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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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 낭만시대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게 문학에서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일명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할까. 베르테르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그 이전까지의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정표현’이라는 한계를 비로소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중심의 중세를 거치면서 억눌려있던 인간 내면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찬란한 청춘의 절정을 맞은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속 깊이 꽁꽁 묶어둔 슬픔, 분노, 공허, 절망, 허무 등을 과감히 표출한 것이다. 방황, 추방, 고립, 은둔, 상실, 자살 등 여러 모습으로 말이다. 찬란하기만 할 줄 알았던 청춘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속에 내재된 그 ‘암흑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며, 찬란한 빛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청춘을 잃어버린 청춘이랄까. 그런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해 알랭 드 보통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잃어가는 길과 빛을 되찾아주기 위해,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에 더 이상 무방비상태로 전락한 채 방황하는 일을 멎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통은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첨병으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내세운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에는 소크라테스를,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에는 에피쿠로스를, ‘좌절에 대한 위안’에 세네카를,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에 몽테뉴를,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에 쇼펜하우어를, 끝으로 ‘곤경에 대한 위안’에 니체를 첨병으로 내세우고 짧지만 긴 여정을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기후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규모 따위는 제쳐둔다해도-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p28)』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곧잘 해답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현상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함으로써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선택과 판단이 갖는 특수성이랄까)에서는 대체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늘 우리에게 당연하게 제공되는 많은 것들 즉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접하는 소위 일반적이라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그리 깊게 의구심을 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이미 다수들이 향유하고 있는 체제 혹은 문화, 사회시스템, 제도 등을 응당 옳은 것으로,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다수’ 혹은 ‘절대다수’라는 잣대가 어느덧 ‘옳은 것’ 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때문일지라. 그와 반대되는 입장들은 ‘그릇된 것’ 혹은 ‘일탈’이라 규정해버림으로써 우리가 의구심을 일으킬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끊임없이 치고나가는 의구심들 앞에 우리는 용기를 내 움켜 쥐어야한다. 내 주변에 있는, 도처에 깔린 다수의 간섭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것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젊음이라는 영혼을 가진 세대들은 더 이상 눈이 먼 채로 다수의 물결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시대의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냥했다면, 이젠 이 세상 속의 부조리라는 감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총구를 겨냥하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야하지 않을까 싶다.

고로, 우리는 ‘상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필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p96~p97)』

우리는 늘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만 정녕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늘 우리로 하여금 시야를 좁게 만들고 집중을 ‘집착’으로 변질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좀먹는다. 사고의 폭을 좁혀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용기와 의지를 구석진 곳에 처박아버린다. 더 나아가 불안에 떠느라 신경은 예민해지고 걱정과 불안은 날로 눈 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결국, 우리는 해결을 위한 노력도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잃은 채 그렇게 허약해져만 가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과감하게 절망(?)하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며 최악의 결과로부터 추측된 걱정의 단편이다. 그렇다면 미리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는 시간을 좀먹으면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절망에 빠진다는 게 아니라 현재 내 불안의 위치를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이미 결과로써의 불안으로 바꾸는 것이다.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롯이 불안에 잠식되느니 차라리 그 불안을 ‘이미 절망’이라는 상태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헤어날 궁리에 힘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로 불안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불안을 잠식시키고 좀더 이성적인 올바른 판단과 노력에 힘 쏟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는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사색이라는 처방전에 다름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뭔가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들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p241)』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조리는 존재했나보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도 대학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품고서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여놓지만, 방대한 지식들을 쉼 없이 노트에 빼곡하고 베끼는 작업에만 열중한 채 우리의 가슴이 아닌 머리를 그저 지식을 담는 그릇정도로 전락시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분명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인가를 담긴 담아야 한다.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말이다. 지식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하고도 고차원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담고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관이 없다면 쉬이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이끌어내고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때만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그간의 수고로움(시간적·정신적인)을 모두 보상받는 길이 아닐까싶다.

