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주말만 기다리며 살았던 것 같은데 요샌 월요일을 기다리면 사는 것 같다. 일요일 복작대던 아이들이 월요일이면 유치원으로 가니 집 청소하고 한가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 월요일이 더 많이 기다려지는 것 같다. 

라디오를 켜고 멸치 머리 떼고 똥을 빼고 있는데 라디오 디제이가 오늘 문득이라는 주제로 사연을 보내달란다. 노래도 흘러 나오고 이런 저런 사연도 소개되고 나는 열심히 멸치 똥을 빼고 있는 그 순간,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 집안이 어수선했다. 대가족이 함께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세를 들어 살던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고나니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할머니는 막내 삼촌과 할머니가 다니시던 천리교 사무실을 돌본다며 서대문쪽으로 가시고, 작은 집은 작은 집대로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나갔다. 우리 식구 여섯은 갑자기 닥친 일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동네 슈퍼도 하셨고 작은 아버지네는 쌀을 파셨었다. 또 석유, 가스 같은 것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공무원이셨는데 어찌된 사연인지 그만 두셨다. 우리 식구도 간신히 지하 두칸짜리 방을 얻어 살게 되었다. 세상에 그런 곳에서 삶이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지하는 늘 어두웠고, 습했다. 여름이면 도배지를 뚫고 곰팡이가 나왔다. 

자리를 잡은 할머니는 오빠를 데려갔다. 오빠 학교가 할머니넷 가까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칸짜리 방에서 4남매와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건 쉽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큰언니는 가위에 눌렸다. 검은 형체의 어둠이 언니를 내리 눌렀다. 자다가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 눈을 살며시 뜨면 언니를 내리 두르던 형체가 보였다. 언니를 흔들어 깨우면 그제서야 숨을 크게 들이시고 다시 잠을 잤다. 

우리 남매는 모두 두살 터울이라 고만고만해서 돈 들어갈 일도 참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아이를 키우다보니 아이들이 클수록 먹는 양이 부쩍 늘었다. 입이 무섭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알 것 같다. 

중학생이 된 이후 엄마는 방학이면 내게 할머니께 가 있다 오라고 한다. 그럼 싫다 좋다 내색도 안 하고 할머니 집으로 갔었다. 막내 삼촌이 워낙 거칠어서 솔직히 같이 밥 먹는 것 조차 힘들었었다. 밥상 머리에서 밥 맛 없게 먹는다고 타박도 많이 당했다. 복스럽게 먹지 않는다고 어찌나 타박을 하던지, 언제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할머니 집에 가 있기를 바랬다.  

할머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신전을 닦고, 소금과 정한수를 마시고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아침을 짓고 밥을 먹고나면 설거지는 내몫이다. 청소를 하시고나서도 끊임없이 일을 하신다. 할머니 집에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이 멸치 머리를 떼어내고 똥을 발려내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일이 문득 생각났다. 할머니랑 마주 앉아 멸치를 다듬던 일, 그땐 더 여리고 작은 손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려고 잔 가시에 찔려가면서 멸치를 다듬었다. 

난 할머니를 생각할때마다 엄마를 괴롭히던 나쁜 할머니라고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같이 멸치 똥을 발려내고 김에 기름을 바르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치 엄마같았단 생각을 한다. 성장기에는 멸치를 많이 먹어야한다며 비싼 잔 멸치는 사지 못해도 국물을 우려내는 싼 멸치를 사서 다듬어 육수도 내고 잘게 찢어 볶음도 했던 것이다. 멸치 볶음용이 아닌 국물용 멸치에 고추장을 살짝 넣고 물엿과 참기름, 깨소금을 넣어 만들어 주셨던 그 멸치 볶음이 문득 그립다. 

할머니와 난 수제비를 참 좋아했다. 큰 솥에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고, 감자와 양파를 넣고 팔팔 끓는 물에 수제비를 떼어 넣는 일은 참 즐거웠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수제비, 칼국수가 생각난다. 구수하고 단백한 그 맛이 내 머리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듯 글을 쓰는 지금 입안에 침이 고여든다. 

저녁 8시까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TV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시던 할머니, 보람된 하루를 보내고 드라마 보시며 까무룩 잠이 드시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살아계실땐 생각조차 못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동안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 한심하단 생각을 한다.  

