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길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졸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남편과 아이들 깰까 조그마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랬더니 졸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잊고 지내던 일이 생각났다.
결혼 전, 남편과 연애를 하던 때였다. 그땐 남편과 결혼을 하겠다는 어떤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 그냥 만나는 게 좋았고 내 어리광 받아주는 남편이 좋았다. 그런데 내가 이 남자랑 꼭 결혼을 해야지 했던 그때가 있었다.
대학 4년동안 사귀던 선배와 헤어지면서 같은과 선후배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헤어진 사정은 구구절절 얘기하고 싶지 않고 아무튼 그런 일이 있고 나도 사람들 만나는게 쉽지 않았다. 친했던 사람들과 서먹서먹해지기도 했고 대놓고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내 탓이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기숙사 한방에서 생활했던 같은과 후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후배 집이 완도였지만 많은 선후배가 모였다. 나도 두 은사님과 후배 하나와 함께 내려갔다. 완도, 그 먼 곳까지 꾸역꾸역 찾아간 것이다.
문상을 드리고 선후배들이 모인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술잔이 돌고 한 나이어린 남자선배가 어떻게 얼굴 들고 이곳엘 왔냐고 했었다. 그 얘길 듣고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때부터 술을 엄청 마셨던 것 같다. 솔직히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얘길 들은 이후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결국 올라가야하는 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잔류했는데 순간 드는 한기에 깜짝 놀라 깼는데 여관방이었고 남은 사람들이 모여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후배 여자 아이들 하는 얘기가 정말 짜증이 났다. 동기 아버지 상을 치르러 와서 노래방을 다녀왔다는 얘기가 오가는데 정말 화가 났다. 아직 오십도 되지 않은 젊은 아버지가 배타고 나가셔서 바다에 빠져 돌아가셨는데 문상 온 자들이 어찌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하도 갑갑해서 밖으로 나와 바깥 바람을 쐬었는데 다시 돌아가려고하니 방번호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 지금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첫차로 올라갈거라고 얘기를 하고 터미널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웠다. 솔직히 낯선 곳에서 무섭고 두려웠지만 술이 덜 깬 상태라 겁이 안 났던 것 같다.
여하튼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도저히 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영산포에서 내렸다. 그리고 화장실을 오가며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것들을 게워냈다. 그리고 영산포 터미널 의자에 앉아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기다려 달라고......그 전화를 받고도 긴가민가 헤매고 있는데 정말 남편이 날 찾아왔다. 어느 구석에서 쪼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약국에서 사온 술 깨는 약을 먹이고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었었다. 그때 정말 시체처럼 잤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해서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이 은혜 두고 두고 갚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남편이 날 태우러 오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한참을 그곳에서 죽을동 살동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 불편한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나를 찾아 내려와 준 것에 감동 백배했던 것도 사실이고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도 사실이라 남편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년을 넘게 연애를 했고 그 이후에 이런 대형사고는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내가 필요로할때 언제든 달려와 주었고 내게 도움을 주었다.
남편이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며 고맙고 미안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지금 내가 좀 피곤하고 졸리고 힘들지만 그때의 남편 상황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그에게 갚아야할 차례하는 것,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를 위해 달려왔던 그 남자, 지금 생각해도 설렌다.
남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고, 남편이 있어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