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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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수능대비모의고사 수리영역의 평균점수는 달력 한 장을 채운 날수에도 못 미쳤다. 80점 만점에 20점을 넘긴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이기에(물론 수능시험 당일에는 준비해간 연필이 영험靈驗한 능력을 발휘하며 잘 굴러주어서 생에 처음으로 60점을 넘기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수학이나 수리영역의 ‘수’자만 봐도 꼴 뵈기 싫었다.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는 내가 그토록 꼴 뵈기 싫어했던 학문의 길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히로나카 헤이스케라는 유명한 수학자이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받은 저자는 어릴 적부터 수학에 대한 남다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수학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단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살던 평범한 학생이, 그것도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수학에 발을 들여놓게 되다니.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보기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즐거움》은 이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가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나를 이 위치에까지 오르게 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고나 할까. 다분히 자신의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는 특별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치’에 관한 것들이다. 


『갓난아이가 유아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시기가 있는가 하면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시기도 있다. 부모가 예쁠 때만 아이를 키우고 밉다고 하여 키우는 것을 포기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출발 시점의 모습이 설령 갓난아이와 같이 유치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키워 가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아이들 다 키워 놓고서야 사회에 대한 그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물건도 만들어 놓고 보지 않으면 그 실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p91)』 


창조? 일단 뭐 밑천이 있어야 창조를 하든지 오그리든지 할 것 아닌가.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말하는 창조의 밑천은 배움이다. 인간은 항시 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뭔가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분석하며 끝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분명 시시각각 배움의 길 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좀 엉뚱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이런 배움의 길에 서 있는 ‘나’‘발견’ 혹은 ‘의식화’하는 것이 창조의 밑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가. 세상에 이로운 걸 창조해야 할 것이고, 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창조해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창조의 그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들이 좀 어설프다고, 유치하다고, 보잘것없다고 하면 어떤가.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것, 충분히 스스로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통합되어 창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지 무엇을 배운다고 해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이 필요하다.(p124~p125)』 

 

 

그럼 어떻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미련스럽게, 차근차근 그렇게. 단, 즐겁게. 배움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도 필요한 자명한 것들이다. 누구나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렇게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 가능성으로 남겨두느냐,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루한 싸움에 첫 발을 들여놓느냐의 차이랄까. 


『지금까지 나는 나의 연구 태도 혹은 생활 태도로서 우선 사실을 그대로 파악할 것, 가설을 세울 것, 대상을 분석할 것, 그래도 길이 막혔을 때는 대국을 볼 것, 이상 네 가지를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더 나아가 사고하거나 창조할 때는 단순 명쾌하게 되도록 노력할 것을 중시하고 있다.(p136)』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저자처럼 나름의 과정이 없다. 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기 일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다보면 어느새 엉뚱한 물음을 잡고 있는 나를 본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려는 생각은 강하지만 늘 삼천포로 빠진다. 저자가 말하는 원칙대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 어떤 문제나 물음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p153)』 


남들이 보기에는 내 삶이 좀 고달프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가끔 서글플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누구나 삶이라는 것 자체에서 느낄 법한 그런 허무함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내 처지를 사랑하고 인정하며 살아간다. 몸은 ‘아, 고통스럽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조금이나마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겪는 모든 경험들로부터 배운다. 뭔가 깨달았을 때, 그것이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일지라도 흐뭇하다. 마냥 기쁜걸 뭐. 


『느긋하게 기다리고(鈍), 기회를 잡을 행운이 오면(運), 나머지는 끈기(根)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가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p187)』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그중에서도 끈기에 관한 것은 정말 깊게 반성해야함을 느낀다. 나는 좀 끈기가 없다. 아니 아주 많이 없다. 조금 성실한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차진 맛이 없다고 할까. 내 입맛에 맞는 것에는 미련하리만치 달려들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게 느껴질 때는 그냥 맥이 풀려버린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다른 것에 혹한다. 그래서 늘 나는 결과물이 없나보다. 이것저것 벌려놓기만 하고 도무지 수습을 못하니 원. 


『우리에게 앞으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력(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지혜)과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리나 원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어서는 다양성이나 변동에 대처할 수 없다. 변동과 다양성에 대처하기 위한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소심(素心)으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p230)』 


판단력과 생각하는 힘. 어디서 이런 힘을 길러야 할까.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뭐 유별난 책벌레는 못되지만 그래도 독서를 통해 우둔함을 많이 벗은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고, 생각의 중심은 늘 불안하다. 선택의 순간엔 늘 갈팡질팡하며 심장은 늘 두방망이질이다. 언제쯤 나는 주어진 내 삶 앞에 중심을 잘 잡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책 읽기가 나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마냥, 즐겁게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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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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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를 만나게 된 계기는 햇귀님께서 보내주신 영화《NEVER CRY WOLF》덕분이다. 컴퓨터로 영화보기를 시도했지만 ‘수입산’이라 그런지 좀 튕기는(?) 통에 고생을 좀 했다. 또 한글자막이 없음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좌절 덕분에 번역본인《울지 않는 늑대》만난 것이다. 내 극심한 영어울렁증(?) 때문인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영화와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이야기;《NEVER CRY WOLF》】

