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dream 3집 - Melody Tree
The Daydream 연주 / Kakao Entertainment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그것이 꿈이었는지, 전혀 꿈이 아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는 것이고, ‘만졌다’는 것이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안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어떤 오묘한 느낌에 이끌려 살포시 귀를 대고 ‘들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아니, 분명 나는 귀를 대고 한참을 그렇게 들었으리라. 어쩌면 며칠 혹은 몇 달을 그런 채로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A Princess Of Goguryeo】
구슬픈 가락을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꼭 그런 느낌의 멜로디였던 것 같다. 마치 어여쁜 한 소녀가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옹달샘에 쪼그려 앉아 한 방울 한 방울 사무치는 그리움을 떨어뜨리며 내는 소리인 듯했다. 그 멜로디는 떠난 임에 대한 처연한 그리움으로 돋아나, 언젠가는 꼭 돌아 올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으로, 돋아난 그리움을 달랜다.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깊은 밤 풀어내 보며 시린 밤을 이기려 해보지만, 풀어낸 그 행복의 순간들은 이내 시린 밤을 비추는 달빛 속으로, 반짝이는 별빛 속으로, 적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다시 시리고 적막한 밤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만 남는다. 소녀는 매일 옹달샘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리움을 달랜다. 이것이 내가 처음 들은 멜로디이다.

【My Home】
‘봄이다!’ 내가 들은 두 번째 멜로디의 첫 느낌은 봄이었다. 영화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집을 떠나 도쿄에서 맞이하는 첫 날이 떠오른다. 벚꽃비가 내리는 그 멋진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싶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조금은 설레기도 한 기분 말이다. 일말의 두려움에는 늘 가족들의 격려가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가족의 품을 떠나오면서부터 여태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았던 내 집은 비로소 ‘고향’이 되는 게 아닐까. 늘 따뜻한 봄 햇살 속에 있을 것 같은 가족들과 고향집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봄이 아닐까 싶다.

【Serenade In Autumn】
생동하는 봄으로부터 나는 달음질쳤다. 언제 여름옷을 벗어던졌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가을을 노래하는 풍경 속에 서 있다. 여름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렇게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젠가 여름처럼 내 곁을 지나쳐 갈 이 가을, 마치 영원을 약속하는 속삭임처럼 달콤한 맛이다. 지는 석양과 함께 장관이 펼쳐지고, 어느덧 가을의 첫 어둠이 내려앉는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금 여름이거나 겨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아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가을의 첫 날이랄까. 수면제 100알 아니 100통으로도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섣부른 그리움과 갓 피어난 백일홍의 설레는 첫 세상구경 사이를 오가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을 거니는 듯한, 꼭 그런 기분이다.

【Again】
‘힘을 내, 힘을 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있지는 마.’ 꼭 이렇게 들린다. ‘여태껏 잘해왔잖아. 단지 조금 힘에 부치는 것뿐이야.’ 이런 위로와 격려처럼 들린다. ‘결과는 분명 중요해. 하지만 어떤 결과물도 인내하고 노력하는 그 값진 과정 없이는 불가능해.’ 내가 시련과 절망 속에서 어떤 삶의 지혜를, 이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와 힘을 찾아야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삶 속에서 고뇌하는 그 순간마저도 얼마나 축복이고 값진 시간인지를 잊지 마.’ 절망 속에서 세상 모든 아름다운 빛이 잿빛처럼 보이고, 나 홀로 힘든 시간 속에 갇혀버렸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놓치고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가르침 같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듯한, 그런 따뜻한 위로를 받은 듯하다.

【Pour Chopin】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바닥을 치고 너부러져 있던 나를, 내 마음을 다부지게 가다듬고서 한발자국씩, 서두르지 않고서 다시 내가 걸어야할 길 위에 서있음이 느껴진다. 하늘에는 아직도 뜨거운 태양열이 나를 괴롭히고 있고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길은 한도 끝도 없이 가늠할 수 없지만, 이미, 나약한 내 모든 것들은 흥건하게 흘려버린 지난 눈물에 젖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음을 알 뿐이다. 괴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라도 이젠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 고통들을 곱씹으며 단맛을 느낄 수 있음을 막연하게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그렇게, 시작할 수 있음을, 조금은 선명하게 느낄 뿐이다.