날이 흐려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오늘 유난히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 잘 계신거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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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할머니를 일년에 두번 뵈어서, 살갑게 가까운 기억이 없어요.
외할머니 역시 친정 엄마만 이뻐하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꿈섬님, 조금은 힘든 기억이 있으시네요. 그래도 그리운 할머니 기억에 부러워요.
저두 그제 수제비 해먹었는데.. 근데 저는 멸치 똥을 발라낸 기억이 한번도 없는거 있죠.
에구구, 그거 발라야하는거구나. ㅎㅎ

꿈꾸는섬 2011-04-19 23:12   좋아요 0 | URL
저흰 출산할때 할머니가 다 받아주셨대요. 탯줄도 잘라주셨구요. 막내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성화하셔서 저까지 낳았는데 딸을 낳아서 아빠가 할머니께 키우라고 하셨었대요.(이건 어른들 하시던 말씀 중 들었지요.ㅜㅜ) 힘들때만 떨어져 살았고, 할머니도 몇년 뒤에 다시 함께 사셨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처가 많아요.ㅜㅜ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생각나서 다행이다 싶어요. 멸치 똥을 발라내지 않으면 국물 맛이 좀 쓰고 텁텁하지 않나요? 전 어릴때부터 보아와서 당연히 그래야하는 줄 알았어요.^^

blanca 2011-04-18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울 할머니가 너무 그리워요. 우리 세대들은 고부 간의 갈등이 있어서 다 그런 양가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엄마를 괴롭히는,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할머니.멸치볶음, 수제비 얘기 들으니 왈칵 더 할머니가 뵙고 싶어지네요. 진짜 저도 마고님처러 멸치 똥 다 그대로 먹고 있었네요^^;;

꿈꾸는섬 2011-04-19 23: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블랑카님이 할머니를 기억하던 글 저 기억나요. 그때 블랑카님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꼈어요. 전 사랑한다고 말하진 못할 것 같아요.ㅜㅜ 그냥 그때의 기억이 아련해요. 애틋한 것도 같지만 정확하게 뭐라고 표현하지 못하겠어요.
멸치 똥..ㅎㅎ..맛있던가요?

sslmo 2011-04-19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술 푸고 싶어서, 날씨 탓하고 아주 안달이 났었는데...
아웅, 이 페이퍼 보니까 할머니 생각이 나요~ㅠ.ㅠ

저 내일 꼭 멸치 수제비 먹을 거예요~

꿈꾸는섬 2011-04-19 23:15   좋아요 0 | URL
술 푸고 싶은 날 ㅎㅎ 예전같았다면 저도 그런 감정에 휩싸였을거에요.ㅎㅎ

오늘 멸치 수제비 드셨을까요? ㅎㅎ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4-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친할머니, 외할머니..모두 기억이 별로 없네요.
친할머니는 막판에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하셔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살다가 문득...생각나는 사람있죠. 정말 문득,인데 잠시나마 마음이 아련해질 때..

꿈꾸는섬 2011-04-19 23:18   좋아요 0 | URL
전 옛날 일을 참 잘 기억하는 편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얘기를 곧잘 해요. 친정 엄마가 신기하대요.ㅎㅎ 외할머니랑은 많이 만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 기억하는 것들이 좀 있어요. 다음에 외할머니 얘기도 해드릴게요.^^ 저희 친할머니도 막판에 엄청 힘들게 하셨어요. 나이 드시면 자연스레 치매기가 있나봐요. 밤새 옷장 정리하시고 다음날 아침이면 뭐가 없어졌다고 친정엄마 괴롭히셨어요. 엉뚱한 이야기로 친정 부모님 싸움도 시키시고....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세실 2011-04-19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멸치 수제비 먹고 싶다. 헤...
그리운 할머니. 저도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나요. ㅠㅠ

꿈꾸는섬 2011-04-19 23:19   좋아요 0 | URL
아, 멸치 수제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세실님은 외할머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으신가봐요.
어린 시절 좋은 기억을 갖고 계신 분들 참 부러워요.^^

2011-04-2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시 건축물들에 번식해 있는 지하방들.. (경기도도 그런가요?) 정말 사회악이에요. 대부분 0.5층인데, 왜 그렇게 짓는지 모르겠어요. 1.5미터만 높여 지으면 되는데. / 힘든 시절이었어도 추억은 또 그리운 거군요. 할머니와 앉아서 멸치똥 떼던 시간 이런 것들, 별 거 아닌데 그리워지는.. 추억은 다 그런 건가 봐요.

꿈꾸는섬 2011-04-21 12:2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지어진 빌라, 단독주택은 지하방들이 여전히 존재해요. 어둡고 습기차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추억으로 남았으니 다행이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