문제는 아주 값비싼 그릇에 담긴 구정물이냐, 아니면 질그릇이지만 값진 옥수(玉水)냐는 게 아닐는지.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p333)』

어떤 목표를 달성, 어떤 성취나 성공은 큰 의미에서 완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그 과정에는 탄탄대로만 있는 것도 아니며 진구렁이나 습지 혹은 고달픈 비탈길이나 비포장도로도 있을 것이다. 이를 대체로 고난이나 시련 그리고 고통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내가 계획한 ‘완성’에 도달하기 위한 좋은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써 인정하는 것.

어떤 고통도 없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설령, 내가 편하게 얻은 게 있다고 한들 이는 곧 누군가의 고통이면 피땀서린 고통의 한 조각일 것이다. 고통은 값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에 부딪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중심을 잃기 십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만족이라는 교훈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완성을 위한 값진 과정 혹은 중추적인 요소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철학은 결국 인간 잠재력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위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일이 그렇듯, 인간 완성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과 극단적인 고통(우리는 첫 번째 책을 쓰느라 10여 년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의 묘한 혼합으로 귀착되었다.
니체가 산을 이야기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정당성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p343)』


내일에 대한, 내 미래에 달성될 어떤 목표에 대한 막연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믿음과 그 과정에서 겪는 무수히 많은 고통의 쓴 맛이 자연스레 어우러짐으로써, 특히나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임으로써 좀더 나은 내일을, 꿀맛 같은 성취(완성)를 맛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걸을 수밖에 없다. 험준한 산세에 아찔해져도 우리는 걸어야한다. 발이 부르트고 비 오듯 오는 땀 때문에 탈진을 하게 되더라도 잠시 쉬어갈 뿐 절대 포기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정당성이란 결코 심오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내가 겪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은 불평등 불공평이 아닌, 정상에 대한 갈증과 소망으로부터 내려지는 가혹하지만 분명 정당한 고통, 그런 정당방위일 뿐일지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목표한 것을 포기하거나 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최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이정표일지 모른다. 이 이정표에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성취, 성공, 완성이라는 단물을 보람차게 마시게 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 한다고 느끼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최고의 희열을 맛 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슬픔’을 당당하게 ‘기쁨’으로 대치시켜 슬픔으로써 정체된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해나가는 그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과 과정을 잇고 유지하는 건 바로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순수하고 강인한 의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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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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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를 처음 접했던 건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그 무렵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수업을 들었으며, 종종 이 책에 대해 잘 안다고(?)하는 녀석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또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내게 그런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분이 계셨던 것 같다. 충분히 곱지 않은 그런 시선이랄까.  


그때 당시 나는 헌책방이라는 곳에 눈을 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니면서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들에 대한 뜻 모를 집착에 휩싸였던 것 같다. <실락원>이나 <설국> 역시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들고 다닌다는 바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뭔가 의미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통해 느낀 점이랄까. 그것은 철저한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줄거리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금이지만, 분명 그것은 상실이었던 것 같다. 이해 능력이 부족했던 내가 그 상실의 무게를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또한 읽고 나서 도무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한 것 역시 그의 책이 상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동안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전철에 타자마자 승객 수를 헤아리고, 계단 수를 전부 세고, 시간만 나면 맥박 수를 셌다. ······(중략)······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p90~p91)』 

 

그렇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확신이랄까, 어떤 이미지를 타인들에게 각인시키고자했던,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꽤나 진지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정당한 행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집보다 소설책이 더 좋았던 그 때. 더군다나 <상실의 시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락원>, <설국> 등을 오직 ‘들고만’ 다니면서 아마도 그것을 죄다 이해하는 척, 적어도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너네와는 다른 ‘나’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너희와 같이 그런 구속적인 일상을 살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아주 조금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뭔가를 전하려고 일탈적인 행동(일명 고답적으로까지 보이는 책들과 야자시간에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드는 행동 등)을 서슴지 않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콧방귀를 뀌듯, 그렇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난 진실로 관심 받았다기보다, 한낱 소란쟁이로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 그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아직도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 자체가 상실의 한 자락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 종종 하긴 한다. 하지만 ‘군중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외톨이가 아닐까 싶다.  


