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엄마의 문병을 다녀오던 날 병원의 대기실 커다란 TV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큰 화면으로 나오는 뉴스를 얼핏 지나쳐왔다. 무슨 일이지? 생각은 거기까지였고, 그날 오후부터 나는 밤새 끙끙 앓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독감은 몸살과 고열을 동반했다. 밤이 새도록 끙끙 앓았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내 아팠었다. 종일 잠만 자다가 우연히 켠 TV YTN뉴스에서는 박완서 선생님을 추모하는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수줍게 웃으며 상대의 질문에 답하시던 박완서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친청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시니 한번쯤 뵐 수 있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 언젠가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되었다. 언젠가 알라딘에서 설문했던 만나고 싶은 소설가로 꼽았던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이 책이 발간되고 올려진 리뷰들을 보면서 참 많이 흐뭇해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어느 날에는 꼭 읽어야지하고는 임철우 선생님의 <이별하는 골짜기>와 함께 구매해두고는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책꽂이에 꽂아둔채 잊고 있었다. 나의 게으름에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선생님을 보내고나서야 이 책을 펼쳤다.  

   
    소리없이 나를 스쳐간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신이 솎아낼 때까지 필요한 사람으로 좋은 글을 쓰신 선생님을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읽었던 것이 중학교 3학년 <엄마의 말뚝>이었다. 홀로된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서울에 정착하려고 애를 쓰던 그 모습을 읽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진 아버지 대신 돈을 벌러 나가신 엄마를 생각했었다. 그때의 짠한 마음이 아직도 아리게 떠오른다. 

 

 

 

 

 

 

 

 

 

선생님의 작품중 읽은 것들만을 추려보았다. 워낙 많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써오신분이라 그 작품들을 모두 읽어보진 못했지만 요 몇권만으로도 선생님의 세계에 푹 빠졌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신 선생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서재는 아파트보다 별로 넓히지 못했어도 지하에 서고를 하나 마련했다. 비로소 책을 헐렁하게 꽂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여유롭게 삐딱하게 서 있는 책을 보니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책이 된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거의 대부분의 책들은 삐딱한 생각을 담고 있으니 삐딱하게 서 있어야 마땅하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책장에 책이 헐렁하고 삐딱하게 서 있으면 꺼내 보기는 또 얼마나 편한가. 나는 내 책도 나처럼 공간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동류의식을 느꼈다.(146~147쪽) 

  제목만 보고도 처음 읽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감동이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책은 못 버린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148쪽)

 
   

책에 대한 욕심은 많은데 공간도 경제적 여유도 도와주질 않는다. 지금 있는 책만으로도 숨이 가쁘다고 남편이 한소리 할때마다 가끔 주눅이 들기도 한다. 책을 헐렁하게 꽂을 공간을 만들어줘야할텐데 아직 그러질 못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 책까지 늘어나고 있으니 책장은 늘 넘쳐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행복감, 가슴 설레임을 생각하며 나도 책을 버리지 못하겠다. 자꾸만 집착하게 된다. 그때의 그 설레임과 행복감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읽으셨다는 책을 보면서 내가 읽었던 책들도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감상을 남기신 것을 생각하면서 어찌나 흥분되었는지 모른다.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미처 읽어보지 못한 위의 8권의 책들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나이는 어리지만 선생님께 스승과 같았다는 이청준 선생님의 작품 <별을 보여드립니다>는 나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엄마를 부탁해>, 언제고 제주도로 날아가 제주올레길을 걷고 싶게 만들었던 <놀멍쉬멍걸으멍 제주걷기여행>, 김연수라는 작가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밤은 노래한다> 언제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던 위로가 되어주는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나도 많이 아끼는 책이다. 

어렸을 때는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연했는지 모른다. 이제 더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은 그런 희망조차 허락하질 않는다. 그런 희망조차없는 죽음은 정말 무섭고 두려운 그런 것이다. 

여든의 노작가가 자신의 삶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글을 읽으며 나는 어떤 길을 걸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추억하고 어떤 것을 안타까워하게 될까? 과거의 슬펐던 기억조차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누군가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마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하여 40년을 줄곧 글을 쓰신 선생님, 그분을 닮고 싶다.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온 몸을 들쑤시는 참담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천천히 또 느리게 열심히 읽고 글을 써야겠단 생각을 한다. 

박완서 선생님을 추모하며,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를 읽으며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부디 좋은 세상에서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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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2-12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래왔던 것인지. 아니면 시절이 하 수상하여 유난히 그런 것인지 몰라도,
최근 몇 년 새에 시대의 스승님이라 부를만한 분들이 연이어 유명을 달리하시네요.
박완서 선생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꾸준히 책을 내시는 모습이 참 멋져보였는데, 안타깝네요!

꿈꾸는섬 2011-02-12 21:40   좋아요 0 | URL
요 몇 년 사이 죽음이 연이어졌지요. 정말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뿐이에요.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가 작년 8월에 발간되었으니 정말 돌아가시기 전까지 끊임없이 글을 쓰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출간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참 멋진 분이셨지요. 정말 많이 안타까워요.ㅜㅜ

마녀고양이 2011-02-1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 나두 책장에서 꺼내 읽어야겠다 하면서 울었는데
그만 잊어버렸어요. 저란 인간이란게 이렇군요.... ㅠㅠ.
꿈섬님 페이퍼 보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지금 꺼내놓아야겠어요.

박완서 선생님, 너무 멋지시죠. 그분처럼 나이들고 싶어요.

꿈꾸는섬 2011-02-12 21:41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칭찬이 자자했지요. 배울 것이 정말 많은 책이었어요. 생각할거리도 많았구요.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어요.

순오기 2011-02-1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올라온 박완서 선생님 책 중에 아직 못 본 책도 보이네요.
가지 않은 길은 어제 받았고, 두부는 중고샵에서 건졌는데 아직 펴보지 못했어요.
님의 사랑고백에 덩달아 찡해집니다~~~~

꿈꾸는섬 2011-02-12 21:43   좋아요 0 | URL
제가 읽지 않은 책들은 더 많더라구요.ㅎㅎ
정말 꼭 한번 뵙고 싶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소망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네요.ㅜㅜ
저도 순오기님 올리셨던 작품들중 못 읽은 것들 많았어요. 찾아서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아이리시스 2011-02-12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거의 읽은 책이 없거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에세이는 사뒀는데 그걸로 주말 잘 나겠습니다!!!^^

꿈꾸는섬 2011-02-12 21:44   좋아요 0 | URL
두고두고 읽어야할 것 같아요. 박완서 선생님 작품이 워낙 방대하잖아요.^^
아이리시스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네요.^^

자하(紫霞) 2011-02-1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는데 아직도 못 본 책이에요.
저는 이사가면 읽어야겠어요.
책을 다 싸놨거든요.^^;

꿈꾸는섬 2011-02-12 21:44   좋아요 0 | URL
베리베리님 이사가세요. 아직 날이 추워 고생하시겠어요. 이사 잘 하세요.^^

후애(厚愛) 2011-02-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책이 몇 권 보이네요.^^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꿈꾸는섬 2011-02-14 14:32   좋아요 0 | URL
후애님의 관심도서는 무엇일까요? 살짝 귀띔해주세요. 서울 오실때 선물할게요.^^

양철나무꾼 2011-02-1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꿈은 제가 응원해 드리죠~^^

꿈꾸는섬 2011-02-14 14:32   좋아요 0 | URL
ㅎㅎ나무꾼님의 응원에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