다. 부족할 것 없는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연 이런 참혹한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뉴스에 등장하는 존속살해인 것일까. 제목을 떠올리면 그게 정답일 것 같은데. 이 비극의 시작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아버지가 모임에 나가고 어머니 혼자 산에 오르다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다.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지내기를 원하는 엄마. 아버지 혼자 엄마를 감당하기는 어렵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부부에게는 아들 둘 딸 둘 자녀가 있다. 큰 아들은 의사, 큰 딸은 선생님, 이혼해 아들을 키우며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둘째 딸, 부모와 함께 살면서 공무원 공부를 하는 막내. 이미 익숙한 전개로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둘째 딸이 아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와 부모를 모신다.


돌봄은 어렵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만 생각할 뿐이다. 돌봄을 받는 부모는 둘째 딸이 마음에 차지 않고 딸은 그런 부모가 서운하다. 모든 걸 자신에 맡긴 형제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둘째 딸을 시작으로 가족 가족 저마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가족에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말이다.


둘째 김은희는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간호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잘한 선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요구 조건과 잔소리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건 술과 동생 친구인 세탁소 아들 광수였다. 의사로 성공한 큰아들 김현창은 부모가 환자처럼 여겨진다. 어머니가 위급할 때마다 자신을 찾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부담스럽고 힘들다. 가족으로부터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한 큰 딸 김인경은 일을 하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겨우 끝났다고 여겼는데 엄마가 쓰러진 것이다. 둘째가 모시기로 했으니 경제적으로 보태면 된다고 여겼다. 막내 김현기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염려가 불편하다.


어쩌면 부모의 죽음은 소설 속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가족의 짐이 되기 싫었고 아들의 교통사고로 인해 막대한 합의금이 필요했던 큰 딸은 부모의 집을 둘째에게 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언니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간 둘째 딸은 가족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아버지와 형제들 때문에 막내는 일터에서 집중할 수 없었다. 둘째 딸의 말을 한 번쯤 들어보고 한 번쯤 해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한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게 가족이에요. 가장 질진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이 가족이라고요!” (194쪽)


범인이 누구일까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헛헛함과 쓸쓸함을 감출 수 없다. 가족이라는 게 무엇일까. 부모는 무엇이며 자식은 무엇인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늙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앉은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서 말다툼이 싸움으로 이어지는 건 그만큼 소통이 없었던 때문일까. 사느라 자주 만나지 못한 탓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니 막내 김현기의 말처럼 핏줄이라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핏줄이라는 말은 사기다. 진짜 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데, 연결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니까. 혹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핏줄이 연결돼 있다면 그건 아래로만 향해 있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핏줄이 이어져 있는데, 자식의 핏줄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향해서만 뻗어있을 테니까. 그리고 자식을 향한 핏줄이 연결되는 순간, 부모 쪽에서 온 핏줄은 막혀버린다. 거추장스러운 넝쿨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161쪽)


부모 없이 존재하는 이는 없다. 설령 그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끝까지 참담함을 걷어내지 못하는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순간 울컥하게 된다. 이제 내게 부모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서 떠난 형제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앞으로 고아로 살아갈 내 삶이 서글퍼서 그런지도 모른다.


부모가 늙고 병들게 되면 어느 가족이나 거처야 하는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 길고 긴 간병의 세월 동안 겪게 되는 고립감과 외로움. 다른 형제,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 죄책감, 분노, 가족들이란 말만 들어도 치밀어 오르는 피곤과 싫증에 대하여. 당신만 이기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네 가족만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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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랏다 2022-07-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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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새로운 작가의 발견처럼 여겼는데 점점 몰입도 힘들고 이해는 어렵다. 나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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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5-2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3~4년전인가부터 이해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구입을 못하고 있는데 이번 해가 특히 어려웠나보군요.
소설이 어느 정도의 공감이 필요한데 저도 배경 자체가 이해가 안되거나 상황 설정 자체가 이해 범위에서 벗어나면 읽기가 어렵더라구요^^; 자목련님만 어려우신 건 아닌듯 합니다. 젊은작가상의 특성상 실험적인 작품들도 많이 들어가는 듯해요!

