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 할 사이에 9월도 휘익~ 지나가는 느낌이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9월 말이다.
아이가 아픈 바람에 요리도 몇번 빠지고, 스포츠댄스도 몇번 빠지고, 추석, 집 문제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기억으로 9월이 마무리될 것 같다.
며칠동안 한희석님의 <물려줄 게 없는 부모는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라>를 읽었다. 가난한 아빠의 공부 기적이라니 어떤 방법을 썼길래 사교육없이 명문대에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는가 궁금했다.
돈이 많다면 사교육의 힘을 빌릴 수 있겠지만 우리 형편도 한희석님만큼이나 어려운 사정이니 잘 읽어두었다가 아이들 자라는데 활용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책을 읽다보니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대하는가가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공부라는 것이 자기 의지에 불타서 해야하는 것인만큼 한희석님은 아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도 끊어가면서 말이다. 아이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인다면 그 아이가 어찌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책을 다 읽고 남편에게 슬그머니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기본적으로 아이가 머리가 좋은거 아니냐며 책 읽기를 거부한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아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다 아이의 노력만큼의 댓가가 따라온 것이고, 아이가 공부할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과 위로와 충고를 아끼지 않고 매일 아침 신문에서 칼럼을 오려 건네는 아빠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이가 그렇게 마음을 쉽게 다잡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가난하게 살아봐서 알지만 가난하다는 것은 너무도 불편한 것들이 많다.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전전하는 일도, 무료관람할 수 있는 전시회나 공연을 찾아 전전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노력하기로 작정한 아빠의 마음을 자식이 헤아리고 따라주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아이가 참으로 대견하단 생각을 했다.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주변의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한희석님의 글을 읽으며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일이 아이의 공부에 대한 의지도 함께 키워갔다는 것을 느꼈다.
가끔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에 귀기울여주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느 순간 부모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 아이를 위해 어떤 노력의 댓가도 받을 수 없겠단 생각을 했다.
아직 아이들은 어리지만 순간 자란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자라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다만, 아이들을 믿어주는 마음,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단 생각을 한다. 단지 공부 1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떤 일에 있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가 되었든 운동이 되었든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다.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하고 왔다.
한달에 한번 영화보기도 쉽지가 않다. 이번달이 가기전에 알라딘에서 주는 영화할인쿠폰을 사용할 욕심까지 더해져서 오늘은 무리해서 오전에 영화를 보고 왔다. 보고 싶었던 영화는 <의뢰인>이었는데 내일부터 상영한단다. 결국 <도가니>를 보게 되었다.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는 이미 읽었다. 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사실 볼까말까 망설였다. 아이들을 잔혹하게 다루는 영화를 보는 일이 쉽지가 않다. 하지만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왔다.
책으로 읽었을때에도 그 잔인함과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치를 떨었는데 영화는 그 효과가 극대화되어 전달되었다.
극장 안에서 터져나오는 한숨소리와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교장, 행정실장, 선생님들로부터 수시로 성폭행을 당하고, 폭력에 얼룩진 아이들을 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재판과정 또한 얼마나 치를 떨며 보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가해자들, 그들을 옹호하는 집단들, 돈 앞에서 허물어지는 피해자의 가족들......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걸 함께 공감하며 보는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들도 이 상황에 틀림없이 분노했을 것이다.
아픈 딸아이와 홀어머니를 위해서 반듯한 직장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끝내 져버리지 않은 선생님,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자신의 딸도 지킬 자신이 없다는 그 말이 좋았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들도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사회가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재판에 이기지도 못했어도 이들의 소리없는 외침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한희석님이 가난했지만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관심갖고 노력하고 애정을 기울인 것처럼 우리 아이들 모두에게 그런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면 어른들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은 더이상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또 소외된 이웃의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9월은 이렇게 끝나간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그 무언가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자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어른이 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