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 - 한쪽 가슴만으로도 행복한 여자
곽정란 지음 / GenBook(젠북)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의 일이다. 일곱 난장이 중 한 녀석의 어머님이 병원으로부터 유방암 판정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절제수술을 받으셨다. 그때 그 친구네는 ‘남산골’이라는 곰탕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해 부랴부랴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친구는 아버님을 도와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거들었고, 저녁이면 병원을 방문했다. 그렇게 친구네 집에서 두 달여 동안 살았다. 집-가게-병원을 오가며 여름방학을 꼬박 보냈다.

친구 어머님은 퇴원을 하셨고,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하게 생활하셨다. 언제 내가 아팠냐는 듯이 말이다. 그때는 유방암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때라 그저 유방절제수술을 받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시는 친구 어머님을 뵈었기에 별로 심각한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를 읽고서, 친구 어머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어느 날, 천청벽력 같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서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까, 내심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친구와 아버님, 여동생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유방절제수술을 받고서 하나의 유방이 아니라 세상을 다 잃은 듯 한 그 상실감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이미 흘러간 그 시간을 다시금 불러냈다.

엄마로서도 아닌, 여자로서, 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이제 젖먹일 아이도 없고, 살아가는데 지장도 없으니 하나쯤 없은들 무슨 상관이냐고 너스레를 떨어볼 용기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으리라.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진 저자의 가슴 아픈 절규와 고백은 내 친구 어머님과 오버랩 되면서 더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재발에 대한 걱정, 아니 그것은 저자가 말하듯 거의 공포에 가깝다. 저자와 내 친구 어머님은 발병으로부터 좌절하고, 수술로 통해 생명은 살렸으되 자신의 존재감의 상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언제고 재발할지도 모를 공포와 몇 년을 싸웠던 것이다.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재깍재깍 들려오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시간들과 늘 싸우며, 다시금 평온함을 찾는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내 안의 두려움아,
난 이제 너와 이별하려고 한다.
내 안의 새로움과
만나기 위해!

『본문 中..』


저자는 기필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고, 결국 이겨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격려와 위로가 그녀에게 살아야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종교에 귀의해 모진 시간을 이겨냈다. 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시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봉사하는 삶, 유방암을 앓고 힘들어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전달해주는 공연을 기획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바로 유방암환자들을 위해서 그녀가 기획한 공연의 제목이다. 숨은 자아와도 같은 여성성의 상실로 인해 움츠려들고 희망과 용기를 잃어가는, 살아 숨 쉬면서도 늘 절망에 빠진 채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그녀가 경험하고 이겨낸 바를 바탕으로 진심어린 동반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유방암환자들과 함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감, 상실감, 좌절감, 무력감, 공포심 등등을 떨쳐내기 위해 희망과 축복을 노래한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그 치부를 진심어린 자기애로 감싼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가 되고, 암 판정을 받은 후로 방치한 채 돌보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고귀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하게, 다시금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남자들도 어렵다는 암벽등반에 도전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난다. 또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도 모자라 그 힘들다는 사막마라톤까지.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위해 ‘도전’이라는 선물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삶의 보람을 느끼며 이전과는 다른 삶, 늘 일에 쫓기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며, 진정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보람찬 삶을 가꾸어 나간다.

가장 흥미로웠던 그녀의 도전은 사막마라톤이었다. 내가 갓 전역을 하고서 인터넷을 통해 사막마라톤에 대해 접한 적이 있다. 꽤나 매력적인 스포츠(?)라는 인상을 받았기에, 나름 도전해볼 요량으로 검색을 해봤었다. 코스도 힘들뿐더러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은 터라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관련 동영상을 보면서 나름 체력도 좋고 자신감도 있던 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사막마라톤을 그녀는 참가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 그 이상의 결과를 맛본다. 40대 여성 참가자들 중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이처럼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눈물과 감동 그리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삶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가득 담긴 책이다. 저자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알곡 같은 ‘대서사시’가 아닐까 싶다. 오래간만에 가슴 찡한 감동과 눈물 그리고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비행을 한 듯해서 뿌듯하고 가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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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 뒤엔 그런 고난과 역경의 극복의 스토리가 꼭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