자목련 2022-05-26 10:36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저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에요. 소설보다 시리즈도 그렇고요. ㅎ 취향과도 닿는 듯하고요.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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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3회를 맞은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어느 하나 비슷하거나 포개지는 게 없다.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마다 수상작품집의 소설을 읽는 편이다. 점점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 많아진다. 나와 접점이 없는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어떤 것이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대상 수상작인 「초파리 돌보기」는 평생을 자신이 아닌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엄마 원영의 삶을 소설가가 된 딸 지유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과거 실험실에서 초파리 돌보는 일을 했던 시절을 원영은 그곳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자신의 공간이 있었고 자신에게 지급된 것들이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원이 끊겨 일을 그만두었고 그 일이 원영의 마지막 일이었다. 원영은 이후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다. 지유는 원영의 건강 악화를 실험실에서 찾으려 하고 원영에게 그 시절의 기억을 질문한다. 소설에 등장할 거라는 질문에 원영은 적극적을 대답하고 지유의 소설에 자신의 의견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행복한 결말 같은 것 말이다.


임솔아의 「초파리 돌보기」는 소재 면에서는 독특하지만 뭔가 아쉽게 다가온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도 가지 못하며 살아온 원영과 원영의 돌봄으로 살아온 딸 지유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며 할 수 있는 일이 그녀의 소설 결말을 엄마의 바람대로 끝내는 것이라는 게 말이다. 내가 품었던 임솔아의 이미지보다 약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유의 선택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멜라의 「저녁 놀」은 두 번 읽은 단편으로 여전히 좋았다. 서로의 이름이 아닌 ‘눈점’과 ‘먹점’이라 부르며 함께 살아가는 여성 커플이 사회의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보편적인 관계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눈점’과 ‘먹점’이라 말을 사용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움츠리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의 사랑을 그려내는 김멜아의 의도는 멋지다.


김병운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소설 보다 : 봄 2022』에서 만난 「윤광호」가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발표 순서로 보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 먼저다. 이 소설의 화자 역시 게이 소설가로 소설 속 인물인 주호를 인권단체 독서 모임에서 만났다. 주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도착한 ‘나’는 주호의 연인 인주와 함께 주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무성애자 주호와 인주의 만남 과정과 과거 ‘나’와 주호의 사이를 추억하다 ‘나’는 주호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주호를 안다고 여기고 함부로 내뱉은 말들, ‘나’는 주호의 개별성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에 대해 생각한다.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얼마나 작고 편협한 틀에 갇혔는지 말이다. 나와는 전혀 닿을 일 없는 다른 세계의 삶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던가. 무지의 판단이다. 해서 김병운의 작가노트의 이런 구절이 오래 남는다.


소설과 삶이 서로에게 무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소설과 삶이 서로를 외면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 요즘 내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건 이런 일들인 것 같다. (139쪽, 김병운 작가노트 「더 중요해지는 것」, 중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차별적 공격에서도 피해자에게 기우는 책임을 일갈하는 김지연의 「공원에서」나 독서 모임에서 자신이 소유한 것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옳은 선행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엄마들과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약자다움을 강요받는 미애와 해민 모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김혜진의 「미애」는 가장 현실적인 소설처럼 보인다.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행해지는 폭력에서 보호받을 없는 약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 복지의 안과 밖의 경계에 누가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빛나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무게는 언제나 그림자에 속하는 현실은 서수진의 「골드러시」에서도 있다. 호주에서 보다 멋진 삶을 선택한 진우와 서인은 점점 더 늪에 빠지는 듯하다. 호주 정착에 필요한 비자를 획득하면서 꿈꾸던 황금빛 미래는 자꾸만 미뤄진다. 진우와 서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결혼 7주년의 여행에서 둘의 간극은 극심해진다. 그들의 바랐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진우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서수진 「골드러시」, 253쪽)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은 무척 실험적이 소설로 다가온다. 새의 개체수가 급증한 미래에서 인간과 새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섬뜩하다. 그동안 인간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살처분을 당한 동물들, 그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까. 소설 속 새의 목소리는 서글프면서도 참담하다. 하지만 내게 파격적인 형식의 소설이 강렬하게 다가온 건 아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는 작가의 몫이고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한 권으로 다양한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이런 수상작품집에서 독자가 선택한 대상은 다를 수 있다. 그런 이야기의 장을 열어주는 일, 젊은작가상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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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5-2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멜라 작품 좋았어요. 그런데 저는 결국 완독을 못했어요...올해 작품들이 유난히 저는 어렵더라고요.

자목련 2022-05-24 09:59   좋아요 0 | URL
점점 더 젊은작가상을 읽는 일이 버겁게 느껴져요. 나와의 그들의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서이제의 소설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ㅎ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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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소개하는 일은 좀 어렵다. 어떤 시든 독자의 마음에 닿는 부분과 감동을 주는 부분이 다르니까. 저마다의 감성을 하나로 통일할 수 없고 그건 통일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시집을 읽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시집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은 뭐랄까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박노해 시인의 12년 만에 선보인 시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박노해’란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존재일 것이고 누군가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를 모르는 이들도 존재할 터, 그런 의미로 이 시집은 그저 시로 다가갈 것이다.