무엇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상실해가는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그 상실감에 빠져, 군중들 속에서 마치 전혀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전혀 문제없다는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나, 우리, 사람들. 어쩌면 ‘바람의 노래’란 상실에 대한 메시지라기보다 ‘나’의 존재에 대한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죽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아남은 우리는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 자신은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p94)』  


릴케와 이상 그리고 기형도는 영원히 젊은, 그런 산소(?)같은 시인이 아닐까. 이 시인들이 멋진 이유는 그들의 시를 읽은 후, 되물어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과 그 시를 애독하는 독자들 사이의 단절이랄까. 때론 이런 단절은 이처럼 멋진 것, 영원히 젊을 수 없는 우리를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젊은 애독자로 정체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여.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자네는 다정하지만 뭐랄까,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뭐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p105)』

김영하의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고,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랬다.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시선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니 똥 굵다는 표정으로, 애송이 같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조금 삐뚤어지게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내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밀을 너무 빨리 알려고 덤벼드는 그런 애송이, 젊은 피라서. 그렇게 생각하고픈 나 자신이 때론 너무나도 재수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썩소 한 방 날리고 여유로운 윙크 살짝 보태며 애써 당당한 척,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p143)』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 뿐인지도 모른다. 순간이란 눈 깜짝할 그런 순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혹은 그 순간순간을 붙잡을 수도 거기에 매달릴 수도 없다. 거기엔 어떤 손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스치듯 지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애써 기억하는 척, 붙잡고 있는 척 그런 착각 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순간을 기억하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상실 한 조각을 물고 있을 따름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늘 상실의 안은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청춘이든 노년이든 간에 어느 시절에나 내가 존재하는 순간, 내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상실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실이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스치듯 그렇게 지나치는 상실의 조각들을 자신도 모른 채 수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상실을 채워가는 게 삶의 여정이라면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곳을 뭐라 불러야 할까. 어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생에 처음으로 가장 마음이 편안한, 그런 상태가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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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Mr. Know 세계문학 24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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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 중 유독 소설(문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월등하게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이 갖는 특유의 모호성이랄까, 그런 매력 때문일지라. 세상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은, 지배당한 적 없는 무한의 영역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력(魔力) 때문에 소설은 늘 내가 동경해마지않는, 마치 소도(蘇塗)와 같은 안식을 가능케 한다. 이 안식이란 일명 ‘도피처’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정체된 시·공간적 개념(도피처)이 아닌 뭔가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차원(안식)으로서 기능한다고 할까. 


나는 종종, 감히 도전한다. 그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이 ‘안식의 땅’에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가하면, 경계도 불분명하고 어떤 표식도 없는 그 땅에 내 멋대로 선을 긋는다. 또한 오만하거나 혹은 어리석게도 이정표를 세우기도 한다. 늘 그 안식의 땅을 동경하면서도 내 멋대로 난도질하고픈, 끝끝내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가장한 욕망에 휘말리기 일쑤다.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매듭을 풀려는 젊은 날의 객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 안식의 땅 이면에는 끝간데없는 ‘욕망의 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율배반의 땅’이 뻗치는 유혹의 손길은 쉽사리 물리치기 힘든 그 무엇이다. 그 손길에 단 한 번이라도 매료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이율배반의 땅으로 가는 것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설령, 불구덩이 속을 지나야한대도 기필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 뿐이다. 더 깊이 빠져들수록 그 ‘땅’이 뿜어내는 숨결에 자지러지고 말 것을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때 묻지 않은 그 안에 들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그곳, 그 땅에서 펼쳐지는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내뿜는 오묘함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중의 유혹이며, 우리 스스로에게 내면의 상실을 강요한다. 


