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남편이랑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
영화초대권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못 간다는 작은 언니 대신 남편이랑 함께 서울극장에 다녀왔다.
아이들은 친정에 맡겼는데 워낙 예민한 아이들이라 친정 엄마가 힘들어 하시는 편이다. 그래서 현준이 현수에게 제발 싸우지 말고, 울지 말라며 신신 당부를 하고 나왔다. 남편은 일이 늦게 끝나서 따로 출발하기로 하고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서부터 함께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오랜만에 가슴 설레이며 극장 나들이를 하고 왔다.
남편은 사무실 옆에서 전철을 탔고, 난 엄마네 집 앞에서 버스를 탔다. 처음엔 남편이 빨랐지만 2번 갈아타야하는 바람에 거의 비슷하게 도착하였다. 가는동안 서로 어디쯤 가고 있는지 계속해서 문자를 주고 받았다. 연애하던 때의 설레임이 있었다.
집에서 나올때 현준이가 "엄마, 아빠 어디가는데?" 하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는데 녀석이 느닷없이 "엄마, 아빠랑 데이트 하러 가는거야?" 한다. '데이트'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웃음이 나왔다. 데이트 잘 하고 오라며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기에 별 걱정없이 다녀왔다.
<수상한 고객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많았던 영화였다. 연봉 10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배병우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수상한 고객들......그들의 인생이 하도 처절하고 남루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암담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즐거울 수 없는 그들의 삶이 너무 아팠지만 또 그래도 살아야할 이유를 찾게 되어 다행이었다.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 할머니 때문에 배꼽을 잡고 웃었고, 천재적 기타리스트인 아이의 천연덕스러움에 놀랐다. 내가 가장 배꼽빠지게 웃었던 건 아무래도 마지막 야구선수 시절의 배병우가 삼진으로 잡겠다던 홈런왕에게 데드볼을 던지는데 빵 터졌다. 좋아하는 여자를 성희롱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단 생각에 통쾌했던 것 같다. 틱장애를 앓고 있는 임주환,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욕, 그것은 슬프지만 웃음을 유발하는 독특한 장치가 되었다. 살기 힘든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0시 조금 넘어 영화가 끝났고, 친정 엄마네까지 버스타고 1시간 정도 걸렸다. 저녁을 안 먹었던 탓에 둘 다 배가 고팠고 아이들이 잘 잘거라는 믿음에 늦은 시간 열려 있는 감자탕집에 가서 남편과 소주 한병을 나누어 마셨다. 얼마전부터 한잔 두잔 마시다보니 소주도 이제 제법 마시게 되었다.(소주 세잔정도 마시는데 네잔이나 마셨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현관을 어떻게 들어갈까 고민하며 가고 있었는데 마침 담배를 피우러 나오신 분이 계셔서 그분께 문 좀 열어달라고 부탁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엄마가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불이 꺼져 있어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엄마도 깜박 졸다가 놀라셨던 것 같다. 아이들은 10시쯤 잠이 들었고, 저녁도 잘 먹었으며 약도 잘 먹었단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의젓하게 자란 것 같다. 작년까지도 엄마, 아빠 안 온다며 밤 늦어지면 울었는데 방에서 잘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동 그 자체였다.
남편은 다음에 또 맡겨도 되겠다며 언젠가 또 데이트하러 나가잔다. 나야 물론 당연히 좋다고 맞장구 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