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뒤뜰 물앵두 다 익어서 우박처럼 쏟아지는디……."

"죄송해요. 요번 주말도 이래저래 갈 데가 많네요."

"그려. 허긴 여기 내려오는 기름값이면 물앵두 한 가마니는 사먹을 텐디 뭐."

잠시 가슴 한쪽에서 콩깍지 터지는 소리가 나고, 썰물이 싸하니 빠져나간다.

"늬덜 안 내려와도, 늬덜 대신 왼갖 새들이 우리 집 물앵두 먹으러 온다야."

"새라뇨?"

"내가 작년에도 말혔잖여. 우리 동네 새들이 그렇게나 종류가 많은 줄 몰렀다. 종일 동네 할망구들하고 새 똥구멍 쳐다보며, 새소리 듣는 재미가 삼삼혀. 처음에는 거무죽죽한 새들만 오더니, 요즘엔 총천연색 새들이 날아와서 난리다. 아마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새가 되어서 오시는게벼."

"이쁘겠어요?"

"새 키우기 이렇게 쉬운 줄 몰렀다. 새만 오면 좋은데, 쥐새끼도 와야."

"동물원이구만요?"

"내려올 때 닭 사료 한 포대만 떼 와라."

"닭도 쳐요?"

"아녀. 앵두 다 지면 사료 줘야지."

"어머니도 참."

"기똥차게 잘생긴 새 한 마리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디. 꼭 돌아가신 니 아버지 같어."

"아이고, 이제 전화 끊을 때가 됐고만요. 곧 내려갈게요."

전화는 어느새 끊겨버렸다. 아버지라는 말에 아마도 목이 메어 수화기를 놓쳤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끊임없는 병치레,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차렸던 술상. 그리고 농사일은 뒷전이었던 나날들. 어머니는 그걸 다 받아 이셨다. 가슴에 고스란히 품고 다독이셨다.

난 그게 불만이었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버지는 나에게 지게질을 가르치셨다. 숫돌에 낫을 벼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어찌 어린 고사리 손에 낫을 쥐어주고 술만 드실 수 있을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가슴은 숯가마였을 것이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동생 셋을 잃고, 두 어머니를 섬겨야 했을 종손의 어깨. 아버지는 지게를 지지 않아도 멍 가실 날이 없었으리라.

그렇다. 술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당신의 간간한 치마폭에 아버지의 아픔을 다 담고 다독인 것이다.

언젠가, 통화 중에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왜 텃밭 구석구석에다 과실수을 심어놨겄냐?"

"왜요?"

"빚이 많아서 그런 거여."

"빚이라뇨?"

"마음의 빚 말이여."

"예?"

"니가 내 말뜻을 알겄냐? 농촌에서 일 안하고 사는데 하루하루 빚 안질 수 있겄냐?"

"……."

"햇빛한테 빚지고, 냇물한테 빚지고, 풀한테 빚지고, 동네 사람 바쁜 손에게 빚지고……. 심지어 동네 꼬맹이들한테도 빚지고."

"네."

"당신이 떠나도 계속 열매 맺을 거 아니냐. 그걸 누가 먹겄냐? 어미 혼자 먹으면 얼마나 먹겄냐? 다 나눠 먹으란 거지. 내려올래? 늬덜 자주 고향에 다녀가란 뜻도 있는 겨."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간간하다. 도량을 파며 뻘을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어머니의 치마는 주름져 있다.

저 치마가 간혹, 해일처럼 뒤집혀 어머니의 얼굴을 덮치고 어머니의 눈물을 받아먹을 때가 있다.

앵두나무가, 바닥에 떨어진 무른 앵두를 굽어보듯 마음 붉어진다.

 

☆★☆★☆★☆★☆★

 

어쩜 이 어머님은 이토록 사랑스러운지 몰라. 저렇게 슬쩍 돌려 고향다녀가란 말을 하시다뉘.

책 읽으며 내내 떠오르는 고향의 엄마, 아부지. '가슴 한쪽 콩깍지 터지'고 '썰물이 싸하니 빠져나'가기 전에 고향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만. 행동으로 옮겨!!!

 

이정록 시인의 산문집은 구수하다. 짠하다. 웃음이 비실비실 나온다.

웃다가 울다가 똥구멍에 솔날 것 같다.

