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뒤뜰 물앵두 다 익어서 우박처럼 쏟아지는디……."

"죄송해요. 요번 주말도 이래저래 갈 데가 많네요."

"그려. 허긴 여기 내려오는 기름값이면 물앵두 한 가마니는 사먹을 텐디 뭐."

잠시 가슴 한쪽에서 콩깍지 터지는 소리가 나고, 썰물이 싸하니 빠져나간다.

"늬덜 안 내려와도, 늬덜 대신 왼갖 새들이 우리 집 물앵두 먹으러 온다야."

"새라뇨?"

"내가 작년에도 말혔잖여. 우리 동네 새들이 그렇게나 종류가 많은 줄 몰렀다. 종일 동네 할망구들하고 새 똥구멍 쳐다보며, 새소리 듣는 재미가 삼삼혀. 처음에는 거무죽죽한 새들만 오더니, 요즘엔 총천연색 새들이 날아와서 난리다. 아마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새가 되어서 오시는게벼."

"이쁘겠어요?"

"새 키우기 이렇게 쉬운 줄 몰렀다. 새만 오면 좋은데, 쥐새끼도 와야."

"동물원이구만요?"

"내려올 때 닭 사료 한 포대만 떼 와라."

"닭도 쳐요?"

"아녀. 앵두 다 지면 사료 줘야지."

"어머니도 참."

"기똥차게 잘생긴 새 한 마리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디. 꼭 돌아가신 니 아버지 같어."

"아이고, 이제 전화 끊을 때가 됐고만요. 곧 내려갈게요."

전화는 어느새 끊겨버렸다. 아버지라는 말에 아마도 목이 메어 수화기를 놓쳤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끊임없는 병치레,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차렸던 술상. 그리고 농사일은 뒷전이었던 나날들. 어머니는 그걸 다 받아 이셨다. 가슴에 고스란히 품고 다독이셨다.

난 그게 불만이었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버지는 나에게 지게질을 가르치셨다. 숫돌에 낫을 벼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어찌 어린 고사리 손에 낫을 쥐어주고 술만 드실 수 있을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가슴은 숯가마였을 것이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동생 셋을 잃고, 두 어머니를 섬겨야 했을 종손의 어깨. 아버지는 지게를 지지 않아도 멍 가실 날이 없었으리라.

그렇다. 술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당신의 간간한 치마폭에 아버지의 아픔을 다 담고 다독인 것이다.

언젠가, 통화 중에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왜 텃밭 구석구석에다 과실수을 심어놨겄냐?"

"왜요?"

"빚이 많아서 그런 거여."

"빚이라뇨?"

"마음의 빚 말이여."

"예?"

"니가 내 말뜻을 알겄냐? 농촌에서 일 안하고 사는데 하루하루 빚 안질 수 있겄냐?"

"……."

"햇빛한테 빚지고, 냇물한테 빚지고, 풀한테 빚지고, 동네 사람 바쁜 손에게 빚지고……. 심지어 동네 꼬맹이들한테도 빚지고."

"네."

"당신이 떠나도 계속 열매 맺을 거 아니냐. 그걸 누가 먹겄냐? 어미 혼자 먹으면 얼마나 먹겄냐? 다 나눠 먹으란 거지. 내려올래? 늬덜 자주 고향에 다녀가란 뜻도 있는 겨."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간간하다. 도량을 파며 뻘을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어머니의 치마는 주름져 있다.

저 치마가 간혹, 해일처럼 뒤집혀 어머니의 얼굴을 덮치고 어머니의 눈물을 받아먹을 때가 있다.

앵두나무가, 바닥에 떨어진 무른 앵두를 굽어보듯 마음 붉어진다.

 

☆★☆★☆★☆★☆★

 

어쩜 이 어머님은 이토록 사랑스러운지 몰라. 저렇게 슬쩍 돌려 고향다녀가란 말을 하시다뉘.

책 읽으며 내내 떠오르는 고향의 엄마, 아부지. '가슴 한쪽 콩깍지 터지'고 '썰물이 싸하니 빠져나'가기 전에 고향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만. 행동으로 옮겨!!!

 

이정록 시인의 산문집은 구수하다. 짠하다. 웃음이 비실비실 나온다.

웃다가 울다가 똥구멍에 솔날 것 같다.

시로도 만들어진 어머니와 블루스 치는 장면의 대사는 압권!

소시장에 끌려나갔다가 혼자 돌아온 소 이야기도 뭉클.

구수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시적 감수성은 최고!

 

그래서 시 한 편!

 

 

엄니의 남자

               _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등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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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5-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투리가 귀에 익다 싶었는데, 역시요. 너무~ 반갑네요~ 님의 서재에서도 이정록 시인의 산문집과 시집을 만나니 ㅎㅎ .. 댓글은 처음이지만서두~ 님 반가워요!

readersu 2012-05-05 15:18   좋아요 0 | URL
저두 반갑습니다^^
이정록 시인이 여고때 선생님이셨나봐요.
님의 서재에 들어가보니 그런 듯^^
18일에 작가와 만남 있던데... 가보셔요.
저도 시간 나면 가볼까, 합니다.
한번 뵌 적이 있는데 꽤 유쾌하신 선생님 같았어요^^

icaru 2012-05-0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진짜요? 너무 소중한 정보네요~ 갈 수 있으면 꼭 가 뵙고 싶어요!!

readersu 2012-05-05 16:28   좋아요 0 | URL
앗, 모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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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친구가 해서 안 하고 있는 중(떨어질지도 모르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