앞서 말한 것들은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소설(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라는 완성(?)된 유형(有形)의 틀에 내재되어 있는 소설에 대한 지극히 감상적인 궤변에 가깝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탄생한 소설이라는 세계와의 짧은 대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제임스 미치너의《소설》은 개인적 혹은 단편적이거나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는 성격이 아니다. 소설(문학 혹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역사가 이룩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출발점을 소설이 탄생(출판)한 시점이 아닌 소설의 ‘태곳적’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네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 네 계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탄생시켜나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그네들의 피땀 어린 노력들을 상기시켜 준다. 예컨대, 다분히 작가 혼자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해낸 결과물(원고)을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수정(다분히 교정·교열에 해당하는)해서 인쇄되어 나온다는 식으로, 비교적 간단한 과정만을 인지하는 독자층을 각성하게 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책을 손에 쥐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호간의 교류와 반복, 수정, 좌절, 거부, 합의 등의 긴 과정을 거치는지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전사(前史)를 꼼꼼히 되짚어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는 ‘경고메시지’처럼 들린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이 물음을 가벼이 보고 섣불리 해답을 이끌어내려 덤벼드는 많은 사람들(소설과 조금이라도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혹은 나를 포함해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들이랄까)에게 진중한 해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일종의 ‘절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소설》은 앞서 자행한, 소설에 대한 내 어리석고 어설픈 감상에 가차 없이 ‘옐로카드(Yellow-card)’로 응징한다. 


《소설》은 작가의 끊임없는 변신과 창조에 대한 노력, 사물 혹은 한 토막의 이야기나 어떤 사건에 대한 유의미한 집착으로 얻어지는 창작의 원동력, 편집자와의 관계 및 균형, 비평가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수렴해 더욱 공고히 자신의 소설을 재탄생·재완성해 나가려는 의지, 독자들의 피드백과 소통을 통한 만족감, 늘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마음가짐을 통한 자기 독려 등을 보여준다. 또 편집자로서의 역할, 좋은 원고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느낌이 좋은 어떠한 원고를 훌륭한 소설로 탄생·완성할 수 있는 역량 및 가치관, 작가와 함께 원고를 다듬으며 보다 더 좋은 원고를 탄생시키겠다는 투철한 의지와 끈기, 출판의 사후대책·처리 및 마케팅, 시대와 시류에 대한 감각 및 그에 적합한 출판물을 내놓을 수 있는 탁월한 기획력과 판단력 등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명확한 관점을 가진 비평가로서의 자질 및 가치관의 순수성, 비평가임과 동시에 작가의 역량을 내재하고 있음으로써 겪는 심적·이성적 딜레마들, 또 다른 측면에서 엿보이는 작가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조력자로서 비평가의 면모를 그려내고 있으며, 독자의 역할과 작가의 명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경고, 작가의 소유물로써, 그 연장선상에 작품을 두고 가치판단을 하는 오류에 대해, 하나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빛과 그림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통찰력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럼,《소설》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서 한참을 생각했다. 작품 속 작가가 말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는 무엇이고, 편집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또 비평가와 독자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각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정리하려고 많은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내 기억력의 한계인지 능력의 부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각자 어떤 정의(해답)를 내리고 있는지 정리할 수 없었다. 다만, 엉뚱하게도 이 네 계층이 생각하는 소설에 대한 정의라는 게 결국,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의 생각(정의)을 교류하고 협력하는 과정 속에 해답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처음부터 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로서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네 계층이 서로의 생각을 조합·수정·보완해나가는 그 과정 속에, 어쩌면 그 과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가 아닐까싶다고 말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소설 혹은 소설에 대한 정의는 생각과 생각, 관점과 관점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형성(생성)되고 소멸하는 게 아닐까. 이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소설은 언제까지나 진화하고, 그에 따른 소설의 정의 또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 소설은 진화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 또한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정체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설의 진화와 ‘무한반복의 생성과 소멸’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욕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는 한, 소설은 절대 인간의 손에 잡히지도, 쉬이 정복당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율배반의 모순된 감정과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땅, 그곳에서 피어나는 무수히 많은 오묘한 세계들, 안식에 대한 욕망과 정복하고자하는 욕망이 쉼 없이 달음질치는 또 다른 ‘미지의 현실세계’, 인간의 욕망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또 하나의 세계, 확장과 확장을 거듭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영역 등이 바로 ‘소설이다!’가 아닌, 인간이 소유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소설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소설》‘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답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도전을 통해서 기필코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욕망 저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열정을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소설》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과연, 소설은 누구의 손에 의해 완성되며, 그 끝은 어떤 것 혹은 무엇인가?’라는 내 의문이 소멸된 것만 같다. 의문의 가치가 있고 없고의 차원에서의 소멸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미지의 땅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내가 품은 의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기분은 마치《오래된 미래》의 라다크를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광활한 툰드라를 품은 채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땅 알래스카까지 집어 삼키려다가 딱! 걸린 기분이랄까. 아무 생각도 없이 들풀을 짓밟고, 아름다운 꽃을 나만 볼 수 있게 꺾어 집안 화병에 꽂아두려다가 문득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하달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꼭 그런 안타까움에 휩싸인 듯한, 그런 잠 못 이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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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너의 <소설>이군요.. 90년대 초반이었던가요, 동네 서점에 미리 신청을 해놨다가 며칠 기다린 끝에 마침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땐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 읽곤 했었는데... 암튼 당시에는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작가와 평론가(젊은 천재로 그려졌었죠 아마)에 초점을 맞춰 읽었던 것 같아요. 지금 같아서는 편집자와 독자가 더 재미있게 읽힐 것 같은데 ㅋㅋ 암튼 잘 봤습니다 레인님~^^*