많은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봤다. 낯선님과 함께 가게에서 한 번, 집에서 여러 번을 보았다. 도서관에서《울지 않는 늑대》를 빌려 읽고서 두어 번 더 영화를 봤다. 어차피 자막은 ‘해독불가’였으므로 없애버리고서 그렇게 영화에 빠져들었다.(어떤 수작(?)으로《NEVER CRY WOLF》한글자막버전과 프랑스어 더빙버전을 구하게 됐다. 자막 없이 몇 번을 보고 번역된 책을 보고 난 후여서 그런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처음 본 영화의 느낌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북극의 광활한 툰드라가 침묵함과 동시에 생동하고 있다는 소소한 증거들을 아주 잘 포착해 보여준다. 늑대는 우리가 늘 주변에서 보아오는 조금 큰 개처럼 친숙했으며, 카리부(순록)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족은 진정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듯했다. 자막이 없어도 느끼는 게 많은 영화다. 

 

늑대에 대한 보고답게 그 습성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일러준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명쾌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존에 늑대로부터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늑대하면 떠오르는 폭력성·잔혹성·비열함 등등의 그 출처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늑대는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살육이 아닌 사냥을 한다. 그것도 건강한 카리부가 아닌 병이 들거나 약한 카리부만 골라서 사냥을 한다. 떠돌이가 아닌 일정한 정착형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사냥하기 어려운 시기에는 쥐를 먹으며 가족을 부양한다(때때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철저하게 지키며, 노총각(?) 노처녀(?) 혹은 홀로된 늑대들을 박대하지 않고 포용하여 화목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모습들을 영화는 아주 상세히 전하고 있다. 

 

대자연의 아름다우면서도 혹독한 환경,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생존의 이치, 내가 사는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장함이 없는,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운 땅. 역시나 가장 포악한 동물은 인간이다. 늑대를 매도한 것도, 그 씨를 말리려고 음흉한 계략을 펼치는 것도 인간이다. 사냥을 가장한 살육게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늑대로 인해 매년 사냥감이 급속히 줄어든다는 허위보고서를 만들어 그 씨를 말리려는 악랄한 인간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늑대 이미지를 여태 왜곡·세뇌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두 장면을 뽑을 수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거대하고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을 헤엄치는 장면이다. 정말 늑대가 병들고 허약한 카리부를 사냥하는지 확인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도 의지지만, 그보다도 그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에서 넋이 빠진 것 마냥, 마치 문명이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였으며 어떻게 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대자연의 품속을 평화롭게 유영하던 태곳적 인류 조상들의 DNA가 주인공에게 스며든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다고나 할까. 


또 하나의 장면은 주인공이 멋진 한방(?)을 날리는 장면이다. 늑대사냥을 하며 오직 돈을 위해 사냥이라는 살육게임을 즐기는 변심한(?) 비행사(주인공을 북극에 내려준)가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기 전, 비행기를 몰고 주인공을 위협하려 달려든다. 이때 주인공은 그놈(?)을 향해 총 한방 날린다. 그렇게 비행기는 거대한 산맥을 휘감아 넘으며 사라진다. 아마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고철덩어리와 함께 대자연의 품으로, 영원히. 


【책이야기;《울지 않는 늑대》】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책을 읽은 덕분인지 영상미(?)를 만끽하며 읽어나갔다. 조금 영화와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같은 모습이었다. 저자인 팔리 모왓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뼈가 있는 문장들에 매료됐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이었으며, 같은 내용이지만 영화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보고였다고 할까. 

 

『눈에 띄지 않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은 편치가 않았다. 그후로도 2주 동안 늑대 한두 마리는 텐트 앞길을 거의 매일 밤 이용했다. 그런데도 기억할 만한 딱 한 번을 빼놓고는 나에 대해서 털끝 만한 관심도 보이지를 않았다.

 이 무렵에 나는 내 이웃인 늑대들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드러난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유목형 떠돌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신 그들은 정착형 동물로서 아주 분명한 경계가 있는 영구 사유지의 주인이었다.(p83)』 


위와 같이, 늑대의 습성에 대해서 이처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늑대에 대한 이미지와는 달리 일정한 경계(영역)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만행(?)을 일삼을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인간이 땅에 대한 맹목적인 지배권과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늑대는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면서 그 이외의 영역을 존중한다. 자연이라는 품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라는 순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살아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는 어떠한가. 오직 ‘내 것’에 대한 탐닉으로 타인들의 삶을 짓밟고 경쟁을 조장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라는 탈을 쓴 덕분에 그나마 체면상의 이유로 에둘러 ‘파괴본능’을 일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이하·동물이하의 추악함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현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더 이상 ‘정착형’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자본은 이미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한술 더 떠서 그 경계너머로 침략·정복의식으로 확장된 건지도 모른다. 늘 일상에, 지역에, 우리나라에 몸은 정착한 채로 살아가지만 이미 의식은 ‘유목형 떠돌이’가 되어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파괴본능으로 똘똘 뭉쳐진 떠돌이로 말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라는 혼인 서약 구절이 인간들에게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늑대에게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다. 늑대는 엄격한 일부일처주의자이다. 비록 내가 이것을 반드시 탄복할 만한 특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사실은 우리가 늑대에게 부여한 무절제한 난잡함이라는 평판이 꽤 위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p94)』 