【Kissing Bird】
언제 내가 고통 속에서 정신줄을 놓은 채,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가. 일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태어난, 아니 꼭 내가 다시금 새롭게 태어난 듯한, 그런 기분이다. 너무 움츠려있던 탓에 내 앞에 놓인 길 위를 좀처럼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조금은 여유롭기도 하고, 조금은 사뿐사뿐 날림걸음이 되기도 한다. 늘 마음만이 저 길 끝 미지의 세계에 닿아 있었고 내 몸은 늘 그에 못 미쳤지만, 이젠 몸과 마음이 보조를 맞춰 나아감을 느낀다.

【Running On The Clouds】
내 걸음이 너무 사뿐했나보다. 어느덧 나는 허공을 걷고 있다. 그렇게 허공을 박차고 애드벌룬처럼 평화롭게 떠다니는 기분이다. 높이, 높이, 더 높이. 여태껏 날 감싸고 있던 울타리가 한 눈에 보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울타리는 불과 하나의 작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진다. 아! 내가 열심히 달음질치고 내가 보던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아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내 울타리 너머에는 이처럼 더 큰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랄까. 내 생각과 내 꿈도 한 아름 더 굵어지고 커진 듯하다.

【A Melody Tree】
겉모습만 웃자란 내가 아님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확신에 찬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조금은 더 과감해진, 하지만 그만큼 더 신중한 용기가 돋아난다. 조금은 더 깊어진, 그만큼 더 사려 깊은 생각들이 튼실한 모습으로 뿌리내린다. 조금은 더 넓어진, 그만큼 더 소중한 것들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슴이 펼쳐진다. 마치 내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된 듯하다. 넓게, 자유로이 드리운 가지 사이로 햇살을 품을 줄 알고, 싱그러운 잎사귀를 펼친 채 누군가에게 푸르름을 선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나무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누군가를 위해 허물어질 것만 같은 흙덩이를 단단히 움켜진 채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되어 보람된 하루하루를 사는 것 마냥. 소소한 행복을 노래할 줄 아는 그런 소박하지만 튼실한 나무마냥.

【No Geunri】
며칠 혹은 몇 달,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모를 내 여행은 끝을 맞이한다.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내 가슴 속에 뭔가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늘 치고나가는 생각과 몸과는 달리 늘 김칫국만 먼저 마시던 마음은 어느새 평온하고 차분한 보금자리에 든 듯하다. 늘 내 길 끝에 있을 ‘무언가’에만 집착한 채, 내 ‘지금’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던 시간들. 늘 무채색의, 어떤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 생각만을 주렁주렁 달며 살아가던 나. 여행의 끝인 지금 이 순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충만하다. 바람이 나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지고 누군가의 허물없는 미소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지를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마음의 촉수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형체도 없는 모든 감정들까지도 더듬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꿈같은 실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보고, 만지고, 안고, 들었던’ 이름 모를 그 ‘나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동행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저 멀리 도망간 채로, 혹은 나 자신조차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무언가를 더듬어 만지고 만났던들 그게 무슨 의미가 되고 소용이 되는 것일까 싶은 지금이다.

나를 이 오묘한 여행으로 이끈 이름 모를 그 ‘나무’,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사회라는 규정된 틀에 얽매임 없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게끔 만드는, 일종의 환영(幻影)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이라는 고귀한 소우주가 비로소 자연의 이치에 맞게끔 제 궤도를 찾아가려는 관성적인 숨은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나는 언제고 그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그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 나머지 멜로디 』

【A Princess Of Goguryeo [해금 Version]】
【My Home [Piano Solo]】
【A Melody Tree [Piano Solo]】
【Again [Piano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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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울 레인님~~뭔 음악감상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한답니까?