그의 시는 평온함을 바라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자신을 비롯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평온에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와 다르지 않다. 삶이라는 인생길을 먼저 걷는 이가 들려줄 수 있는 담백하면서도 담담한 이야기다. 어쩌면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닮았을지도 모르는 이런 시에 눈과 마음이 머문다.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정작 그 순간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지 모르는 모든 젊음에게 고하는 시처럼 들린다.


젊은 날의 고결한 이상과

젊은 날의 탐험의 열정과

젊은 날의 투쟁과 상처가

얼마나 위대한 걸 심어나가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의 젊음은

젊은 육체에서 추방당해

밤이 오면 그의 꿈길에 헤매다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으니 (「젊음은 좋은 것이다」, 일부)


누구나 사는 일은 고단하고 고단하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도 같다. 그게 정의고 가치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양심과 진리를 향한 몸부림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겼을 때 그걸 아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기에 이런 시는 너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무엇을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나아기만 하다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살다 보면 위선할 때가 있죠

권력과 다수 앞에 그럴 때가 있죠

그래도 우리 정직하기로 해요

나 자신에게 진실하기로 해요


나 지금 위선하고 있다

나 지금 타협하고 있다

비겁함과 두려움에 끌려가고 있다


홀로 울며 직시하고

부끄러운 치욕을 삼키며

절대로 익숙해지지 마요

절대로 길들여지지 마요 (「살다 보면 그래요」, 일부)


돌아보면 모든 게 부질없고 모든 게 아쉬운 게 우리네 삶이다. 수많은 관계에 허덕이고 잘못을 되뇌며 후회를 반복한다. 무엇이 중요하지도 모르고 중심을 잃고 살아간다. 그러다 간절한 무언가를 갈구할 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신을 찾는다. 우리가 바라는 건 정말 무엇일까. 욕망을 내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가 구할 것도 시와 같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늘이여 저에게

최대한의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최소한의 것만을 허락하소서


최소한의 물질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는 능력을


최소한의 지식에서

최대한의 지혜를 구하는 능력을


최소한의 관계에서

최대한의 우애를 가꾸는 능력을


그리하여 하늘이여

저에게 적은 소유로 기품 있는 삶 속에

오로지 최대한의 사랑만을 허락하소서 (「최소한의 것만을」, 전문)


시인의 생각과 삶이 하나하나 쌓여 301편의 시로 남았다. 그 모든 시가 우리에게 말한다. 삶을 용서하라고, 더 집중하라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사랑이 되라고,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말이다. 어떤 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만 같고, 어떤 시는 시인의 마음이 이랬을까 혼자 상상하게 만든다. 시를 읽으며 그가 지나온 굴곡진 삶을 생각하고 그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가 조금 알 것도 같다.


짐 보따리는 단단히 묶어라

매듭은 너무 꽉 묶지 말아라

풀 때를 생각해 날캉히 묶어라


사람살이가 그런 거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인연 줄 모질게 자르지 마라

언제 어디서 마주할지 누가 알 것이냐


인생살이가 그런 거다


그때그때야 일이 목숨 같다지만

지나고 나면 일은 끝이 없는 일들이고

결국은 사람, 사람과 사랑만 남은 것이니 (「매듭을 묶으며」, 전문)


모든 걸 놓아야 할 때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 삶이 조금 편안해질까 싶다가도 여전히 움켜진 것들이 많다는 걸 발견한다. 주어진 것들을 노래할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언제 깨우치게 될까. 영영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나는 그래서 이렇게 시를 읽으며 잠시나마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는지도 모른다.


일상은 일상으로 두라

일상을 이벤트로 만들지 말라

일상이 일상으로 흐를 때

여정의 놀라움이 찾아오리니


결여는 결여대로 두라

결여를 억지로 채우지 마라

결여는 결여된 채 품어갈 때

사무치는 그 마음에서 꽃이 피리니


상처는 상처대로 두라

상처를 감추지도 내세우지도 마라

상처가 상처대로 아파올 때

상처 속의 숨은 빛이 길이 되리니 (「그대로 두라」, 전문)


세상의 끝에

오지가 있다


아니다


오지의 끝에

세상이 있다


오지가 사라지면

세상 또한 무너진다


내 안의 시원의 오지가 사라지면

이 땅의 순수한 이들이 무너지면 (「세상의 끝에」, 전문)