고착화된 편견이 벗겨지고 그 속에서 위선적이라는 자못 ‘불편한 진실’과 대면한다. 인간 공통의 잣대(그런 게 있다면 혹은 가능하다면)로 문명화된 모든 것들을 평하고 규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지만, 자연에 대한 몰이해와 이런 잣대가 빗어낸 그릇된 어떤 틀을 인간들이 학습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에 대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순리에 대한 몰이해를 다분히 경외 혹은 경탄으로 국한한 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닐는지. 

 

『늑대는 절대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 아마 늑대와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늑대에게는 큰 사냥감 동물을 하나 잡아서 죽이는 일이 힘든 작업이다. 성공하기 위해 밤새 사냥을 하며 일대를 50~60마일씩이나 답파하기도 한다. 늑대에게 이 일은 사업이나 직업 같아서 일단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분한 고기를 얻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쉬고, 사귀고, 노는 데 바치기를 더 좋아한다.(p194~p195)』 


인간이 재미로 하는 것들, 즐기는 것들. 대표적인 게 사냥이 아닐까. 덫을 놓고 총을 준비하며 누구는 재미삼아, 누구는 돈벌이삼아 그런 살육게임을 즐긴다. 만약, 인간이 그만한 돈벌이가 되고 그만한 재미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대답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 상상해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강력한 공공의 적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모든 두려움의 근간은 자연이나 동물들에서 인간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설마’라는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인 믿음을 희망삼아 자신의 의식세계를 허물어뜨리지 않게 버텨내고 참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부분의 몸통에서 남은 것들을 살펴보니 질병이나 심각한 쇠약의 증거가 있더라는 사실이다. 뼈의 기형, 특히 두개골의 괴사(壞死: Necrosis, 생체 세포·조직의 일부가 죽거나 죽어가는 상태 -옮긴이)에 의한 기형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두개골에 달린 이빨이 닳은 정도로 봐서, 순록들이 늙고 병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갓 잡은 몸통을 바로 조사할 수 있는 현장은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은 늑대가 순록을 잡자마자 다가간 경우도 있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뻔뻔스럽게 늑대들을 쉬이 하고 쫓아버리고서 말이다.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겁을 적당히 먹고 물러났다. 이들 순록 중 몇몇은 안팎으로 기생충이 심하게 들끓어서 언제 죽을 줄 모르고 걸어다니는 불쌍한 순회동물원용 짐승 같았다.(p195~p196)』 


팔리 모왓이 전하는 이러한 흥미로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 늑대가 나약하고 병든 카리부를 사냥감으로 택하여 생존해나가며, 그것으로 인해 순록은 건강한 유전자를 유지·발전시키며 생명을 이어가고 진화한다는 보고를 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소설과 에세이의 애매한 경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 책의 사실성에 집착하기보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진실성’만큼은 한 번쯤 더듬어 봐야하지 않나 싶다. 만약 소설로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가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다소 불편한 진실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비로소 드러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염두에 두고 말이다. 


『동쪽 어디선가 늑대가 울었다. 가볍게, 궁금하다는 듯이.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전에 많이 들어본 소리였기 때문이다. 조지였다. 없어진 가족의 대답을 듣기 위해 황야에 울려 퍼뜨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소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조화롭지 못한 역할을 선택하기 전, 한때는 우리의 것이었던 세계. 내가 얼핏 알아보고 거의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 스스로가 외면하고 만 세계에 대한 노래였다.(p233~p234)』 


기나긴 여정의 끝은 씁쓸했다. 늑대 울음은 더 이상 소름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저 편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에게 가족을 빼앗긴 채,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천진하게 가족을 찾는, 평화롭기까지 한 울음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버려버린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각성의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간절한 울음임과 동시에 일상적인 울음이다. 조화로움을 싣고 퍼지는 화해를 청하는 전령임과 동시에 곧 바스락 소멸될지도 모르는 처연한 울음이다. 


누구에게는 마음을 열게 하는 울음이며, 누구에게는 더 굳건하게 마음을 닫게 만들어버리는 울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자세에 달렸고, 언제까지 기다려줄 것인지는 우리 선택의 몫일 것이다. 부디 사라져버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팔리 모왓이 이 책에서 그려낸 늑대는 우리가 그동안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쌓아온 야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다. 한때 인간과 공존했던 늑대는 인간 문명의 탐욕에 희생된 대표적인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늑대에 대한 ‘신화’는 인간 자신의 죄와 비겁의 투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늑대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몰이해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정작 피에 굶주린 야수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이다.(옮긴이의 글 中)』 


인간과 늑대의 이미지가 뒤바뀌어 버린 세상. 그것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간에 문명이라는 미명아래 가득히 들어차있는 탐욕스런 인간들, 제 죄 값을 타인들 혹은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비열한 인간들, 또 겁은 많아서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편견을 학습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약한 인간들, 이해라는 과정을 배제한 채 무조건 빠른 해답·결과를 바라 몰이해를 가장 효율적인 투입요소로 생각하는 비효율적인 인간들. 인간의 각성은 언제쯤 일어나게 될까. 