에샬롯 2010-04-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드림 ㅋ 우리 데이드리머는 요즘 뭐할까..ㅋㅋ 문제해봐야지...ㅋㅋ ;; 감상문과 전혀 상관없는 감상..-_-;;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꾸벅씨(?)가 된 채로 지내고 있다. 네모난 상자 안에 꼬박 하루를 밀어 넣은 채 졸음과 싸우는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공부가 될 리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죄다 네모난 것들뿐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앞 다투어 네모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 도서관. 그곳에서 네모난 책 속에 잠자고 있는 ‘숲’을 만났다. 비밀로 가득한 숲을.

스타카토. 《숲의 가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타카토’와 같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길게 연주되는 스토리가 아닌, 딱딱 끊기는 전개방식이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 손에는 퍼즐조각이 하나씩 생긴다. 서로 닮은 구석도 별로 없는 그런 퍼즐조각을 얻으면서 결정적인 퍼즐조각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스타카토.

어느 마을, 동물들이 없다. 사라진 건지 죄다 죽은 건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마치 저주받은 마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학교에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을 뿐이고, 마을의 어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쉬쉬하는 듯한 모습이다. 간혹 학교 선생님처럼 참다못해(?)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몹쓸 행동을 한 것 마냥 금방 함구해버린다.

『이것은 마을에서 오랜만에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그날 밤 산귀신 네히가 모든 생물을 데려간 뒤로 마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물, 말이나 비둘기, 쥐, 양, 수소 등의 생물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부모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주체 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동물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고서 아이들에게 동물 소리를 흉내 내어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닭이나 하마의 울음, 소가 음매 하고 우는 소리, 숲 속의 늑대가 짖는 소리, 비둘기가 구구하는 소리,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 거위가 꽉꽉거리는 소리, 개구리가 개굴개굴 하는 소리, 올빼미와 수리부엉이가 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자신의 슬픔을 부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단지 재미있는 소리를 내본 것뿐이라고 했다. 그게 전부라고. 또 동물들의 소리는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본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략·····)
“그건 그냥 전래동화란다.”
“그 이야기는 농담이야.”
전래동화나 농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p50~p51)』


어둠이 깔리면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둠 속에 잠식당한 것처럼. 집집마다 커튼을 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어떤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산귀신 네히에 대한 공포를 아이들에게 심어준다. 어둠이 깔리면 절대 밖을 나가서는 안 되며, 숲 근처로는 절대 가서도, 궁금해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라고 말할 뿐, 마을 사람들은 그 ‘시답잖은 이야기’에 대해 언제나 쉬쉬할 뿐이다.

마티와 마야. 이 용감한 두 녀석들이 사고(?)를 치고 만다. 금기를 깨고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진실’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함께 어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모험을 말이다.

『“어떻게 너는 숲을 무서워하지 않니? 네히가 무섭지 않니?”
니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무서워. 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특히 밤이 무서워. 네히는 무섭지 않아. 사실은 동굴에 있을 때보다 나를 미워하는 아이들 속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돌과 기왓장을 던질 때가 더 무서워. 어른들이 내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좀 봐, 저기 소리지르는 병에 걸린 불쌍한 아이가 오네, 정말 안됐어, 하고 말하면서 항상 어린 아이들에게 내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난 그게 두렵고 무서워.”(p70~p71)』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몹쓸 병에 걸린 아이 취급을 받는 니미를 만나면서 마야와 마티는 자신들을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의 습성을 알게 된다. 미움과 시기,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와 경멸, 조롱하는 마을이라는 울타리의 습성을 말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유리시키고 진실을 은폐하며, 금기라는 것으로 경계를 만든다. 그렇게 세뇌를 시킨 채, 아이들을 유린하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두려움이란 진실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혀 진실체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와는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나보다 우월할 것만 같은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그들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을 자기가 속한 집단 속에 퍼뜨린다. 그렇게 사람들은 상대를 격리시킨다는 착각 속에 빠져, 각자 제 스스로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를 고립시키고 외부와 단절시켜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숲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어렴풋이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네히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밤이야. 저기서는 벌써 걱정들을 하고 있을 거야. 이제 둘 다 집으로 돌아가.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땐 산에 있는 숨겨진 우리 집으로 와. 해기 지기 전까지 몇시간 동안은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 너희만 괜찮다면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좋고 더 있어도 돼. 다시 만날 때까지 너희도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고 놀리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귀찮게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에게 말해. 화나게 하거나 약을 올리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말하는 거야.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거야.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싫다고 말하는 거야. (····중략····)
자, 이제 너희는 가서 평화롭게 지내. 그리고 잊지마. 너희가 커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서도 잊지마. 마야, 마티, 잘가. 안녕.”(p136~p137)』