시로도 만들어진 어머니와 블루스 치는 장면의 대사는 압권!

소시장에 끌려나갔다가 혼자 돌아온 소 이야기도 뭉클.

구수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시적 감수성은 최고!

 

그래서 시 한 편!

 

 

엄니의 남자

               _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등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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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5-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투리가 귀에 익다 싶었는데, 역시요. 너무~ 반갑네요~ 님의 서재에서도 이정록 시인의 산문집과 시집을 만나니 ㅎㅎ .. 댓글은 처음이지만서두~ 님 반가워요!

readersu 2012-05-05 15:18   좋아요 0 | URL
저두 반갑습니다^^
이정록 시인이 여고때 선생님이셨나봐요.
님의 서재에 들어가보니 그런 듯^^
18일에 작가와 만남 있던데... 가보셔요.
저도 시간 나면 가볼까, 합니다.
한번 뵌 적이 있는데 꽤 유쾌하신 선생님 같았어요^^

icaru 2012-05-0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진짜요? 너무 소중한 정보네요~ 갈 수 있으면 꼭 가 뵙고 싶어요!!

readersu 2012-05-05 16:28   좋아요 0 | URL
앗, 모르셨군요!!
http://blog.aladin.co.kr/culture/category/30096086?communitytype=MyPaper
알라딘에 행사 공지 떴어요! 신청해보세요^^
전 친구가 해서 안 하고 있는 중(떨어질지도 모르는데 ㅋㅋ)
 

이상하다. 아무래도 올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죄다 책을 내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신간은 절대 안 살거야! 새해 벽두에 다짐을 했는데 좋아하는 작가들이 마치 짜기라도 하듯 연이어 신간을 출간한다. 그 사이사이 궁금해보이는 책들은 왜!! 자꾸만 출간되고 있는지. 봄도 오고 새 옷도 사고 싶고 예쁜 구두도 장만하고 싶은데 그 모든 지출이 책에게 집중되어 내게 멋부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책 읽는다고 새 옷이 나오는 것도, 맛있는 게 생기는 것도 아닌데(아, 신간 이벤트 당첨되면 작가와 여행가는 행복한 일은 생기기도 하더라^0^) 아무튼 이번 주 들어서면서부터도 신간 '뽐뿌'가 장난아니게 들어와서 눈 돌아간다.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면 안 사면 그만인데 일단 보관함으로 넣어두고 왜 고민하는지 나도 모르겠다(혹시 아는 사람?). 아무래도 지를 것만 같은 '무서운' 책들!

 

 

알랭 드 보통이 정이현과 동시에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듣고서부터 궁금하긴 했더랬다. 알랭 드 보통은 나로 하여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궁금하게 만들어 필사를 하게 만드는 작가. 그가 '결혼'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하니 오홋, 아이는커녕 결혼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나는 정이현의 '연애'보다 알랭 드 보통의 '결혼'이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나. 그는 얼마나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결혼 이야길 풀어놓았을까? 혹시 그걸 읽고 결혼이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독신을 고집하는 나의 불안한 마음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놓칠 수 없는 알랭 드 보통! 책소개에 보니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사소하고, 남들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종류의 싸움 때문에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면, 이는 모두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상대가 내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쳐야 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 마땅하다는 이상(理想)을 바탕으로, 서로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질문, 즉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어떤 집을 장만할 것인가에서부터 가장 낮은 수준의 질문, 소파는 어디에 놓고 화요일 저녁엔 뭘 하며 보낼까에 이르기까지, 광대무변한 행위들의 범주를 두루 아울러 최고의 완벽을 구현하려는 시도다."

 

역시 알랭 드 보통의 철학적인 문장, 맘에 쏙 든다. 제목도 그렇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기초'라는 단어가 섞이는 것은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알랭 드 보통을 떠올리면 '여행'과 '기술'이 어울리듯 자연스러워진다. 알랭 드 보통의 17년만의 자전적 결혼 소설이란다.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작가의 말이 맘에 와 닿는다.

 

“이 소설은 ‘오래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최초의 행복감이 자취를 감춘 뒤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사랑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낡은 사랑의 초상이 독자들에겐 암울하게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가인 나는 이것이 진지하고 성숙한, 조심스럽지만 보다 희망적인 답이 되길 바랄 뿐이다.”

