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 원제 Hier (1995)
아고타 크리스토프(지은이), 용경식(옮긴이) | 문학동네
아고타 크리스토퍼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은 후 그녀의 특이한 문체와 상상력, 주체할 수 없는 거짓말에 빠져 버렸다. 그 책을 덮은 후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는지...읽을 책이 태산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가서 그녀의 책을 읽었다. 한 시간 꼬박 이 짦은 소설을 읽으면서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인간들의 삶을 또 한번 들여다 보았다.
여기 열두 살의 '토비아스 호르바츠'가 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소년. 창녀와 다름 없는 생활로 벌이를 하던 엄마는 토비아스에게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토비아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했고 학교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단 한 명뿐인 여자 카롤린을 만난다. 하지만 카롤린의 아버지는 엄마와 잠을 자는 사이였고 어느날 토비아스는 그 둘의 다툼에서 카롤린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된다. 동네의 농부들과 잠자리를 가지는 엄마도 미웠고 엄마와 자신을 떼 놓으려는 아버지도 미웠던 토비아스는 둘이 같이 자고 있을 때 칼로 아버지를 찔러 버린다. 밑에 깔린 엄마와 같이. 그리고 그는 전쟁고아가 되어 다른 나라로 넘어 간다.
'상도르 레스테르'라는 전쟁고아 출신의 공장노동자인 남자가 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꿈에 그리는 여자 '린'을 만나는 것이다. 그 꿈은 불가능하고 너무나 간절했기에 이루어졌을까? 고독하고 외로운 삶과 지난 날의 과거로 인해 고통스런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날 거짓말처럼 그의 '꿈'인 '린'이 나타난다. 하지만 상도르의 '꿈'은 그날부터 비극으로 변하고 만다.
자, 이제 여기 토비아스의 '카롤린'이며 상도르의 '린'이기도 한 여자가 있다. 남편의 공부를 위해 이웃나라에 왔다가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나간 공장에서 '상도르'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상도르'의 친절을 반갑게 받다가 그가 '상도르'이며 '토비아스' 인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인 것을 알지는 못한 채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교양있는 좋은 가문 출신의 '카롤린'이자 '린'이기도 한 그녀는 어릴 때 좋은 감정을 가졌던 '토비아스'이자 '상도르'를 다시 만나 그가 이복 형제인 줄도 모르고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둘의 '꿈'은 애초부터 달랐다. 그들의 출생 성분이 처음부터 달랐던 것처럼 사랑하니 결혼해서 같이 살기를 원하는 '토비아스'하고 '토비아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린'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린'을 차지하기 위해 '린'의 남편을 죽이려는 시도까지 벌이지만 옛날에 죽였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살해 역시 실패한 것처럼 이번에도 실패한다. 그 실패는 '린'이 결국 "나는 너의 '린'이 아니고 카롤린 일 뿐' 이라는 말을 남기고 남편과 '토비아스'를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으며 남겨진 '토비아스'는 ' 린'이라는 '꿈'을 버리고 '현실'을 선택한다.
다른 나라로 망명온 많은 고국의 사람들이 여러가지의 이유를 대며 '자살'을 택했을 때, '토비아스'는 '린'을 꿈꾸며 고독한 삶을 나름대로 이겨왔었다. 그러나 그의 '꿈'이었던 '린'이 그를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자 '토비이스'는 '현실'이라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퍼의 <어제>는 그녀의 전작처럼 인생의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보이는 듯하다가 결국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만큼 그 자신이 전쟁을 겪고, 반체제 운동을 하다가 갓난아이를 안고 남편과 고국을 탈출하여 망명자의 생활을 시작한 인생처럼 그녀가 내 놓는 소설 속에 그녀의 삶이 보이기도 한다. 그 삶을 냉혹한 시선으로 때론 적나라하고 가차없는 문장으로 표현해 낸다. 그래서 읽고나면 한숨도 나고 인생이란 것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녀의 글을 사랑하게 되고 만다.
이제 그녀의 최근작인 <아무튼>을 읽을 예정이다. 전작인 <어제>에 이어 십 년 만에 나온 작품이라 기대가 된다. 또 어떤 아픔이 기다리고 있을 지 궁금하지만 냉혹하든 고통이 느껴지든 난 틀림없이 그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