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지도
나시야 아리에 지음, 박소연 옮김 / 가람북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이 혹은 어떤 관계들이 마치 오래된 농담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기억은커녕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던 그런, 어떤 혹은 어느 농담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농담처럼 내뱉고는 돌아서 잊히기도 전에 잊었던 그 어떤 말을, 누군가는 오래도록 깊은 약속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많은 사건들 중에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일들이 생각보다 많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하늘색 지도』는 오래된 농담처럼 내게 왔다. 기억이라는 소유권을 스스로 망각해버린 어느 시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려 온 것이랄까. 책 속에 고스란히 펼쳐지는 두 소녀의 이야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과거의 ‘나’에게서부터 온 의문의 편지 한 장에 어리둥절하게 되고, 아주 오래전 진정으로 내뱉은 다짐과 만나게 된다. 그 다짐과의 첫 대면, 추억으로의 여행을 하면서 어리둥절하고 쉽사리 믿어버리기엔 너무나도 농담 같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발견해나간다. 


그에 앞서, 이야기의 첫 장면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소녀는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이 있기에 서툰 솜씨로 관리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길거리 연주를 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안고 아주 긴 추억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렸을 때 세상은 무척 작았다. 작은 세상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따뜻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점점 지평선이 빛을 받아 나의 세상이 넓어지면서 나는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단련하고 덩치는 커졌지만 세상의 거대함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있었다.(p121) 

 

순수했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값지고 빛난 그 시절에는 누구나가 세상 앞에 당당했으리라. 물론 두려움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두려움이란 무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에 지나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 뭔가를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다, 는 설렘 가득한 사실과 더불어 그 넓다는 사실만큼 반비례,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두 소녀는 지난날의 아름답고 소중한, 때론 기억하기 싫은 것들과 더불어 만나면서 지금의 스스로를 인지하게 된다.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난날에 비해 내 꿈은 얼마나 커졌고 혹은 작아졌는지 등을 되짚는다. 무엇을 잃었는가, 에 대한 해답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해답을 찾기 위해 두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용기 있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추억 속으로 그리고 새로운 도전 속으로 달려간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언젠가 혼자서 날아오를 것이다.(p198)

 

그렇다. 두 소녀는 아직 ‘여기에’ 있다. 의문의 편지를 받아들기 전까지, 두 소녀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다음 단계를 위한 계획과 도전인 ‘언젠가 혼자서 날아오를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두 소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어느 철학자보다 더 멋지고 의미심장한 문장을 가슴에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존재한다는 인식 그 다음은 바로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꿈과 도전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 짧은 두 문장으로 정리했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오버해서 궤변을 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때로는 스스로를 텅 빈 비닐봉지 같다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자신을 얻은 미나기처럼, 그리고 글라이더를 타고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하쓰네처럼 다시 일어서서 자잘한 즐거움과 모험을 즐기며 앞으로 걸어갈 것이라 생각한다.∥옮긴이의 글 中 _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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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와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른 이야기랄까. 엇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그 느낌은 꼭 ‘천진난만’하다는 차이를 보이는 듯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는 조금은 선명한 색채와 색감이었다면, 이 책은 파스텔의 아련한 느낌이면서 아주 어린 꼬마들이 장난감 삼아 마구 다룬 삐뚤빼뚤한 크레바스 같은 느낌이랄까. 뭔가 은은한 색으로 옅은 안개가 걷히는 듯하지만, 처음 사용해보는 크레바스에 힘을 너무 많이 줘버려서 조금은 서툴고 거친 맛이 난다고 할까. 그래도, 어쩌면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두 소녀는 천진난만한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설핏한 하늘색 이야기는 하나의 소품 같다. 조금은 앙증맞은 느낌이고 설익어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도입부에 등장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인내심 있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덮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천진하게 웃어볼 수 있는 작은 여유가, 그런 시간이 행간들 사이를 까르르하고 흐르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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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코 2010-0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웃~!..깜딱이야~! 여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정말 놀랐어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이때 해당하겠네요... 소설의 내용보다..북글이 더 멋지니까요..

ragpickEr 2010-01-19 13:37   좋아요 0 | URL
마루코님^^* 후훗.. 그러게요..^^* ㅋㅋ 서프라이즈~~?
(여전히 잘 지내시나요? ^^* 한동안 너무 안부를 여쭙지 못해서..죄송해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소설도 북글도 아닌..옮긴이의 당부메시지가 더 멋진걸요? ^^* (파이팅!!)

고맙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제가 감기 때문에 죽을 뻔 했어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