시를 읽으면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다. 얼마나 물렀는지 차마 설명할 수 없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물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형체를 알 수 없던 마음이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고 할까. 박노해의 시를 천천히 읽고 조금 멈추고 다시 읽어 나가는 시간이 그러하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주먹을 쥐고 자세를 바르게 고친다. 뿌듯하고 시원한 마음으로 채워진다.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을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게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네가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너의 하늘을 보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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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목록 네오픽션 ON시리즈 2
강지영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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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필요한 생활용품을 온라인에서 구매한다. 택배 배송 안내 문자를 받을 때마다 조금 불편한 게 있다. 언제부터 주문한 물건의 목록이 상세하게 문자로 안내를 받기 때문이다. 분실의 책임 여부를 가리고 배송 물건의 정확성을 알리기 위해 방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활정보가 노출되는 게 내키지 않는다. 택배 기사님이 그걸 기억하고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지만 관음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기심 많은 누군가 그럴 수도 있으니까. 생각과 상상은 충분히 소설로 이어질 수 있고 강지영의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제작이자 드라마로 방영 중인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할인마트에서 캐셔로 일하는 ‘나’가 손님이 구매한 물건을 관찰하면서 시작한다. 주기적으로 마트를 방문하는 이들의 구매하는 물건을 통해 상대의 직업과 습관을 유추한다. 나름 적중했다고 확인할 때 희열을 느낀다. 그런 ‘나’ 앞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수첩에 메모를 하고 다른 손님과 다르게 ‘나’에게 질문을 하는 그를 ‘나’는 소설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구매한 물건들이 도구로 사용된 것 같은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나’는 그가 살인자라고 확신하며 추적한다. 배달 시스템을 이용해 주소와 이름을 알아내고 잠복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동료 캐셔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급기야 둘은 사귀는 사이로 발전한다. ‘나’는 동료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가 정말 범인일까. 흥미롭고 신선한 소재의 섬뜩한 스릴러인 단편은 CCTV로 가득한 세상을 생각한다. 어디서든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작정만 하면 알 수 있는 세상. 한편으로는 모든 게 공개된 세상에서 일어나는 완전한 범죄를 있을 수 없다는 게 작은 위안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일상의 공포가 피부로 전해지는 오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나머지 6개의 단편도 일상 미스터리라 할 수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 대학교수인 ‘나’는 실종된 제자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우연히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는 향낭 주머니를 얻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영혼과의 만남은 저마다 죽은 자의 사연을 듣다가 무서운 악귀와 만나게 된다.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귀신을 보거나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어떤 기운을 느낀다는데 어쩌면 그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길고양이를 화자로 내세운 「덤덤한 식사」와 환생을 다룬 「용서」는 안타깝고도 먹먹한 판타지로 다가온다. 「덤덤한 식사」 속 고양이는 병으로 형제와 어미를 잃고 우연히 동물 병원 직원에게 발견되었다.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고양이는 수의사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았고 장수라는 이름을 갖는다. 장수는 자신의 B형 혈액을 필요한 고양이에게 수혈해 주고 수의사와 파트너가 된다. 평생을 교사로 지낸 「용서」의 ‘나’는 뇌졸중으로 중환자실에 있다.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아기로 환생한다. 자신을 돌보는 부모의 얼굴에서 과거 자신의 제자의 모습을 본다. 첫 부임지에서 만난 아이들, 수학여행에서 교통사고로 모두 죽은 아이들 중에 있었다. 새로운 생에서 그는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일의 용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게임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설정의 「러닝패밀리」는 게임을 좋아하거나 즐겨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낯설고 기묘하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다영’은 학생들이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게임 ‘러닝패밀리’에서 캐릭터가 죽으면 현실에서도 그 숫자만큼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있어야 게임을 할 수 있기에 스마트폰이 없는 이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세계이다. 아이들이 믿는 것처럼 캐릭터가 죽으면 사라지는 이들이 스마트폰이 없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들이라는 설정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강지영이 보여주는 미스터리는 현실적 상상에서 바탕이 된 이야기로 터무니없는 허구로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꿈에서 만나는 일, 심각한 스토킹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어려움, 과거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간절함, 현실을 벗어나 환상의 세계를 꿈꾸며 즐기는 게임까지 주변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상한 일은 어디나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늦게 발견하기도 하니까. 그러니 판타지나 스릴러 영화와 드라마로 만나면 재미있지만 현실에서는 제발 그만 만나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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