덧붙이건대, 책의 재질이 어떤 면에서는 조금 아쉽고 실망스럽다. 또 어떤 면에서는 가볍고 나름 분위기도 있다. 페이퍼백 재질이어서 쉽게 닳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양장본으로 깔끔한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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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의정서 2
앨런 폴섬 지음,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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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편식이 아주 심한 편임을 안다. 그래서 다독가도 아닐뿐더러 진정한 독서가는 더더욱 될 수 없음을 나 스스로 잘 안다.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 관심 안의 책들을 탐할 뿐이고, 그렇지 않은 책들은 손은커녕 눈길만 겨우 표지나 책등에 가닿거나 아예 ‘보려’고도 않는 지독하고 아주 오만불손한 행태를 보인다. 특히나 ‘자기계발’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책들과 ‘추리소설’에 대한 내 선입견과 편견은 극에 달한 실정이다. 도무지 정이 안가서 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내게 작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그 변화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혹은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로 꼬집어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탄탄하다 못해 철옹성 같던 내 독서편식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내겐 대단한 의미이면서 발전(?)이라 할 만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저 평소 손이 가지 않던 반찬을 한 젓가락쯤 집어 먹어본 것에 지나지 않다.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손이 가다보면 나도 언젠간 독서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이 인다. 


*

『마키아벨리 의정서 1·2』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미지의 맛’에 대한 한 젓가락쯤의 기대로 집어든 책이다. 그보다 앞서 책 제목에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 책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라는 단어와 ‘의정서’라는 단어는 적어도 내게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았고, 뭔가 묵직한 느낌이어서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스티브 베리의 추리소설『호박방』(전2권)처럼···. 첫 장을 읽어나가면서 희비가 교차했다. 중세 어느 때쯤의 이야기가 아닐까했던 예상이 빗나가면서 조금은 씁쓸했으며, 다행이도(?) 중세사 강의를 듣다가 포기하다시피 한 개인적인 이력(?)을 갖고 있는 나였기에 조금은 안도했다. 


줄거리(정말이지 난 줄거리 요약을 못할뿐더러 정말 싫다!)는 대강 이렇다. 전직 형사였던 마틴의 옛 연인 캐럴라인의 죽음,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미 하원의원이었던 마이크와 아들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틴은 캐럴라인이 죽기 전에 들려준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그녀의 부탁으로 사건을 파헤쳐나간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면서도 작은 호기심 같은 것들을 슬며시 흘리면서 진행된다. 마틴은 영국,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을 동분서주한다. 그럴수록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몸집을 서서히 불려나간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1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게임은 이제 시작일 뿐이구나 싶었다.

 

솔직히 1권을 보고 별로라는 생각이 들면 2권을 구입 안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재미가 있어서라기보다 1권에는 빙산을 이루는 일각일각들을 두서없이, 그것도 아주 광범위하게(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늘어놓았기 때문이랄까. 궁금해서! 이제 퍼즐을 완성해야하니까! 아무튼 1권은 사건의 연속이고 그 사건들을 통해 엉뚱하다시피 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아가는 과정이다.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캐럴라인 가족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미 대통령 해리스는 그의 최측근들의 무시무시한 제안(자신들과 미국의 정치적 행보에 방해가 되는 각국의 수장들에 대한 암살계획을 승인해달라는)을 들은 후, 삼엄하고 깐깐한 대통령 경호망을 뚫고 탈출(!)해 마틴을 만난다. 이 둘은 마키아벨리 의정서를 표방하는 혈맹조직의 음모를 파헤치고 세계평화(?)를 위한 동지가 된다. 적의 실체는 거의 세계 모든 곳곳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채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피로써 맺어진 잔인하고 포악한 거대조직이며, 이들에 맞서 마틴과 해리스는 고군분투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아주 긴박하면서도 스릴 넘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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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앨런 폴섬은 참 유명한 사람이란다. 추리소설계에서는 소위 시쳇말로 대박작가쯤 되는 사람이래나 뭐래나. 잘은 모르지만(저자에 대해서도,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마키아벨리 의정서 1·2』를 읽으면서 꽤나 흡족했던 것들이 있다. 하나는 굉장히 스케일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광범위한 무대에서 종횡무진 이야기가 전개될 뿐만 아니라 어느 곳곳이건 작가의 묘사가 참으로 생생해서 좋았다. 앤 패디먼의『서재 결혼 시키기』에 언급된 현장독서의 중요성을 실감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게는 부러우면서도 저자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정확한 날짜와 요일 그리고 세세한 실시간으로 단락되어 있어서 긴장감과 긴박함, 스릴이 배가 되어 거의 9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1분 혹은 2분 차이로 장면이 교차되거나 이야기가 흘러가는 부분에서는 짧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등장인물들과 나의 감정교류랄까, 감정이입이 아주 은밀하면서도 세밀하게 이루어져 이야기에 몰입하기 좋았던 것 같다. 김영하의『빛의 제국』이 24시간 동안의 사건을 한 시간 간격으로 단락해놓아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이 즐겁고 용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그 이상의 스릴이 존재한다. 