ragpickEr 2010-04-12 21:53   좋아요 0 | URL
덧글이 너무 늦었네요..^^*;;요즘 이렇듯 정신이 없네요..
여러 관점들이 흥미롭기도 했고 다시금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지요..^^*
고맙습니다..

까까~ 2010-02-08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조만간 레인의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그 모호한 세계를 탐독할 기회를 주시게~나에겐 좀 어려우니 좀 쉽게 풀어줬음 좋겠어. ^^

ragpickEr 2010-04-12 21:54   좋아요 0 | URL
후훗..^^*;; 댓글이 늦었군..ㅋㅋ
나의 소설이라..ㅋㅋ 아마...그럴 일은 없지..않을까..? ^^*
 
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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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수능대비모의고사 수리영역의 평균점수는 달력 한 장을 채운 날수에도 못 미쳤다. 80점 만점에 20점을 넘긴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이기에(물론 수능시험 당일에는 준비해간 연필이 영험靈驗한 능력을 발휘하며 잘 굴러주어서 생에 처음으로 60점을 넘기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수학이나 수리영역의 ‘수’자만 봐도 꼴 뵈기 싫었다.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는 내가 그토록 꼴 뵈기 싫어했던 학문의 길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히로나카 헤이스케라는 유명한 수학자이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받은 저자는 어릴 적부터 수학에 대한 남다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수학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단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살던 평범한 학생이, 그것도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수학에 발을 들여놓게 되다니.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보기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즐거움》은 이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가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나를 이 위치에까지 오르게 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고나 할까. 다분히 자신의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는 특별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치’에 관한 것들이다. 


『갓난아이가 유아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시기가 있는가 하면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시기도 있다. 부모가 예쁠 때만 아이를 키우고 밉다고 하여 키우는 것을 포기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출발 시점의 모습이 설령 갓난아이와 같이 유치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키워 가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아이들 다 키워 놓고서야 사회에 대한 그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물건도 만들어 놓고 보지 않으면 그 실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p91)』 


창조? 일단 뭐 밑천이 있어야 창조를 하든지 오그리든지 할 것 아닌가.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말하는 창조의 밑천은 배움이다. 인간은 항시 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뭔가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분석하며 끝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분명 시시각각 배움의 길 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좀 엉뚱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이런 배움의 길에 서 있는 ‘나’‘발견’ 혹은 ‘의식화’하는 것이 창조의 밑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가. 세상에 이로운 걸 창조해야 할 것이고, 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창조해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창조의 그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들이 좀 어설프다고, 유치하다고, 보잘것없다고 하면 어떤가.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것, 충분히 스스로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통합되어 창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지 무엇을 배운다고 해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이 필요하다.(p124~p125)』 

 

 

그럼 어떻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미련스럽게, 차근차근 그렇게. 단, 즐겁게. 배움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도 필요한 자명한 것들이다. 누구나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렇게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 가능성으로 남겨두느냐,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루한 싸움에 첫 발을 들여놓느냐의 차이랄까. 


