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Mr. Know 세계문학 24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장르 중 유독 소설(문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월등하게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이 갖는 특유의 모호성이랄까, 그런 매력 때문일지라. 세상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은, 지배당한 적 없는 무한의 영역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력(魔力) 때문에 소설은 늘 내가 동경해마지않는, 마치 소도(蘇塗)와 같은 안식을 가능케 한다. 이 안식이란 일명 ‘도피처’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정체된 시·공간적 개념(도피처)이 아닌 뭔가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차원(안식)으로서 기능한다고 할까. 


나는 종종, 감히 도전한다. 그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이 ‘안식의 땅’에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가하면, 경계도 불분명하고 어떤 표식도 없는 그 땅에 내 멋대로 선을 긋는다. 또한 오만하거나 혹은 어리석게도 이정표를 세우기도 한다. 늘 그 안식의 땅을 동경하면서도 내 멋대로 난도질하고픈, 끝끝내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가장한 욕망에 휘말리기 일쑤다.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매듭을 풀려는 젊은 날의 객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 안식의 땅 이면에는 끝간데없는 ‘욕망의 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율배반의 땅’이 뻗치는 유혹의 손길은 쉽사리 물리치기 힘든 그 무엇이다. 그 손길에 단 한 번이라도 매료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이율배반의 땅으로 가는 것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설령, 불구덩이 속을 지나야한대도 기필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 뿐이다. 더 깊이 빠져들수록 그 ‘땅’이 뿜어내는 숨결에 자지러지고 말 것을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때 묻지 않은 그 안에 들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그곳, 그 땅에서 펼쳐지는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내뿜는 오묘함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중의 유혹이며, 우리 스스로에게 내면의 상실을 강요한다. 


앞서 말한 것들은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소설(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라는 완성(?)된 유형(有形)의 틀에 내재되어 있는 소설에 대한 지극히 감상적인 궤변에 가깝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탄생한 소설이라는 세계와의 짧은 대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제임스 미치너의《소설》은 개인적 혹은 단편적이거나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는 성격이 아니다. 소설(문학 혹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역사가 이룩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출발점을 소설이 탄생(출판)한 시점이 아닌 소설의 ‘태곳적’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네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 네 계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탄생시켜나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그네들의 피땀 어린 노력들을 상기시켜 준다. 예컨대, 다분히 작가 혼자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해낸 결과물(원고)을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수정(다분히 교정·교열에 해당하는)해서 인쇄되어 나온다는 식으로, 비교적 간단한 과정만을 인지하는 독자층을 각성하게 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책을 손에 쥐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호간의 교류와 반복, 수정, 좌절, 거부, 합의 등의 긴 과정을 거치는지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전사(前史)를 꼼꼼히 되짚어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는 ‘경고메시지’처럼 들린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이 물음을 가벼이 보고 섣불리 해답을 이끌어내려 덤벼드는 많은 사람들(소설과 조금이라도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혹은 나를 포함해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들이랄까)에게 진중한 해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일종의 ‘절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소설》은 앞서 자행한, 소설에 대한 내 어리석고 어설픈 감상에 가차 없이 ‘옐로카드(Yellow-card)’로 응징한다. 


