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고정희>


어디에선가 보았다.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거리를 두는 데 동의하는 것이라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간격을 무엇보다도 존중하는 것이 순수한 관계라고. 고정희의 관계는 가슴 어디쯤을 후벼파는 것 같은 느낌이고.. 살아가다보면.. 속수무책인 건 따로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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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2-2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략적으로 결혼한 이민족 남편이 모국으로 떠나면서 좁쌀자루 하나 맡기고는 하루에 한 톨씩 이 좁쌀을 던져서 자루가 비게 되면 그 때 돌아오리다 했던 약속때문에, 남편 떠난 언덕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좁쌀을 던지고 있는 여자. 몽고에는 그런 전설이 있다던데.

rainy 2005-12-2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수단님..
여자는 왜 늘 기다리다 돌덩이가 되고, 남자는 왜 뒷모습을 보일까요.. 안 그러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인 여자와 그 반대인 남자도 물론 실존하지만.. 태생적이라는 건 남는 것 같아요.. 그게 좁쌀 한톨의 차이여도.. 치명적일수 있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나지만.. 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주체할 수 없이 울었던 건.. 아마도 그런 저런 전설들의 짬뽕된 기억의 잔재 때문인 것 같아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멋지고 근사하게 치장하고, 우월하다 어쩐다 생각들이 많아도.. 그건 오직 형벌일 뿐이라는 생각이 .. 잘 떠나지 않아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니고와는 별개의 .. 모성애 자체가 벌이란 생각.. 그 모성애를 날 때 타고난 딸이라는 존재가.. 난 참을 수 없이 슬펐던 것 같아요.. 참으로.. 못말리죠.. 나도..

rainy 2005-12-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는 나이 먹을 수록 적극적이 된다는 이론은 없나요? ㅋㅋ
딸 없는 친구들에게 말하곤 해요.. 쯔쯔 가여운 것들
허전한 인생에 딸도 하나 없이 무슨 낙으로 살아갈꼬.. 하구요..
나와 지연인 얼굴도 닮았다고 하고, 행동양식이나 타고난 습성도 너무 비슷해서
신비로우면서 두렵고, 걱정되면서 행복하고.. 그래요...
검은비님 어때요? 늦기전에 성이동생? ㅋㅋ
둘째 생각 없다고 하신 것 같으니.. 며느리라도 ^^;;;

rainy 2005-12-2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듣기 싫은 질문 중에 하나가 '둘째는?' 그거여놓고 내가 ㅋㅋ
성이랑 하루 종일 함께 지내는 군요.. 훌륭해요^^
난 내 한계를 잘 알아서 네살때부터 어린이집엘 보냈어요.
내 숨통을 틔우는 게 우선 너무 급했어서..
둘이 잘 지낼만 하면 그게 제일 낫고, 어디 잠깐씩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더라구요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겐 아주 오래전에 받아둔 처방전이 하나 있었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마치

상처 난 가슴에 붙여진 한 장의 대일밴드 같을 거라는.

나는 그 처방전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오랫동안 내 책꽂이를 차지하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생각했다.

언젠가 몹시 타격을 입었을 때 읽어주리라. 고

며칠 지독하다고 말하기에도 모자란 감기 몸살이 왔고

삼일은 밤낮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명색이 야행성이라고 그 삼일 밤낮을 지내고 나자 

밤이 되어 아이가 잠들고 나면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이

마치 세상 사람이 다 잠들고 빛이 사라지면 관 뚜껑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는 흡혈귀처럼

침대에서 슬슬 기어나오고 싶어지는 때가 왔다.

그래도 약 기운에, 며칠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

나는 이때다 싶었다.

침대에 누운 채  나는 이 책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어 내려갔다.


초반에는 흠, 이 사람 꽤나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겠다 싶어지게

또 자기의 말처럼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열심히 기록했었을 것임이 분명한 온갖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소년들의 몰두와 비탄은 퍽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주인공이 공부에 몸바치기 전까지.  

후반에는 이 책은 어쩌면, [느리게 살거라] 류의 처세에 관련된 책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이 결론 낸 인생관,

오로지 그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주장을 하느라 너무 중언부언 한다는 느낌이랄까..  


아픈 뒤끝이어서 그랬을까. 내 심사는 바로 뒤틀려 버렸다.

(아니다. 아프고나면 사람은, 적어도 나는 좀 선량해진다.)

아이 키우면서 앓는 것조차 아이가 잠이 들고 나서야 편히 앓을 수 있고

까딱 늘어졌다가는 아이 밥 때도 못 맞추기 십상이고 

야행성 잠버릇 하나 고치지 못해 조각잠을 자야하는 이 판국에

나도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살고 싶다만..

내 앞으로는 치기 힘든 공이라고 당신이 피한 하필 그 공만 날아온다 느껴지는.

그런 날들이 꽤 오래인걸.. 어째..


내 입맛과는 차이가 좀 있었고, 나에겐 그리 재미도 주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 책.. 나에게 좋은 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면 .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자기만의 야구]가 있었듯이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지 않겠냐는..