끝으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마틴이 모든 일이 끝나고 집에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잠시 잊었던 의구심을 떠올리면서 독자 역시 여태껏 사건을 다시금 재정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등한시 했던 부분들에 대해 이미 내용상으로 종결된 사건을 재추적하게끔 한다. 사건의 중심으로부터 제외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그네들의 행동이나 숨은 의도에 대해 재조명함으로써 사건의 종결과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내내 벌어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앨런 폴섬의 다음 작품은 아마도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은 그런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참! 아쉬운 점도 있었다. 나는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속에 녹아있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작품에 대한 저자의 이해랄까, 자신만의 정의랄까 하는 것에는 조금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는. 이야기 속에 드러난 것처럼 마키아벨리 의정서에 따라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러기 위해서 어떤 일이건 불사하며 서로 피로써 동맹을 맺은 조직체들의 성격을 그대로 빌려 마키아벨리는 물론『군주론』까지 동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 자신이 만들어낸 이 이야기 속의 해괴망측한 조직체의 모든 특성들이 마키아벨리와 그의 작품『군주론』에 기인한다는 식의 저자의 인식은 조금 불편한 감이 없지 않더라는. 


또한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한계라면 한계일 수 있는 느낌도 받았다. 소위 영웅주의라는 것을 표방한 것인지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마틴과 함께 세계평화를 지켜낸 미국 대통령 존 해리스의 악전고투를 보면서, 사건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을 암시함으로써 영웅의 존재에 대한 어떤 정당성을 필역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은 내가 뭘 잘 몰라서 그런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자극했다. 물론 참 인간적인 대통령이구나, 싶긴 했다만···. 


***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것이 꼭 일반의 음모론처럼 허무맹랑하다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거나 혹은 믿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와 반대로 아주 사소한 것들이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들의 집합일는지도 모른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들면 들수록 그 실체에는 가까워질는지 모르나 결코 이득이 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지라. 식자우환(識字憂患). 세상이라는 이 시·공간은 생각보다 아는 것 못지않게 모르고 사는 게 득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의식함으로 인해 뇌리에 각인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각성의 파장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독하리만치 스스로를 번뇌케 하는 불씨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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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0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레인님의 리뷰!! 저도 편식이 심한 편인데... 자기계발서와 추리소설 저도 손이 잘 안 가는 장르예요. 리뷰만 보면 이 책 읽고 싶어지는데 막상 손에 들면 어떨는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레인님의 리뷰는 언제 봐도 친절하고 깔끔합니다. 책에 대한 정보는 물론 문제의식에다 곁가지 정보까지 꼭 필요한 건 잊지 않고 챙겨주는 자상한 삼촌 같은 리뷰라고나 할까요 ㅋㅋㅋ 암튼 잘 봤습니다 레인님~^^*(근데 교보에는 왜 안 올리셨어요?)

ragpickEr 2010-01-19 13:31   좋아요 0 | URL
무질님^^*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죄송해요..;;
리뷰 쓰기가 싫어졌다가..그냥 올려봤어요..ㅋㅋ 저는 태어나서 두 번째 추리소설이었어요..;;ㅋㅋ
여전히 제 귓볼을 뜨겁게 하시는군요..^^*;; 주절주절인걸요..후훗..;;
삼촌 같은?? ㅋㅋ 형님!!왜 그러셔요..ㅋㅋㅋㅋ

교보에요? 그러게요~^^*; 왜 안 올렸을까요..;;
조만간 올려야겠어요..^^*; ㅋㅋ 제 북로그에만 올려야지..ㅋㅋ
늘 건강하시구요!! 으라차차차차차!!

에샬롯 2010-01-10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다 읽었네..^^ㅋ

ragpickEr 2010-01-19 13:31   좋아요 0 | URL
나곰양^^*
후훗..네~다 읽었어요..ㅋㅋㅋㅋ
거금(?)을 들여 읽었습니다..;;ㅋㅋㅋㅋ
 
마음을 노나주는 유쾌한 인생사전 노나주는 책 1
최윤희 지음, 전용성 그림 / 나무생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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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하던 5월 어느 날, 바이올렛님으로부터 한 장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별다른 기별 없이 내게 날아든 이 엽서에는 조병준 시인의『따뜻한 슬픔』에서 발췌한「따뜻한 슬픔」이라는 시가 고운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어린왕자 스탬프가 서명처럼 혹은 낙관처럼 찍혀있던 이 ‘따뜻한 5월 어느 날의 작품’에는 어떤 짧은 인사말도 없었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 따뜻한 시 한 편과 이를 지켜내고 있는 듯 보이는 어린왕자뿐이었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를 걸으며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 그 너머의 따뜻한 안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책 속을 여행하면서 슬쩍 건져 올린 글귀를 무료한 어느 오후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보내는 이는 없고 오직 받는 이만 적어서, 어떤 겉치레격인 짤막한 안부인사도 없이 날리고픈 때가 있다. 내 평온한 시간이 방해받지 않으면서 받는 이에게 지금 이 시간대를 고스란히 담아 보내고픈 때가 있다. 급기야 부산하게 엽서를 찾고, 만년필을 끼적이는 사이 내 오롯한 오후나절이 깨어져버리고 달아나버릴지도 몰라 지금보고 있는 페이지를 살포시 도려내 날리고픈 충동에까지 이르는, 그럴 때가 있다. 