 

 

 

김수영이다. 아니, 강신주다. 난 강신주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게 없다. 책을 다 사서 꽂아두고선 뜬금없이 한 챕터 읽고 다시 꽂아두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책을 내면 살까말까, 망설이기 몇 번하다가 사서는 그냥 꽂아둔다. 한데 강연 때마다 그가 말하는 김수영에 관한 책이라니! 이건 뭐 바로 장바구니로 들어갈!(-.-) 책소개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강신주가 본격적으로 자기 지향점을 드러내는 책이다. 즉 철학자로서 인문정신이라는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자기 이야기’를 써 내려간 책이다. 이 책은 시인 김수영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문학비평서가 아니다. 민족주의 시인으로 오해 받았지만 실은 강력한 인문정신의 소유자였던 김수영을 통해 한국 인문학의 뿌리를 찾는 철학서이다. 다시 말해, 1960년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이 땅의 자유와 인문정신에 대한 강신주의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인문적인 고백록이다.


 

강신주 덕분에(!) 구입한 김수영 시와 산문도 아직 제대로 못 읽었는데ㅡ

 

 

 

시인의 산문집이 또! 나왔다. 이번엔 이정록 시인이다. 어익후야! 시인으로 등단하고 20년만에 처음으로 낸 산문집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상이 시로 바뀌는' 아주 기막힌 시상을 지닌 그의 시들. 그런 평범한 시 속에서 슬쩍 내비치는 감수성 강한 시구들. 이정록 시인의 시를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한데 그의 시, 일정 부분은 어머니가 툭툭 내뱉는 말들이 시로 바뀐다는 사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 책으로 인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될 듯.

 

할머니가 빗물이 고인 고무신을 토방에 닦아 세우며 마루에 오르신다.
“왜 우리 집 복숭아가 제일 쪼끔이래유?”
나는 볼멘소리로 할머니를 흘겨본다.
“다른 아주머니들은 그저 많이만 달라고 보채니께 그렇지.”
“할머니도 많이 달라고 하면 되잖아유?”
할머니가 거친 손으로 나와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얼굴은 할머니 때문에 군살이 박힐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에서 젤로 이쁜 우리 손주들이 먹을 것인디, 내가 어찌 많이만 달라고 헌다냐?”
“난 많이 먹고 싶단 말이여.”
“훌륭한 인물이 될라믄 이쁘고 잘생긴 걸루만 먹어야 혀.”
“그럼 여기 썩고 병든 것은 왜 가져왔댜?”
“그건 할미 거여. 할미는 이도 션찮고 잇몸도 부실혀서 딱딱한 복숭아는 못 먹어. 공짜로 얻은 거여.”
“그거 빼니께 몇 개 되지도 않네 뭐.”
“그랴도 세월 과수원에서는 최고 특상품으로 가져온 겨.”

 

시 속에 보이는 충청도 사투리가 정겹고 웃기고 재미있는데 산문집은 더 그럴 듯해서 기대 잔뜩이다. 《시인의 서랍》속에 숨겨진 '코 끝 찡하다가도 슬며시 웃음 터지게 하는 감성'적인 이야기들, 그가 만들어낸 시 속에 사람 이야기. 아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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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4-2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록 시인의 시 좋던데 산문집이 나왔군요.
낼름 담아갑니다.^^
그리고 보통과 정이현이 같이 썼다는 저 책도 유혹이네요. 이것도.^^

readersu 2012-04-27 10:29   좋아요 0 | URL
이정록 시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저도 그런 독자 중에 한 사람이고. 그래서 산문집에 대한 기대도 많답니다^^;
세 작가 모두 제가 좋아하는 분들일 뿐이지만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blanca 2012-04-2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 ㅋㅋㅋ 꺄아, 정말 기대됩니다. 예고편도 유튜브로 보고 더 기대되네요. 미처 몰랐던 신간 소식 감사합니다.^^

readersu 2012-04-27 10:30   좋아요 0 | URL
책이 곧 나올 거라는 소식 듣고 기다렸다가 올라오자마자 찜부터 해버리고 말았답니다. 어떤 감상을 안겨줄지 마구 기대가 되더라구요^^

