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지성 시인선 191
이정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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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와 작품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흔히 작가와 작품이 같다고 혼동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오해에 불과하다. 작품은 비록 작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작가를 떠나서 존재한다. 우리가 단면적으로 보아왔던 작가의 모습이 아닌, 보다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모습의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정록도 마찬가지. 보기에는 그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생긴 사람이, 시는 그렇게 꼼꼼할 수가 없다. 하긴, 언젠가 그가 술자리에서 새로 맞춘 안경을 자랑하면서, '이봐, 이거 상표가 '파파라치'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을 파파라치하는 눈을 가지고 시를 쓸 거라고 했던가.

그는 그런 시각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 포함된 「세수」라는 작품을 보면,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내가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했던 것이다.)

빨랫줄처럼 안마당을 가로질러 / 꽃밭 옆에서 세수를 합니다, 할머니는 / 먼저 마른 개밥 그릇에 / 물 한 모금 덜어주고 / 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습니다 / 수건 대신 치마 걷어올려 / 마지막으로 눈물 찍어냅니다 / 이름도 뻔한 꽃들 / 그 세숫물 먹고 이름을 색칠하고 / 자두나무는 떫은 맛을 채워갑니다 // 얼마큼 맑게 살아야 / 내 땟국물로 / 하늘 가까이 푸른 열매를 매달고 / 땅 위, 꽃그늘을 적실 수 있을까요 (p.15.)

여기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작가의 시각이다. 작가의 눈은 안마당 => 꽃밭 => 세수하는 할머니의 얼굴 => 꽃밭 => 자두나무의 순서로 이동하고 있다. 카메라가 사물을 따라가듯이 천천히 움직이며 한 시골집의 뜰을 찬찬히 훑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그저 단순한 파파라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찍어내는 것이 세숙물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설정, 그리고 그 세숫물을 먹고 꽃들과 나무들이 자라난다는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던 작가의 눈이 내면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 탁월하다.

단순한 파파라치는 현실을 고발할 뿐이지만, 시의 눈을 가진 파파라치는 현실을 관찰하면서도 스스로를 반성한다. 반성이 없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무릇 시란 자신의 영혼에 상처내기, 혹은 자신에 대한 끝없고도 혹독한 반성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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