『지금까지 나는 나의 연구 태도 혹은 생활 태도로서 우선 사실을 그대로 파악할 것, 가설을 세울 것, 대상을 분석할 것, 그래도 길이 막혔을 때는 대국을 볼 것, 이상 네 가지를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더 나아가 사고하거나 창조할 때는 단순 명쾌하게 되도록 노력할 것을 중시하고 있다.(p136)』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저자처럼 나름의 과정이 없다. 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기 일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다보면 어느새 엉뚱한 물음을 잡고 있는 나를 본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려는 생각은 강하지만 늘 삼천포로 빠진다. 저자가 말하는 원칙대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 어떤 문제나 물음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p153)』 


남들이 보기에는 내 삶이 좀 고달프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가끔 서글플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누구나 삶이라는 것 자체에서 느낄 법한 그런 허무함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내 처지를 사랑하고 인정하며 살아간다. 몸은 ‘아, 고통스럽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조금이나마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겪는 모든 경험들로부터 배운다. 뭔가 깨달았을 때, 그것이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일지라도 흐뭇하다. 마냥 기쁜걸 뭐. 


『느긋하게 기다리고(鈍), 기회를 잡을 행운이 오면(運), 나머지는 끈기(根)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가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p187)』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그중에서도 끈기에 관한 것은 정말 깊게 반성해야함을 느낀다. 나는 좀 끈기가 없다. 아니 아주 많이 없다. 조금 성실한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차진 맛이 없다고 할까. 내 입맛에 맞는 것에는 미련하리만치 달려들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게 느껴질 때는 그냥 맥이 풀려버린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다른 것에 혹한다. 그래서 늘 나는 결과물이 없나보다. 이것저것 벌려놓기만 하고 도무지 수습을 못하니 원. 


『우리에게 앞으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력(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지혜)과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리나 원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어서는 다양성이나 변동에 대처할 수 없다. 변동과 다양성에 대처하기 위한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소심(素心)으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p230)』 


판단력과 생각하는 힘. 어디서 이런 힘을 길러야 할까.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뭐 유별난 책벌레는 못되지만 그래도 독서를 통해 우둔함을 많이 벗은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고, 생각의 중심은 늘 불안하다. 선택의 순간엔 늘 갈팡질팡하며 심장은 늘 두방망이질이다. 언제쯤 나는 주어진 내 삶 앞에 중심을 잘 잡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책 읽기가 나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마냥, 즐겁게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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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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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를 만나게 된 계기는 햇귀님께서 보내주신 영화《NEVER CRY WOLF》덕분이다. 컴퓨터로 영화보기를 시도했지만 ‘수입산’이라 그런지 좀 튕기는(?) 통에 고생을 좀 했다. 또 한글자막이 없음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좌절 덕분에 번역본인《울지 않는 늑대》만난 것이다. 내 극심한 영어울렁증(?) 때문인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영화와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이야기;《NEVER CRY WOLF》】

많은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봤다. 낯선님과 함께 가게에서 한 번, 집에서 여러 번을 보았다. 도서관에서《울지 않는 늑대》를 빌려 읽고서 두어 번 더 영화를 봤다. 어차피 자막은 ‘해독불가’였으므로 없애버리고서 그렇게 영화에 빠져들었다.(어떤 수작(?)으로《NEVER CRY WOLF》한글자막버전과 프랑스어 더빙버전을 구하게 됐다. 자막 없이 몇 번을 보고 번역된 책을 보고 난 후여서 그런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처음 본 영화의 느낌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북극의 광활한 툰드라가 침묵함과 동시에 생동하고 있다는 소소한 증거들을 아주 잘 포착해 보여준다. 늑대는 우리가 늘 주변에서 보아오는 조금 큰 개처럼 친숙했으며, 카리부(순록)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족은 진정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듯했다. 자막이 없어도 느끼는 게 많은 영화다. 

 

늑대에 대한 보고답게 그 습성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일러준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명쾌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존에 늑대로부터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늑대하면 떠오르는 폭력성·잔혹성·비열함 등등의 그 출처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늑대는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살육이 아닌 사냥을 한다. 그것도 건강한 카리부가 아닌 병이 들거나 약한 카리부만 골라서 사냥을 한다. 떠돌이가 아닌 일정한 정착형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사냥하기 어려운 시기에는 쥐를 먹으며 가족을 부양한다(때때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철저하게 지키며, 노총각(?) 노처녀(?) 혹은 홀로된 늑대들을 박대하지 않고 포용하여 화목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모습들을 영화는 아주 상세히 전하고 있다. 