 *

『마음을 노나주는 유쾌한 인생사전』은 짤막하지만 유쾌한 삶의 의미를 전하는 글과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중한 맛이 우러나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장은 독립적으로 쉽게 떼어내 사용할 수 있도록 점선처리 되어있고, 글귀와 그림을 제외한 공간은 직접 채워도 될 만큼 충만하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를 적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진 않지만, 언제든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쉽게 전해질 수 있도록 예비된 책이다. 고로, 이 책은 읽는 나 자신을 위한 책이면서 나와 연결된 모든 이웃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노나주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책인 셈이다. 


말은 힘이 세다. 말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쁜 반대말을 입술에 달고 살자.

아, 신나라~

아, 행복해라~

거짓말처럼 지겨움이 증발해서 날아간다.

∥「이쁜 반대말」中 _ p30∥ 

 

말과 글이 힘이 세다, 고 느낄 때가 있다. 남을 설득하고 때론 굴복시키고 논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때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남몰래 숨겨둔 ‘바람문’을 서서히 현실화 혹은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느낄 때이다. 말은 내게서 나오지만 결국 나에게 다시금 돌아오기 마련이다. 다시 돌아오게 될 그 말에 다른 이들의 좋은 기운과 바람이 섞여있다면, 나는 좋은 말을 내뱉은 사람이고 그로 인해 내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자못 부끄럽지만 작으나마 기분 좋은 착각에 흠뻑 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결국 그 말은 나 자신을 조금 더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셈인 것이다. 기적이란 다름 아닌 내가 내뱉은 말이 무사히 좋은 곳을 여행하고 조금은 더 좋은 말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 


돈 없는 사람을 거지라고 부르지 마라.
진짜 거지는 추억이 없는 사람이다.
∥「거지」_ p39∥  


어쩌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거지’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허상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 내가 일말의 연민과 동정심을 발휘하는 그 순간, 이 세상 어떤 사람이건 간에 내가 만들어낸 허상의 누더기를 걸쳐 입게 되는 게 아닐까. 추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단지 지금 먹고살기 바빠서 잠시 추억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핑계뿐이어도 좋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아도 좋다. 어느 잘 차려입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조금은 불온한 눈빛을 내게 건네는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나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댈 것 없는 당당한 거지가 되겠노라. 


연꽃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는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면 미련 없이 털어버린다.

그래서 연꽃은 그윽하고 향기롭다.

∥「연꽃」_ p69∥  


몇 달 전에 연꽃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우북하게 모여 있는 연꽃은 생생한 장관을 연출함과 동시에 조금은 늙수그레한 기운도 함께 피워 올리는 듯했다. 가느라단 꽃대 위에 조금은 위태롭게 헤벌쭉하게 핀 연꽃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살짝 끼얹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꽃을 만나면 꼭 이렇게 물 한 손바가지 쯤은 끼얹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연꽃을 대할 때만 치러지는 신성한 의식처럼,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렴풋하게 학습된 어떤 의무감에 떠밀렸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끼얹은 물 한 손바가지는 금세 저 있던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꽃이, 연잎이 밀어내어서도 아니고 물 저 혼자 떨어진 것도 아닌, 이미 서로에게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 같았다. 이 둘의 약속이란 어쩌면 서로의 성질에 대한 배려심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끈함과 미끈함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제 무게로 서로를 짓누르지도 않을 것이라는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신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연꽃은 늘 그윽한 향기를 폴폴 날리는 것일지라. 그렇기 때문에 물은 그보다 낮은 곳에서도 평온하게 숨 쉴 수 있는 것일지라.

예술의 모든, 원재료는 그리움이다
∥p85 _ 삽화 캡션∥ 

 

작고 초라한 집 두 채 앞을 한 소녀가 바구니처럼 생긴 것을 들고 종종걸음 걷듯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작고 초라한 집 두 채를 합치고도 두어 배쯤은 더 큰 우람한 집이 있고, 그 안에는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있다. 나란히 앉은 네 식구 옆 아랫돌 근처에 ‘도꾸’가 한 마리 있고 마당에는 어미닭을 뒤따르는 네 마리의 병아리가 졸졸졸 지나간다. 또 집 옆에는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난 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어엿한 기와지붕 위에는 파수꾼처럼 지켜선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런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 아래쪽에 그린이의 서명과 함께 위에서 인용한 캡션이 달려있다. 