해라 2012-04-27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ㅎ
어찌 안사고 버티겠어요 ㅜ ㅜ 저도 그냥 말없이 담습니다! ㅎ

readersu 2012-04-27 10:31   좋아요 0 | URL
감사감사.
절 지르게 한 지름신이 해라님에게도 옮아갔군요!
좋은 소식!! 우리 모두 책을 많이 사서 읽어야해욤^^
(흑, 근데 요즘 책값들이 장난아니게 비싼 ㅠㅠ)
 

작년에 문학상을 받은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읽었다. 2011년 퓰리처상을 받은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2011년 맨부커상을 받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깡패단의 방문을 먼저 읽었는데 분량이 만만찮았다. 또 공간과 시간이 비규칙적이어서 가끔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읽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에 비해 2011년 맨부커상을 받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문학상치고는 꽤나 얇은데다 초반 몰입도가 높아 잡자마자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하길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과 같이 책 대 책으로 엮어보면 좋겠다, 했더랬다. 두 권의 책, 비슷하면서 다르다. 한데 역시 문학상을 받을만한 좋은 책이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제니퍼 이건의 서사적인 이야기도, 줄리언 반스, 역량 있는 그의 글도 너무나 훌륭했다. 이런 책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던 독자로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포괄적으로 보자면 시간, , 기억. 두 권의 책이 가진 공통점이다. 제니퍼 이건의 책은 제목에서부터 '시간'을 말한다. 깡패=시간, 어떻게 이런 공식이? 일단 읽어보라고 말하겠다. 또 두 권의 책에는 개개인의 ''이 들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삶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삶을 지배하는 '기억'들이다. 좋거나 나쁜 추억, 그리고 잊었거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하나둘 씩 터져 나온다. 과거,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나의 삶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두 권의 책을 감히 비교하지는 못한다. 그저 내 식대로 일부분들만 주절거린다. 삶에 관해. 내 것이기도 하지만 당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고 시점도 다르다. 또한 공간과 시간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처음엔 뭐지? 헷갈린다. 하지만 매 장이 독립된 이야기처럼 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탄탄하다. 모두 열세 장으로 된 이야기의 중심은 레이블 대표 베니와 그의 비서 사샤의 인간관계로 엮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이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부조리나 깨달음은 독자로 하여금 나는 잘 살아온 것일까, 혹은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와 같은 회환과 희망을 가지게 한다.

 

어느 정도 세월을 보낸 분들은 알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청춘에겐 얼마나 더디고, 나이가 들면서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청춘일 때는 이 시간만 지나면 뭐든지 근사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지만 그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삶이 존재하리라곤 그땐 생각을 못한다. 또한 언제나 그 청춘일 것만 같은 삶이 지나고 보니 그렇지 않은, 그저 그때보다 조금 나은 여유만 생겨날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느끼게 되는 씁쓸한 느낌은 깡패단의 방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마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오는 토니의 삶은 어떤가? 잘 살아온 것일까? 토니는 그렇다고 처음엔 여긴다. 비록 이혼을 한 상태지만 딸과의 교류도 있고 헤어진 아내와도 친구로서 지속적으로 만남을 유지한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있어 여유롭진 않지만 노후를 편안히 보내기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과거를 돌아볼 사건(!)이 터진다. 지나가버린 시간, 이젠 까마득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때의 일들이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토니에겐 과거를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 주어졌다.

 

잘 살아왔다고 반추하는 토니가 알게 되는 사실들은 우리가 그동안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 위주로 왜곡되어 왔는가를 보여준다. 자신의 기억이 왜곡된 기억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으면서도 그는 계속 의문과 질문을 던지며 변명 같은 말로 삶의 본연을 예감하지 못하지만 과거 자신이 던진 말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그 말로 인해 두 사람의 미래가 무시무시한 결말로 치닫게 되어버린 일을 알게 된 후 그가 가지는 삶의 무게는 과연 평범할 수 있었을까?

 

삶의 끄트머리에서 인간은 누구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살아오는 동안 잘못한 일은 무엇인가? 적어도 그걸 생각할 정도의 시간은 모두 가지길 바랄 것이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게 될지언정. 파노라마처럼 내 인생이 머릿속에 지나갈 때 무얼 깨닫게 될까.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다.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패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을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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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4-2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저도 연달아서 두 권의 책을 읽고 있는데! :)
글 잘 읽고 갑니다 ㅎㅎ

readersu 2012-04-23 12:06   좋아요 0 | URL
앗~ 반가워라^^
수다쟁이님의 책수다 기대합니다^^
두 작가 모두 너무 멋져요. 이런 좋은 글들을 쓰다뉘!!
 