그러니 그저 살아가자는 다독임을 스스로에게 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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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0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y 2005-12-2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결심한 삶에 색종이를 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이 책이 줄 수 있다는 것도 알 것 같아요. 시선이란 게 한끗차이 일수도 있는 것 같구요. 저도 말랑말랑할 때 이책의 느낌을 적었더라면 그래, 그렇게 살면 참 좋잖아... 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박민규가 좀 얄미웠더랬어요 ^^ 그럴 때 있죠. 세상의 법을 따라가기 힘이 든다는 주제로, 유난히 나를 버벅거리게 하는 세상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밤새 나누고 맞아 맞아 했던 친구가 다음에 보니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라는 것 다 요령있게 세련되게 해내는 모습을 볼 때.. 한편으론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두려워지는 느낌이랄까.. (이 비유가 맞을까.. 밤새서 몽롱한데 ㅋㅋ)

2005-12-20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5-12-2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박민규는 얄미워
우린 쿨하지 않은데다 도도한 척만 하는 치들이라 그런가. ㅋㅋ

waits 2005-12-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결국엔 내 방식대로 사는 수밖에는. 그런데,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낄낄거리며 신나서 읽고서는, 살짝 부럽고 얄미운 느낌도 들었던 것 같네요..^^

rainy 2005-12-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우리가 도도한 척일랑은 제대로 하는건지 원.. ㅋㅋ

속삭인 님, 나어릴때 님.
살짝 부럽기도 하지만.. 막상.. 그럼 그렇게 한번 해볼래 한다면.. 도리도리 할 것 같지요^^ 좀 낡았어도 내 몸에 맞는 옷이 최고란 그런 느낌이랄까..
냅둬라 생긴대로 살란다.. 그럴밖에요^^
어쩌면 결론은 같을지 몰라도, 그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은 내식으로 하고프다는..
 

 

지난 11월에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듣기 편하게 따 두었던 노래들을 클릭 해 듣고 있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지 않을 거라고

또 이소라의 슬픔은 이제 익숙해서 견딜 만 할 거라고 방심하고 있었나보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아이들의 전래동화를 읽고 있었다.

그것도 웃음 파트의 호랑이가 떼구르르 구르는 부분이었는데...

이 난감하고 조화롭지 못한 상황이라니..

난 늘 이런 식이다..

요 며칠 나는 행복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그 행복은 아직도 유효하다.

겨울이라 행복하고, 구체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든 일 때문에도 행복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또 행복했다..

그런데 나는 왜 내 인생이 진행형이라는 게 내내 두려운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사춘기도 아닌데 왜 만날 질풍노도일까..

왜 여지껏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론내지 못하고 궁금해 하는 걸까..

이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급한 게 아니라

내 아이가 어떻게 자라날 것인가에 관해..

또 그 아일 위해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가 더 급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검은비 님 페이퍼에서 어느 별에서 왔나를 따져보니 난 해왕성에서 왔단다.

 

 
타고난 영적 능력을 가진 당신은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당신은 음악, 시, 춤을 좋아하고 그 무엇보다 넓은 바다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정신은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당신의 가슴에서는 열정이 샘솟습니다.

당신은 친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을 때도 외로움을 느낄지 모릅니다.

한 가지 생각에 너무 깊이 잠기지만 않으면, 당신의 영성이 예리한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내가 신비스러운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바다를 사랑하고

한가지 생각에 너무 깊이 잠기지만 않으면 더 낫겠다는 말이나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도 가끔은 외롭다는 건 맞는 것 같다..

춤을 좋아한다는 말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무지 비웃을 것이고.. 큭..

내가 답한 걸 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신비스러움이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꿈이 산산 조각 나는 것이고

백화점에 가서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은 멋진 잡화점이고

내가 생각하는 즐거운 데이트는 함께 차를 마시며 서로의 생각과 꿈을 나누는 것이고

마음에 드는 타입은 사려 깊은 타입이고

내 별자리는 염소자리다.

나는 해왕성에서 왔단다..그 곳은 먼 곳일까?

농담처럼 중얼거린다.. 내 별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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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생각하는 즐거운 데이트는 함께 차(술)을 마시며... 이 부분만 다르고
다 비슷하네요.^^

플레져 2005-12-1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여기도 로드무비님 댓글 밑에 ^^;;)
님의 닉네임에서 바다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나요...

rainy 2005-12-1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산책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꿈을 나눈다는 것에 그만 ^^
저도 언젠간 맛술로 시작해서 알딸딸 해져보고 싶다.. 생각해요^^

플레져님.
바다.. 비.. 강.. 물이 좋아요^^
근데 어떤 사람이 그러대요.. 물이 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느냐고...
 

 


          온 아침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신경림>

 

바람은 오늘따라 차가웠으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안심한다.

겨울이 주는 신비한 선물..

추위로 웅크린 어깨, 추위로 뻐근한 가슴들은

대단한 걸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서로를 도닥이며 걱정스런 눈으로 건네는 인사..

그걸로 충분하다.. 겨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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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희미해진 기억 속

잊고 지낸 약속 하나가 어느날 문득 도착하듯

화려하고 가볍게 날리던 눈

첫눈..

탄성과 반가움과 설레임

그리고 약간의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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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5-12-05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성한 잎새를 달고 있는 나무도 풍성하지만
가볍게 가볍게 , 고요히 혼자가 되어가는..
그리고 마침내 온전히 의젓하게 비워낸.. 착한 겨울나무..
지금 발이 시려운데.. 양말을 하나 껴신으면서..
정말 신기하게도 아주 충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어요..
온전히 겨울에만.. 느낄수 있는 충만함...
검은비님도.. 겨울.. ^^

rainy 2005-12-05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웃는다는 님의 말에.. 내 마음도 웃어요^^

sudan 2005-12-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리는 눈이 꼭 별 같아요.

rainy 2005-12-05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어디에 도착한 눈보다는
허공에서 날리고 있는 눈이 그렇게 이쁘더라구요..
건물 피해서 하늘에다 카메라 들이대고 찍어 보았어요^^
수단님도 첫눈맞이 잘 하셨죠?

치니 2005-12-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땐 디카 소지자가 부럽다. 폰카로는 안 찍히는 저런거. 웅. 멋지네.

rainy 2005-12-0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연장탓을 하시다니요. ㅋㅋ
기냥 하늘에 들이대고 찍어 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