마야와 마티의 험난한 여정을 통해 만난 진실, 온갖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진실을 싸고 있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 등을 벗겨내는 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세상을 바꿔나갈 사명과 힘을 지닌 존재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며, 아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아닐까싶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쉬쉬하며 살아가는가. 얼마나 그릇되고 왜곡된 정보들을 가르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단 1%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진실에 대해서 99%의 왜곡된, 자기합리적인, 그릇된 거짓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가. 시시각각 불쑥 찾아드는 진실에 대한 갈망 앞에서 얼마나 초연하고 태연할 수 있는가. 늘 두려움에 떨면서도 쉬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치관과 중심은 지배나 종속됨 없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가.

책을 덮으며 퍼즐조각은 다 찾았지만 퍼즐은 완성하지 못한 기분이다.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나를 조롱하듯 그런 퍼즐이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하나씩 찾아낸 그 퍼즐조각들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그냥 당연히 퍼즐을 맞춰나간 결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듬으며, 때를 벗겨내는 작업을 시작해야할는지도 모른다. 마치, 조각모음을 시작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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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음악에 있어 낭만시대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게 문학에서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일명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할까. 베르테르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그 이전까지의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정표현’이라는 한계를 비로소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중심의 중세를 거치면서 억눌려있던 인간 내면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찬란한 청춘의 절정을 맞은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속 깊이 꽁꽁 묶어둔 슬픔, 분노, 공허, 절망, 허무 등을 과감히 표출한 것이다. 방황, 추방, 고립, 은둔, 상실, 자살 등 여러 모습으로 말이다. 찬란하기만 할 줄 알았던 청춘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속에 내재된 그 ‘암흑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며, 찬란한 빛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청춘을 잃어버린 청춘이랄까. 그런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해 알랭 드 보통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잃어가는 길과 빛을 되찾아주기 위해,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에 더 이상 무방비상태로 전락한 채 방황하는 일을 멎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통은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첨병으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내세운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에는 소크라테스를,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에는 에피쿠로스를, ‘좌절에 대한 위안’에 세네카를,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에 몽테뉴를,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에 쇼펜하우어를, 끝으로 ‘곤경에 대한 위안’에 니체를 첨병으로 내세우고 짧지만 긴 여정을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기후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규모 따위는 제쳐둔다해도-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p28)』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곧잘 해답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현상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함으로써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선택과 판단이 갖는 특수성이랄까)에서는 대체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늘 우리에게 당연하게 제공되는 많은 것들 즉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접하는 소위 일반적이라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그리 깊게 의구심을 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이미 다수들이 향유하고 있는 체제 혹은 문화, 사회시스템, 제도 등을 응당 옳은 것으로,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다수’ 혹은 ‘절대다수’라는 잣대가 어느덧 ‘옳은 것’ 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때문일지라. 그와 반대되는 입장들은 ‘그릇된 것’ 혹은 ‘일탈’이라 규정해버림으로써 우리가 의구심을 일으킬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끊임없이 치고나가는 의구심들 앞에 우리는 용기를 내 움켜 쥐어야한다. 내 주변에 있는, 도처에 깔린 다수의 간섭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것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젊음이라는 영혼을 가진 세대들은 더 이상 눈이 먼 채로 다수의 물결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시대의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냥했다면, 이젠 이 세상 속의 부조리라는 감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총구를 겨냥하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야하지 않을까 싶다.