4월 들어서면서부터 너무 정신이 없었다. 평일은커녕 주말에도 책 읽을 틈도 없이 바빴는데(그 와중에도 너무 재미있었던 《시작은 키스》와 읽다 말았던 《깡패단의 방문》은 읽었다) 오늘부터 다시 텅 빈 시간들이 찾아왔다. 바쁜 후에 찾아온 시간이라서 여유롭다거나 혹은 아,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가 아닌 뭔가 허전하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친구는 이럴 때 술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하는데 마땅히 잡을 약속도 없고 결국 내린 결론은 책이나 읽자는 것. 이번 주에도 읽어줘야 할 책이 한두 권이 아닌데다 책 안 산다고 해놓고선 적립금 생기자마자 찜해둔 책들을 마구 사댔었기 때문에 미안해서라도 책을 읽어줘야 한다는 의무감?!^^;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작가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라딘 서재에서 들었다. 전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탓에 후속작을 기다렸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소설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모를 수는 없다. 등단 작가가 아닌데다 로맨스 소설로 분류가 되기도 하지만 책을 읽고 너무 공감하며 홀릭하여 친구들에게 입소문을 냈던 책이기 때문이다. 또 읽은 친구들마다 다들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책수다를 떨만큼 좋았던 책이었기에 나 말고도 알라딘 서재에서 누군가 이도우 작가의 책 이야길 했을 때 대개 반가웠더랬다. 하지만 읽던 책들이 많은데다 간만에 나온 책이라 반응이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순위 구입 품옥으로 올려놓고 마침내 내 품에 들어온 것이다.

 

잠옷을 입으렴》, 책소개를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배가 되었다. 더구나 그가 추억하는 어릴 때의 기억들이 죄다 내가 추억할 수 있는 것들과 맞물려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어본 사람들의 평이 한결같이 서정적이고 먹먹하다며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이도우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당장 읽어보고 싶어졌다. 주말, 읽을 순위 1순위.

 

 

이웃 블로그 님의 롤랑 바르트 사진 이야기를 읽다가 그 책이 읽고 싶어 검색하던 중에 발견한 오래된 책《사랑의 단상》, 그동안 롤랑 바르트라는 이름만 들었지 그의 저서를 한번도 읽어보려고 한 적이 없었는데 독서의 세계는 놀라워라. 관심이 없던 작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구했다. 원래 관심을 두었던 책은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고.

 

검색해보니 나온지 꽤 오래된 책이어서 동생 집 책꽂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살펴본 결과, 역시 있었다. 정말 오래된(1991년 문학과지성사) 판본의 책으로 색은 바랬고, 활자는 작았다. 웬만하면 그 책을 읽어볼까 싶었는데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하여 할 수 없이 비싼 책이었지만 구하고 말았다는.

 

서점의 미리보기로 잠시 보고 어제 받은 책을 앞부분만 펼쳤는데 아주 좋아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긴 '사랑'이라는 단어엔 워낙 약한 사람인지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장 읽어볼 수는 없겠지만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봐야겠어.

 

 

친구가 상품권 생겼다며 만원 한도 내에서 필요한 책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앗, 필요한 책?! 그런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냐마는, 이게 웬 떡 아니 책이냐며, 책 선물하겠다면 욕심을 내는 처지라 만원 한도 내의 책을 막 골랐다. 요즘 다들 알다시피 소설 책 한 권도 만원이 넘는지라 고르고 골랐는데 마땅히, 굳이 살 책이 없어서 혹시 800원 초과하면 안 되냐니까, ㅋㅋ 괜찮다고 하여 구한 책, 바로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이다.

