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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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유가 필요하다. 경제적인 여유나 육체적인 여유가 아니라, 한 행 한 행 꼼꼼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정서적인 여유와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곰씹어볼 수 있는 이성적인 여유. 이러한 점을 고려하자면 이 시집에 대한 나의 독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동안 가까이 하지 못한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의 허기를 채우기에 너무 급급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겁지겁 책장을 넘겨버리는 중에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시인 이윤학이 사용하는 언어의 그물이 평이하면서도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집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범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거나, 독특한 소재를 다루었더라도 그것이 돌출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온화하고 화해를 지향하는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시집의 많은 이미지들은 파괴와 죽음(혹은 무덤)과 연결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 - '내가 당신 무덤을 파먹었지/내가 그곳을 열어보았지 / 너무 깊은 데 당신이 묻혀 / 그 추억을 파먹는 데 꼬박 / 천년이 흘렀다.'(<경주 - 느티나무, 무덤 위에서 죽다>)와 같은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괴와 죽음의 이미지가 나오더라도, 그 이미지들을 서술하는 목소리가 담담하고 달떠있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 중화되어 전달된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자칫 회피적인 중도, 혹은 무책임한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다잡아주는 것이, 조밀한 언어의 그물이다. 얼핏 보기에는 평이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제의 미덕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작품의 무게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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