한참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예술이 뭔지, 그것을 오롯하게 이해할 수도, 받아들여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이 글귀를 해석할 재간이 없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던 것이라곤 작고 초라한 집과 우람한 집 사이에는 어떤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것만 어렴풋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리 머지않았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고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혹여나 한 번쯤은 되돌아가고픈 어쩌다 만난 망령된 상상 속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식구는 나란히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각각의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공허할 법도 한 시간 속에서 그리움은 만질 수 없지만 만나게 되는 것이고, 기억 속 혹은 상상 속 시간들을 오롯이 눈에 보이는 것 무엇쯤으로 보이게끔 하려는 것이 예술의 시작쯤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 책 속 글과 그림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제 각각 의미를 품은 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한 장에 들어찬 글과 그림은 하나의 격려와 용기, 유쾌함과 활력이 아닌 그 배로 작용한다. 가령, 글이 담백하면 그림은 싱긋거리는 듯 상쾌함을 주고, 글이 생기발랄하면 그림은 인생사의 담담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 하달까.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 더불어 생각하고 ‘노나주는’ 기쁨까지 맛 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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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 2009-12-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너의 글마저 노나주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것 같아. 너의 기분, 너의 생각, 너의 느낌들이...^^ 우린 진짜 거지는 되지 말자. 좋은하루 보내~ ^ㅡ^

ragpickEr 2009-12-28 00:23   좋아요 0 | URL
까까^^*
후훗..; 좋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어찌 얼굴이 화끈거리네^^*;ㅋ 교보에 올린 리뷰 재탕 삼탕하는 것이라서..;ㅋㅋ 그려그려!! 거지는 되지 말아야지! ^^* 후훗.. 감기 조심하고 올 한 해 수고 많았수! 마무리 잘 해서 힘차게 오는 한 해도 즐겨 맞이하시라!! ^^*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한국의 서정시 44
정일근 지음 / 시학(시와시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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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는 언젠가 김용택 시인의 시들을 보면서 감히(?) 그는 참 村스럽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 이후로 읽은 몇 안 되는 시집을 통해 어쩌면 대체로 시인은 죄다 ‘村스러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에 이르렀다.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 이름 모를 들꽃 하나, 새들의 지저귐, 마당 앞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무릉도원 같은 풍경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네들은 시인이면서 늘 村스러운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위 문명 혹은 문화라는 화려한 겉옷을 걸치고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삐 살아가는 이들은 아마도 村스러울 새가 없지 않을까 싶다. 다행이도 우리 곁에는 늘 村스러운 시인들이 있다. 뭔가 만들고 구축하고 짓고 생각하고 조바심내고 쫓기다시피 바쁜 우리들을 위해 시인들은 펜대를 버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일구는 꾸밈없고 가식 없고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러한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그곳에서 시인들은 싹이 움트고 꽃대가 나고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순리 그대로를 그저 겸허하게 받아 적을 뿐이다. 이런 시인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우리는 지친 육신과 영혼을 위로받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은 제목부터가 참 정겹고 마음에 쏙 든다. 그냥 ‘착한 영혼’이라든지 ‘낡은 것의 영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흐뭇함과 깊이가 있는 듯하다. ‘낡은 것’을 추레한 것쯤으로 방치하지 않고 ‘착하게’를 덧붙임으로써 어감은 물론 우리가 조금은 낡은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조금은 푸근한 마음으로 ‘낡은 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듯하다. 게다가 ‘영혼’이라니! 도대체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당장에라도 시집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눈 내리는 은현리 겨울들판을/전봇대는 걸어가신다/펄펄 날리는 눈보라 맞으며/푹푹 빠지는 외눈발자국 남기며/들판 건너 마을 지나/마을 지나 가파르고 험한 산길 따라/키다리 아저씨가 찾아가는 곳/솥발산 7부 능선에 웅크리고 있는/하늘 아래 저 먼 첫 집/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저녁마다 전봇대가 찾아가면은/녹슨 양철지붕 낮게 인 오막살이에/삼십 촉 알전구/참, 참 따뜻하게 켜진다

∥「겨울 전봇대」_ p17∥ 


나는 전봇대 할아버지처럼 늙을 수 있으려나. 그 우직한 모습 그대로 따뜻함을 언제도록 간직하며 늙어갈 수 있으려나. 그런 부지런함으로 누군가에게 내 남은 체온 1도씨쯤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저처럼 착하게 낡으멍 늙으멍 내게 주어진 삶을 노닐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생을 준비할 수 있으려나.

길가 낮은 곳에서 키 작은 그대는 붉은 화관을 쓰고 발레리나처럼 인사하지만/용서하시라, 나는 점잖은 척 눈인사 나누지만 그대 이름 모르는 시인의 부끄러움에 얼굴 화끈거리도록 미안하다 

∥「봄, 인사」부문 _ p20∥ 


가끔 이름을 모르는 나무나 풀, 꽃이며 곤충이며 새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목이며 마음에 갑갑증이 컥 걸린다. 그네들이 전하는 인사를 들을만한, 들을 수 있을만한 그릇도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없이 여태 내게 걸린 갑갑증에만 짜증을 내고 답답해한다. 가끔 이렇게 걸려드는 호기심이며 궁금증은 나를 아주 ‘예의 없는 것’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시인처럼 ‘얼굴 화끈거리도록 미안’한 사람이 되려면 나는 얼마나 더 村스러워져야 한단 말인가. 