 

키냐르의 책도 읽어본 게 없었다. 언젠가 동생 책꽂이에 꽂힌(동생은 책이 많다. 도서관 수준이라서 내가 꼭 사고 싶은 책이 아니면 무조건 빌린다)은밀한 생》을 제목이 주는 '은밀함' 때문에 시도를 했다가 포기했는데, 그래서 키냐르의 책이 나왔다고 해도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트윗으로 한 문장을 올린 친구 덕분에 책소개를 보고 관심을 두었던 책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싶어했는지 알 것이다. 시작은 이렇게 되는 거란다. "15년간 함께 살아온 남자친구 토마가 다른 여인과 키스하는 것을 본 후 이제까지의 삶에 결별을 고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안은 위선과 거짓의 삶을 직시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새로운 출발을 선택하고 안은 새로운 생성을 위해 지금까지의 삶의 흔적을 지운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을 팔고, 은행계좌를 닫고, 신용카드와 핸드폰을 없애고, 옷과 사진을 불태운다." 나도 한때는 어디선가에서 다른 생을 살아보고 싶었던 적이 있는지라(사랑 때문이 아니라) 책소개를 보는 순간 혹! 해버렸더랬다. 기대가 된다.

 

 

성석제 작가의 글은 워낙 재미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책 《위풍당당》역시 완전 재미있겠구나 싶었지만 바로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있었다. 한데 책 소개를 해주는 편집자들이 어찌나 재미있게 책 소개를 하는지 안 읽어볼 수가 없게 만들었다. 얼릉 읽고 성석제 작가의 위트와 해학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겐 웃음이 필요하니까.

 

그동안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안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산문만 읽었던 것 같고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신간을 낸 적이 없었나? 찾아보니 개정판만 있고 가장 나중에 읽은 책이 소설집《지금 행복해》였던 것 같다). 암튼 읽은지 하두 오래되어(왜 안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도 읽으면서 편집자가 느낀 것처럼 웃어보면 좋겠다.

 

책을 펼쳐보니 재미있는 페이지가 나온다. 맨 마지막 부분, 작가의 말 뒷쪽에 '소제목의 출전'이라는 명목으로 죽 나열되어 있는 글들. 어랏, 노래 제목 같기도 하고 유심히 보니 가사 중에 한 부분을 소제목으로 사용했다. 오홋, 재미있는 발상. 언젠가부터 작가들이 책을 내며 글 쓸 때 듣던 음악이라든가, 같이 들으면 좋은 음악 같은 것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이런 리스트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움 리스트에 나온 노래들 다 찾아 들어야겠다. 매 장마다 읽을 때 그 노래를 켜놓고 읽어봐야지. 어떤 느낌일지^^ 

 

 

이재익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아침부터 읽고 있는데 처음 표지와 홍보 문구, 《41》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뜻을 몰랐는데 알고 나니 제목이 주는 끔찍함이 무거운 내용임을 암시하고도 남아 읽기를 주저했었다. 한데 읽어본 앞부분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부분이라 아직까지는 범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오리무중의 연쇄 살인사건을 파헤치다보니 과거 어느 도시에서 있었던 집단 성폭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하지만 용의자를 파악하고도 증거가 없어 잡질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범죄 소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영화에서도 숱하게 보아온 구성이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한때 한 도시를 뒤흔들었던 집단 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단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법’이라는 시스템이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법은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것을 다루는 자들에 의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과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법과 현실의 괴리라는 문제의 지점"이라는 것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질테지만 읽는 중

 

 

마지막으로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 드뎌 품으로 들어왔다. 표지 너무 예쁘다. 책은 가볍다. 앞부분을 펼쳐 읽었다. 왠지 우리나라에 처음 백화점이 생겼을 때가 궁금해진다. 에밀 졸라는 이 책으로 현대 백화점의 전략들과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상세히 묘사했단다.

 

백 년도 지난 이야기인데 요즘과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에도 정가제라든가 세일, 미끼 상품이나 직원 성과급, 광고, 경품 증정과 같은 요즘 백화점에서 실시하는 마케팅의 대부분을 실행하고 있었다니 놀랍다.