고로, 우리는 ‘상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필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p96~p97)』

우리는 늘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만 정녕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늘 우리로 하여금 시야를 좁게 만들고 집중을 ‘집착’으로 변질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좀먹는다. 사고의 폭을 좁혀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용기와 의지를 구석진 곳에 처박아버린다. 더 나아가 불안에 떠느라 신경은 예민해지고 걱정과 불안은 날로 눈 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결국, 우리는 해결을 위한 노력도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잃은 채 그렇게 허약해져만 가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과감하게 절망(?)하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며 최악의 결과로부터 추측된 걱정의 단편이다. 그렇다면 미리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는 시간을 좀먹으면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절망에 빠진다는 게 아니라 현재 내 불안의 위치를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이미 결과로써의 불안으로 바꾸는 것이다.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롯이 불안에 잠식되느니 차라리 그 불안을 ‘이미 절망’이라는 상태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헤어날 궁리에 힘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로 불안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불안을 잠식시키고 좀더 이성적인 올바른 판단과 노력에 힘 쏟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는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사색이라는 처방전에 다름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뭔가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들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p241)』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조리는 존재했나보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도 대학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품고서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여놓지만, 방대한 지식들을 쉼 없이 노트에 빼곡하고 베끼는 작업에만 열중한 채 우리의 가슴이 아닌 머리를 그저 지식을 담는 그릇정도로 전락시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분명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인가를 담긴 담아야 한다.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말이다. 지식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하고도 고차원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담고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관이 없다면 쉬이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이끌어내고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때만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그간의 수고로움(시간적·정신적인)을 모두 보상받는 길이 아닐까싶다.

문제는 아주 값비싼 그릇에 담긴 구정물이냐, 아니면 질그릇이지만 값진 옥수(玉水)냐는 게 아닐는지.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p333)』

어떤 목표를 달성, 어떤 성취나 성공은 큰 의미에서 완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그 과정에는 탄탄대로만 있는 것도 아니며 진구렁이나 습지 혹은 고달픈 비탈길이나 비포장도로도 있을 것이다. 이를 대체로 고난이나 시련 그리고 고통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내가 계획한 ‘완성’에 도달하기 위한 좋은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써 인정하는 것.

어떤 고통도 없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설령, 내가 편하게 얻은 게 있다고 한들 이는 곧 누군가의 고통이면 피땀서린 고통의 한 조각일 것이다. 고통은 값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에 부딪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중심을 잃기 십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만족이라는 교훈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완성을 위한 값진 과정 혹은 중추적인 요소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철학은 결국 인간 잠재력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위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일이 그렇듯, 인간 완성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과 극단적인 고통(우리는 첫 번째 책을 쓰느라 10여 년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의 묘한 혼합으로 귀착되었다.
니체가 산을 이야기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정당성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p343)』


내일에 대한, 내 미래에 달성될 어떤 목표에 대한 막연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믿음과 그 과정에서 겪는 무수히 많은 고통의 쓴 맛이 자연스레 어우러짐으로써, 특히나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임으로써 좀더 나은 내일을, 꿀맛 같은 성취(완성)를 맛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걸을 수밖에 없다. 험준한 산세에 아찔해져도 우리는 걸어야한다. 발이 부르트고 비 오듯 오는 땀 때문에 탈진을 하게 되더라도 잠시 쉬어갈 뿐 절대 포기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정당성이란 결코 심오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내가 겪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은 불평등 불공평이 아닌, 정상에 대한 갈증과 소망으로부터 내려지는 가혹하지만 분명 정당한 고통, 그런 정당방위일 뿐일지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목표한 것을 포기하거나 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최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이정표일지 모른다. 이 이정표에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성취, 성공, 완성이라는 단물을 보람차게 마시게 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 한다고 느끼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최고의 희열을 맛 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슬픔’을 당당하게 ‘기쁨’으로 대치시켜 슬픔으로써 정체된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해나가는 그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과 과정을 잇고 유지하는 건 바로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순수하고 강인한 의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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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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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를 처음 접했던 건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그 무렵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수업을 들었으며, 종종 이 책에 대해 잘 안다고(?)하는 녀석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또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내게 그런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분이 계셨던 것 같다. 충분히 곱지 않은 그런 시선이랄까.  