 나무는 자신의 몸 속에 둥근 시간 숨기고 산다/나이테가 둥근 것은 시간이 둥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시간이 둥근 것은 우리 사는 세상이 둥글기 때문이다/사람의 시간이란 직선의 속도는 아니다/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시간이 사람의 시간이다/둥글게 걷다 보면 당신은 어디선가 나무의 시간과 만날 것이다/하늘이 사람의 엄지손가락에 나무의 나이테 같은/사람이 걸어갈 둥근 길을 숨겨 놓은 것처럼

∥「둥근 길」_ p33∥ 

 

둥글둥글 수더분한 시인의 얼굴에는 엄지손가락에 있는 생의 지문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는 표정만으로도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시간이 사람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언젠가 ‘나무의 시간과 만’나게 된다면 살포시 내 엄지손가락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엇나가버린 내 시간을 조율하고 싶다. 행여, 잘려나간 나무밑둥치를 만나게 된다면, 이젠 걸터앉지 않고 또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엄지손가락을 맞대보고 싶다. 그렇게라도 그네들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마당에 다 있다, 시를 쓰는 나는/마당에 나가면 시는 기다리고 있다/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 기다리고 있다/내가 아는 식물학자는/한 평의 땅에는/200가지의 식물이 산다고 했다/살아 있는 생명이 있어/마당 한 평에 200편의 시가/마당 한 평에 200컷의 사진이 있다/마흔 넘어 스무 평의 마당을 가진 나는/4000편의 시詩창고를 가진 부자/내게 시로 가는 길을 묻는 이여/그대 주머니 털어 마당을 사시라/대백과사전에/인터넷 검색창에서 찾을 수 없는 시가/마당에 있다, 미당도 김춘수도 쓰지 못한 시가/마당에 다 있다/마당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마당론論」_ p84∥ 


나는 마당을 잃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마당 한 평 없는 집에 살고야 말았다. 베란다에 갖가지 식물들이 있은 들, 그네들은 보기에는 좋아도 한 편으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처량하기도 하다.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마당’을 버린 셈이다. 그것도 탈탈 싹싹 털고 털어 빚을 내고 내어 죽어버리라는 듯이 마당을 죽인 셈이다. 누군가는 우리 전원주택에는 마당도 있고 정원도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하나, 내게는 그 정원과 마당에는 식물들이, 그것도 ‘한 평에 200편의 시’‘한 평에 200컷의 사진’도 자랄 수 없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곳에는 오직 인간만이 자라고, 욕망이 자라고, 공허한 허상만이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도심 속 자연이니 숲이니 하는 곳마다 인간만이 우글거리는 끔찍한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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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늙어버린 청춘이라고, 한탄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다. 술도 진탕 마셔보았고 욕지거리도 해봤다. 허나,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나아질 것도 없더라는. 그저 그러고 있는 내 모습에 욕지기만이 나오더라는. 이제라도 ‘착하게’를 조심스레 덧붙여보고 싶다. ‘착하게 늙어버린 청춘’이기를 바라는 삶을 갈망해본다. ‘착하게 낡아가는 젊은 영혼’이기를 소망해본다. 그렇게 내일을 향해 조용히 뒷걸음질 쳐본다. 


‡‡‡‡‡‡‡‡‡‡‡‡‡‡‡‡‡‡‡‡‡‡‡‡‡‡‡‡‡‡¨¨주워 담기¨¨‡‡‡‡‡‡‡‡‡‡‡‡‡‡‡‡‡‡‡‡‡‡‡‡‡‡‡‡‡‡

자주달개비꽃 속에 수술 여섯 식구 사는데/둥글게 모여 앉아 도란도란 아침 밥상 받는다/밥은 은현리 햇살로 지은 햇살밥, 국은/꽃잎에 맺힌 이슬로 끓인 이슬국이 전부지만/자주달개비 식구는 밥상 앞에 앉아/달그락 달그락 즐거운 수저소리 다정하다/아버지 젊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 다섯 식구/달개비같이 여섯 식구 되었을 것인데/그 사람 그렇게 떠나가지 않았어도/다섯 식구 앉은 밥상 그득했을 것인데/오늘따라 빈자리 그 빈자리는 바다처럼 넓다/큰 잎처럼 다 자라 객지에 나간 아이들/이 아침 따뜻한 밥에 더운 국 제대로 차려 먹는지/자주달개비꽃 곁에 쪼그려 앉아/산다는 것은 밥상에 빈자리 늘어나는 일이라고/마음은 우물처럼 깊어진다, 자주달개비꽃처럼/식구 다 모여 한 밥상에 앉고 싶은 아침/내 우물 속에서 자주색 깊은 슬픔 출렁거린다

∥「자주달개비꽃 앞에서- 식구·4」_ p41∥ 

 

*[어루숭어루숭] - 줄이나 점이 어지럽고 화려하게 무늬를 이루고 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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