 

더구나 그동안 에밀 졸라의 작품 들이 삶의 비참함이나 빈곤, 우울함을 그려냈는데 반해 이 책은 유일하게 해피엔딩의 결말이라니 제목에 왜 행복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지 알겠다는.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도 책이 장난 아니다. 저것들을 한 주 동안 다 읽겠다는 것은 아닌데 정말 시간이 많아서 하루에도 책을 서너 권씩 뚝딱, 해치우면 좋겠다. 그러면 행복해질까? 친구는 머리가 아플 거라고 하더라마는. 맞아, 하루종일 책만 읽는다고 행복하기야 하겠어. 할 일이 없으면 그래도 읽을 책이 잔뜩 쌓여 있어서 행복한 거겠지.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잡히는 책들. 그러니 주말에 꽃구경 갈 일 없다면 다들 즐독!! 책을 좋아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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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젠장이라고 말을 꺼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마침 적립금이 꽤 쌓이고, 당선작 상품권까지 받은 상황이라 책 세권을 주문했는데...
이도우 작가의 것을 그만 까먹어 버렸습니다. 아아 ㅠㅠㅠㅠ
리더스님 조금만 더 일찍 이 페이퍼를 써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엉엉

readersu 2012-04-16 15:27   좋아요 0 | URL
아아, 우짜노!!
제가 좀 더 일찍 올릴 것을 그랬어요^^;;
이미 주문한 책이 있으니 일단 그것부터 읽고 이도우 작가 책은
난중에 꼭 읽어보세요^^
 

어렵단다. 다들. 그의 시도 사실은 어렵다. 그는 일부러 그렇게 쓴단다. 그럼에도 내 시가 좋으면 너네가 수준을 내게 맞추도록 해라. 강심장이다. 독자에게. 그러나 맞다. 이 정도의 배포와 개성은 있어야 한다. 읽고 싶은데 이해를 못하면 읽는 사람만 답답할테지. 어렵다는데 나는 다 이해했다. 나, 잘난 척! 어쨌든 이런 개성 좋다. 몸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시인의 감성으로 훨씬 아름다운 몸이 되었다.

 

오래전 ‘우울증은 비밀에 대한 고통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은 몸이 의도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그럴 경우 몸은 뭉클하다. 대개의 경우 환자가 지적하는 통증의 부위는 은유의 화려함에 결정된다는 디알로그는 심층적이다. 몸에 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몸을 관통하지 못하는 언어는 어디로든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몸에게 닿으려는 언어는 비밀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시가 단어 하나 속에서 숨이 차오르는 숨 쉬기이듯이, 시는 육체를 밀월하는 어떤 부위를 나 아닌 누군가의 몽정이라고 부르려는 호명에 가까운 것이다. 밀어 &란 보이지 않는 언어로 떠나보는 여행이다. 네 몸의 어떤 부분으로 떠나는 밀월이다. 시인은 몽롱한 번개 같은 언어를 데리고 ‘살 속의 연’처럼 흘러가보고 싶다. 혹은 속삭이는 번개처럼, 내 몸속으로 들어가 네 몸을 잊어보고 싶었다. 이 책은 어떤 이에게는 불필요해 보이는 느낌이 될 수도 있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뭉클한 몸처럼 그리운 허구 같은 것이 되었으면 한다. 그건 우리들의 언어에 또 다른 생채기를 남길 것이다. 찰과상처럼.

 

 

내가 뜬금없이 시인의 산문집에 대해 써보겠다는 것은 다 서효인 때문이다. 그의 야구 산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탓이다. 시보다 산문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아니 시도 좋지만 산문도 시적이어서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야구와 함께 시작하고 자란 시인의 야구 사랑은 사라진 야구에 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올 시즌이 되면 어떤 팀이든 정해 나도 야구 사랑 한번 해보겠다, 책을 덮으며 다짐했더랬다. 야구 시즌 돌아왔다. 뉴스에서만 잠깐씩 본다. 아직도 누굴 응원해야할지 정하지 못한 탓이다. 내 남은 인생도 서효인이 야구와 함께 살아온 것처럼 야구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혼자 생각했다. 주말에 야구 봐야겠다. 근데 누구 응원해?

 

내가 태어난 이듬해 프로야구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야구처럼 커왔다. 촌스러웠고, 즐거웠다. 혹독하고 뻔뻔했으며, 지금은 시끄럽다. 시끄러운 세상의 구석에 선 채로 야구를 본다. 야구를 보고 즐거워하고 화내면서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 당신이다. 힘든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 예쁘다. 멋지다. 
예쁘고 멋진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돼서 다행이다. 당신이어서 영광이다. 오늘 나는 밤을 샐 작정이다. 쉬지 않고 야구 이야기를 하면서 지구 밑으로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머리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릴 것이다. 오늘의 야구와 내일의 야구에 관하여 그리고 당신의 야구와 나의 야구에 관하여. 그러니 당신, 나와의 수다는 어떤가. 태양까지 홈런을 날리잔 말이다.