그때 당시 나는 헌책방이라는 곳에 눈을 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니면서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들에 대한 뜻 모를 집착에 휩싸였던 것 같다. <실락원>이나 <설국> 역시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들고 다닌다는 바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뭔가 의미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통해 느낀 점이랄까. 그것은 철저한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줄거리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금이지만, 분명 그것은 상실이었던 것 같다. 이해 능력이 부족했던 내가 그 상실의 무게를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또한 읽고 나서 도무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한 것 역시 그의 책이 상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동안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전철에 타자마자 승객 수를 헤아리고, 계단 수를 전부 세고, 시간만 나면 맥박 수를 셌다. ······(중략)······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p90~p91)』 

 

그렇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확신이랄까, 어떤 이미지를 타인들에게 각인시키고자했던,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꽤나 진지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정당한 행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집보다 소설책이 더 좋았던 그 때. 더군다나 <상실의 시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락원>, <설국> 등을 오직 ‘들고만’ 다니면서 아마도 그것을 죄다 이해하는 척, 적어도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너네와는 다른 ‘나’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너희와 같이 그런 구속적인 일상을 살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아주 조금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뭔가를 전하려고 일탈적인 행동(일명 고답적으로까지 보이는 책들과 야자시간에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드는 행동 등)을 서슴지 않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콧방귀를 뀌듯, 그렇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난 진실로 관심 받았다기보다, 한낱 소란쟁이로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 그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아직도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 자체가 상실의 한 자락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 종종 하긴 한다. 하지만 ‘군중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외톨이가 아닐까 싶다.  


무엇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상실해가는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그 상실감에 빠져, 군중들 속에서 마치 전혀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전혀 문제없다는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나, 우리, 사람들. 어쩌면 ‘바람의 노래’란 상실에 대한 메시지라기보다 ‘나’의 존재에 대한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죽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아남은 우리는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 자신은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p94)』  


릴케와 이상 그리고 기형도는 영원히 젊은, 그런 산소(?)같은 시인이 아닐까. 이 시인들이 멋진 이유는 그들의 시를 읽은 후, 되물어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과 그 시를 애독하는 독자들 사이의 단절이랄까. 때론 이런 단절은 이처럼 멋진 것, 영원히 젊을 수 없는 우리를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젊은 애독자로 정체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여.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자네는 다정하지만 뭐랄까,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뭐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p105)』

김영하의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고,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랬다.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시선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니 똥 굵다는 표정으로, 애송이 같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조금 삐뚤어지게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내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밀을 너무 빨리 알려고 덤벼드는 그런 애송이, 젊은 피라서. 그렇게 생각하고픈 나 자신이 때론 너무나도 재수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썩소 한 방 날리고 여유로운 윙크 살짝 보태며 애써 당당한 척,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p143)』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 뿐인지도 모른다. 순간이란 눈 깜짝할 그런 순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혹은 그 순간순간을 붙잡을 수도 거기에 매달릴 수도 없다. 거기엔 어떤 손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스치듯 지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애써 기억하는 척, 붙잡고 있는 척 그런 착각 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순간을 기억하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상실 한 조각을 물고 있을 따름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늘 상실의 안은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청춘이든 노년이든 간에 어느 시절에나 내가 존재하는 순간, 내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상실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실이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스치듯 그렇게 지나치는 상실의 조각들을 자신도 모른 채 수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상실을 채워가는 게 삶의 여정이라면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곳을 뭐라 불러야 할까. 어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생에 처음으로 가장 마음이 편안한, 그런 상태가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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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Mr. Know 세계문학 24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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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 중 유독 소설(문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월등하게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이 갖는 특유의 모호성이랄까, 그런 매력 때문일지라. 세상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은, 지배당한 적 없는 무한의 영역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력(魔力) 때문에 소설은 늘 내가 동경해마지않는, 마치 소도(蘇塗)와 같은 안식을 가능케 한다. 이 안식이란 일명 ‘도피처’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정체된 시·공간적 개념(도피처)이 아닌 뭔가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차원(안식)으로서 기능한다고 할까. 