《소설》은 작가의 끊임없는 변신과 창조에 대한 노력, 사물 혹은 한 토막의 이야기나 어떤 사건에 대한 유의미한 집착으로 얻어지는 창작의 원동력, 편집자와의 관계 및 균형, 비평가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수렴해 더욱 공고히 자신의 소설을 재탄생·재완성해 나가려는 의지, 독자들의 피드백과 소통을 통한 만족감, 늘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마음가짐을 통한 자기 독려 등을 보여준다. 또 편집자로서의 역할, 좋은 원고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느낌이 좋은 어떠한 원고를 훌륭한 소설로 탄생·완성할 수 있는 역량 및 가치관, 작가와 함께 원고를 다듬으며 보다 더 좋은 원고를 탄생시키겠다는 투철한 의지와 끈기, 출판의 사후대책·처리 및 마케팅, 시대와 시류에 대한 감각 및 그에 적합한 출판물을 내놓을 수 있는 탁월한 기획력과 판단력 등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명확한 관점을 가진 비평가로서의 자질 및 가치관의 순수성, 비평가임과 동시에 작가의 역량을 내재하고 있음으로써 겪는 심적·이성적 딜레마들, 또 다른 측면에서 엿보이는 작가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조력자로서 비평가의 면모를 그려내고 있으며, 독자의 역할과 작가의 명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경고, 작가의 소유물로써, 그 연장선상에 작품을 두고 가치판단을 하는 오류에 대해, 하나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빛과 그림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통찰력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럼,《소설》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서 한참을 생각했다. 작품 속 작가가 말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는 무엇이고, 편집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또 비평가와 독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각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정리하려고 많은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내 기억력의 한계인지 능력의 부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각자 어떤 정의(해답)를 내리고 있는지 정리할 수 없었다. 다만, 엉뚱하게도 이 네 계층이 생각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라는 게 결국,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의 생각(정의)을 교류하고 협력하는 과정 속에 해답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처음부터 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로서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네 계층이 서로의 생각을 조합·수정·보완해나가는 그 과정 속에, 어쩌면 그 과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가 아닐까싶다고 말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소설 혹은 소설에 대한 정의는 생각과 생각, 관점과 관점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형성(생성)되고 소멸하는 게 아닐까. 이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소설은 언제까지나 진화하고, 그에 따른 소설의 정의 또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 소설은 진화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 또한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정체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설의 진화와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욕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는 한, 소설은 절대 인간의 손에 잡히지도, 쉬이 정복당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율배반의 모순된 감정과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땅, 그곳에서 피어나는 무수히 많은 오묘한 세계들, 안식에 대한 욕망과 정복하고자하는 욕망이 쉼 없이 달음질치는 또 다른 ‘미지의 현실세계’, 인간의 욕망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또 하나의 세계, 확장과 확장을 거듭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영역 등이 바로 ‘소설이다!’가 아닌, 인간이 소유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소설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소설》‘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답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도전을 통해서 기필코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욕망 저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열정을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소설》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과연, 소설은 누구의 손에 의해 완성되며, 그 끝은 어떤 것 혹은 무엇인가?’라는 내 의문이 소멸된 것만 같다. 의문의 가치가 있고 없고의 차원에서의 소멸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미지의 땅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내가 품은 의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기분은 마치《오래된 미래》의 라다크를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광활한 툰드라를 품은 채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땅 알래스카까지 집어 삼키려다가 딱! 걸린 기분이랄까. 아무 생각도 없이 들풀을 짓밟고, 아름다운 꽃을 나만 볼 수 있게 꺾어 집안 화병에 꽂아두려다가 문득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하달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꼭 그런 안타까움에 휩싸인 듯한, 그런 잠 못 이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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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너의 <소설>이군요.. 90년대 초반이었던가요, 동네 서점에 미리 신청을 해놨다가 며칠 기다린 끝에 마침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땐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 읽곤 했었는데... 암튼 당시에는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작가와 평론가(젊은 천재로 그려졌었죠 아마)에 초점을 맞춰 읽었던 것 같아요. 지금 같아서는 편집자와 독자가 더 재미있게 읽힐 것 같은데 ㅋㅋ 암튼 잘 봤습니다 레인님~^^*

ragpickEr 2010-04-12 21:53   좋아요 0 | URL
덧글이 너무 늦었네요..^^*;;요즘 이렇듯 정신이 없네요..
여러 관점들이 흥미롭기도 했고 다시금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지요..^^*
고맙습니다..

까까~ 2010-02-08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조만간 레인의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그 모호한 세계를 탐독할 기회를 주시게~나에겐 좀 어려우니 좀 쉽게 풀어줬음 좋겠어. ^^

ragpickEr 2010-04-12 21:54   좋아요 0 | URL
후훗..^^*;; 댓글이 늦었군..ㅋㅋ
나의 소설이라..ㅋㅋ 아마...그럴 일은 없지..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