 

 

그의 첫 인상은 수다(!)스럽구나, 였다. 다른 시인들에 비해 쉴 새 없이 떠드는 모습을 본 탓이다. 한데 두 번째 만남에서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서야 왠지 시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생각. 시인은 수다떨면 안 돼? 뭐 안 될 것은 없지만. 왠지 시인은 조용하고 무게 있고 감성적이고... 그런 편견을 버렷! 내가 아는 한에서 시인의 산문집 중에 제일 늦게 나왔다. 독특하지 않으면 그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래도 책 팔아먹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산문은 개성이 팍팍 넘친다. 야구도 몸도 아닌 그림과 색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다. 오홋, 시인들은 왜 다들 이렇게 멋진거지? 블루를 좋아하니까 블루에 관한 예문.

 

블루는 흘러요. 블루는 멈춰 있어도 흐르는 것처럼 보여요. 정지된 상태에서도 파닥거릴 수 있지요. 날개를 지닌 블루는 언제나 꿈을 꿔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지요. 따라서 블루는 오션ocean이 되기도 하고 프린트print가 되기도 하고 때때로 문moon이 되기도 해요. 어떤 영화감독은 블루를 가지고 벨벳velvet을 만들었고 뮤지션들은 블루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blues을 연주했지요. 블루는 월요일monday과 결합해서 사람들에게 피로를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여전히 우량주blue chip로 각광받지요. 블루는 우울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아요. 약간 괴팍한 구석도 있지만 사람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바로 블루예요. 블루는 흐르고 흘러, 그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스스로 넘실거릴 수 있게끔 도와주지요. 그 순간을 블루는 ‘푸름blueness’이라고 부른답니다.

 

 

여기 또 개성 팍팍 넘치는 시인 한 명 등장. 시라면 시, 노래라면 노래, 그에 하나 더 보태어 산문이라면 산문, 사랑이라면 사랑(응?) ->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이번에 낸 산문이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 그리고 독특한 구성. 동료의 시를 본인의 산문으로 승화시켰다 . 멋지다. 한데 산문의 내용마저 죽인다. 푹 빠져 허우적대게 만든다. 아직도 안 읽었다고? 이런, 후회할걸?!

 

떠나간 것에 미련을 갖거나 스스로 선택했던 일에 대해 후회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한 시절의 상처 따위 태양의 농도가 변화하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바뀌는 대로 저절로 잊히는 걸 인지상정이라 생각하며 나름 거동 가볍게 살아온 편이니까. 어떤 무게에 매섭게 짓눌리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려 내다본 창가의 다른 풍경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을 줄 아는 탄력이 곧 시의 힘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3년 전 가을 이후로 내 안의 그 작은 창이 두텁고 어두운 베일 뒤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바깥이 보이지 않았고, 내부로 굽어든 시선이 불 밝혀줄 그 어떤 아름다운 그림도 내 속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퍽퍽한 어둠과 불안한 서성거림 끝에 나의 손을 놓아버린 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연모와 사죄의 심정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간 누군가를 오랫동안 그리워하는 일, 그리고 그것으로 생의 다른 윤리를 모색하고 과거를 재편성하는 일이란 참 힘들고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게 아니고서는 내가 다시 나 자신을 향해 솔직하게(난 요즘 그 어떤 웃음도 진심이라 믿을 수 없다) 웃을 수 있는 방도가, 지금으로선 없다. 이건 고통과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와 책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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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2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에세이 신간평가단을 하며 읽고 싶다고, 아마 저 혼자만 바랬던 책들입니다! 특히 김겨...경 하여튼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밀어>는 유독 읽고 싶었던 책이에요. 그 재밌고 쉽다는 성석제의 에세이도 어려워하면서 어렵다고 입소문이 자자한 그의 책은 어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요. 후후

readersu 2012-04-13 18:29   좋아요 0 | URL
에세이를 좋아하시는구나요.
읽어보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요.
<밀어>는 다들 너무 어렵다고들 해서, 리뷰 쓰기도 힘들다고 토로를^^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