나는 종종, 감히 도전한다. 그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이 ‘안식의 땅’에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가하면, 경계도 불분명하고 어떤 표식도 없는 그 땅에 내 멋대로 선을 긋는다. 또한 오만하거나 혹은 어리석게도 이정표를 세우기도 한다. 늘 그 안식의 땅을 동경하면서도 내 멋대로 난도질하고픈, 끝끝내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가장한 욕망에 휘말리기 일쑤다.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매듭을 풀려는 젊은 날의 객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 안식의 땅 이면에는 끝간데없는 ‘욕망의 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율배반의 땅’이 뻗치는 유혹의 손길은 쉽사리 물리치기 힘든 그 무엇이다. 그 손길에 단 한 번이라도 매료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이율배반의 땅으로 가는 것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설령, 불구덩이 속을 지나야한대도 기필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 뿐이다. 더 깊이 빠져들수록 그 ‘땅’이 뿜어내는 숨결에 자지러지고 말 것을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때 묻지 않은 그 안에 들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그곳, 그 땅에서 펼쳐지는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내뿜는 오묘함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중의 유혹이며, 우리 스스로에게 내면의 상실을 강요한다. 


앞서 말한 것들은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소설(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라는 완성(?)된 유형(有形)의 틀에 내재되어 있는 소설에 대한 지극히 감상적인 궤변에 가깝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탄생한 소설이라는 세계와의 짧은 대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제임스 미치너의《소설》은 개인적 혹은 단편적이거나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는 성격이 아니다. 소설(문학 혹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역사가 이룩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출발점을 소설이 탄생(출판)한 시점이 아닌 소설의 ‘태곳적’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네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 네 계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탄생시켜나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그네들의 피땀 어린 노력들을 상기시켜 준다. 예컨대, 다분히 작가 혼자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해낸 결과물(원고)을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수정(다분히 교정·교열에 해당하는)해서 인쇄되어 나온다는 식으로, 비교적 간단한 과정만을 인지하는 독자층을 각성하게 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책을 손에 쥐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호간의 교류와 반복, 수정, 좌절, 거부, 합의 등의 긴 과정을 거치는지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전사(前史)를 꼼꼼히 되짚어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는 ‘경고메시지’처럼 들린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이 물음을 가벼이 보고 섣불리 해답을 이끌어내려 덤벼드는 많은 사람들(소설과 조금이라도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혹은 나를 포함해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들이랄까)에게 진중한 해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일종의 ‘절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소설》은 앞서 자행한, 소설에 대한 내 어리석고 어설픈 감상에 가차 없이 ‘옐로카드(Yellow-card)’로 응징한다. 


《소설》은 작가의 끊임없는 변신과 창조에 대한 노력, 사물 혹은 한 토막의 이야기나 어떤 사건에 대한 유의미한 집착으로 얻어지는 창작의 원동력, 편집자와의 관계 및 균형, 비평가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수렴해 더욱 공고히 자신의 소설을 재탄생·재완성해 나가려는 의지, 독자들의 피드백과 소통을 통한 만족감, 늘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마음가짐을 통한 자기 독려 등을 보여준다. 또 편집자로서의 역할, 좋은 원고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느낌이 좋은 어떠한 원고를 훌륭한 소설로 탄생·완성할 수 있는 역량 및 가치관, 작가와 함께 원고를 다듬으며 보다 더 좋은 원고를 탄생시키겠다는 투철한 의지와 끈기, 출판의 사후대책·처리 및 마케팅, 시대와 시류에 대한 감각 및 그에 적합한 출판물을 내놓을 수 있는 탁월한 기획력과 판단력 등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명확한 관점을 가진 비평가로서의 자질 및 가치관의 순수성, 비평가임과 동시에 작가의 역량을 내재하고 있음으로써 겪는 심적·이성적 딜레마들, 또 다른 측면에서 엿보이는 작가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조력자로서 비평가의 면모를 그려내고 있으며, 독자의 역할과 작가의 명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경고, 작가의 소유물로써, 그 연장선상에 작품을 두고 가치판단을 하는 오류에 대해, 하나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빛과 그림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통찰력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럼,《소설》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서 한참을 생각했다. 작품 속 작가가 말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는 무엇이고, 편집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또 비평가와 독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각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정리하려고 많은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내 기억력의 한계인지 능력의 부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각자 어떤 정의(해답)를 내리고 있는지 정리할 수 없었다. 다만, 엉뚱하게도 이 네 계층이 생각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라는 게 결국,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의 생각(정의)을 교류하고 협력하는 과정 속에 해답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처음부터 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로서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네 계층이 서로의 생각을 조합·수정·보완해나가는 그 과정 속에, 어쩌면 그 과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가 아닐까싶다고 말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소설 혹은 소설에 대한 정의는 생각과 생각, 관점과 관점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형성(생성)되고 소멸하는 게 아닐까. 이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소설은 언제까지나 진화하고, 그에 따른 소설의 정의 또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 소설은 진화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 또한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정체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설의 진화와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욕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는 한, 소설은 절대 인간의 손에 잡히지도, 쉬이 정복당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율배반의 모순된 감정과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땅, 그곳에서 피어나는 무수히 많은 오묘한 세계들, 안식에 대한 욕망과 정복하고자하는 욕망이 쉼 없이 달음질치는 또 다른 ‘미지의 현실세계’, 인간의 욕망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또 하나의 세계, 확장과 확장을 거듭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영역 등이 바로 ‘소설이다!’가 아닌, 인간이 소유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소설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소설》‘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답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도전을 통해서 기필코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욕망 저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열정을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소설》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과연, 소설은 누구의 손에 의해 완성되며, 그 끝은 어떤 것 혹은 무엇인가?’라는 내 의문이 소멸된 것만 같다. 의문의 가치가 있고 없고의 차원에서의 소멸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미지의 땅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내가 품은 의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기분은 마치《오래된 미래》의 라다크를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광활한 툰드라를 품은 채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땅 알래스카까지 집어 삼키려다가 딱! 걸린 기분이랄까. 아무 생각도 없이 들풀을 짓밟고, 아름다운 꽃을 나만 볼 수 있게 꺾어 집안 화병에 꽂아두려다가 문득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하달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꼭 그런 안타까움에 휩싸인 듯한, 그런 잠 못 이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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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너의 <소설>이군요.. 90년대 초반이었던가요, 동네 서점에 미리 신청을 해놨다가 며칠 기다린 끝에 마침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땐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 읽곤 했었는데... 암튼 당시에는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작가와 평론가(젊은 천재로 그려졌었죠 아마)에 초점을 맞춰 읽었던 것 같아요. 지금 같아서는 편집자와 독자가 더 재미있게 읽힐 것 같은데 ㅋㅋ 암튼 잘 봤습니다 레인님~^^*

ragpickEr 2010-04-12 21:53   좋아요 0 | URL
덧글이 너무 늦었네요..^^*;;요즘 이렇듯 정신이 없네요..
여러 관점들이 흥미롭기도 했고 다시금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지요..^^*
고맙습니다..

까까~ 2010-02-08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조만간 레인의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그 모호한 세계를 탐독할 기회를 주시게~나에겐 좀 어려우니 좀 쉽게 풀어줬음 좋겠어. ^^

ragpickEr 2010-04-12 21:54   좋아요 0 | URL
후훗..^^*;; 댓글이 늦었군..ㅋㅋ
나의 소설이라..ㅋㅋ 아마...그럴 일은 없지..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