 

대자연의 아름다우면서도 혹독한 환경,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생존의 이치, 내가 사는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장함이 없는,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운 땅. 역시나 가장 포악한 동물은 인간이다. 늑대를 매도한 것도, 그 씨를 말리려고 음흉한 계략을 펼치는 것도 인간이다. 사냥을 가장한 살육게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늑대로 인해 매년 사냥감이 급속히 줄어든다는 허위보고서를 만들어 그 씨를 말리려는 악랄한 인간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늑대 이미지를 여태 왜곡·세뇌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두 장면을 뽑을 수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거대하고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을 헤엄치는 장면이다. 정말 늑대가 병들고 허약한 카리부를 사냥하는지 확인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도 의지지만, 그보다도 그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에서 넋이 빠진 것 마냥, 마치 문명이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였으며 어떻게 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대자연의 품속을 평화롭게 유영하던 태곳적 인류 조상들의 DNA가 주인공에게 스며든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다고나 할까. 


또 하나의 장면은 주인공이 멋진 한방(?)을 날리는 장면이다. 늑대사냥을 하며 오직 돈을 위해 사냥이라는 살육게임을 즐기는 변심한(?) 비행사(주인공을 북극에 내려준)가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기 전, 비행기를 몰고 주인공을 위협하려 달려든다. 이때 주인공은 그놈(?)을 향해 총 한방 날린다. 그렇게 비행기는 거대한 산맥을 휘감아 넘으며 사라진다. 아마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고철덩어리와 함께 대자연의 품으로, 영원히. 


【책이야기;《울지 않는 늑대》】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책을 읽은 덕분인지 영상미(?)를 만끽하며 읽어나갔다. 조금 영화와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같은 모습이었다. 저자인 팔리 모왓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뼈가 있는 문장들에 매료됐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이었으며, 같은 내용이지만 영화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보고였다고 할까. 

 

『눈에 띄지 않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은 편치가 않았다. 그후로도 2주 동안 늑대 한두 마리는 텐트 앞길을 거의 매일 밤 이용했다. 그런데도 기억할 만한 딱 한 번을 빼놓고는 나에 대해서 털끝 만한 관심도 보이지를 않았다.

 이 무렵에 나는 내 이웃인 늑대들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드러난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유목형 떠돌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신 그들은 정착형 동물로서 아주 분명한 경계가 있는 영구 사유지의 주인이었다.(p83)』 


위와 같이, 늑대의 습성에 대해서 이처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늑대에 대한 이미지와는 달리 일정한 경계(영역)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만행(?)을 일삼을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인간이 땅에 대한 맹목적인 지배권과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늑대는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면서 그 이외의 영역을 존중한다. 자연이라는 품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라는 순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살아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는 어떠한가. 오직 ‘내 것’에 대한 탐닉으로 타인들의 삶을 짓밟고 경쟁을 조장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라는 탈을 쓴 덕분에 그나마 체면상의 이유로 에둘러 ‘파괴본능’을 일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이하·동물이하의 추악함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현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더 이상 ‘정착형’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자본은 이미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한술 더 떠서 그 경계너머로 침략·정복의식으로 확장된 건지도 모른다. 늘 일상에, 지역에, 우리나라에 몸은 정착한 채로 살아가지만 이미 의식은 ‘유목형 떠돌이’가 되어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파괴본능으로 똘똘 뭉쳐진 떠돌이로 말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라는 혼인 서약 구절이 인간들에게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늑대에게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다. 늑대는 엄격한 일부일처주의자이다. 비록 내가 이것을 반드시 탄복할 만한 특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사실은 우리가 늑대에게 부여한 무절제한 난잡함이라는 평판이 꽤 위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p94)』 


고착화된 편견이 벗겨지고 그 속에서 위선적이라는 자못 ‘불편한 진실’과 대면한다. 인간 공통의 잣대(그런 게 있다면 혹은 가능하다면)로 문명화된 모든 것들을 평하고 규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지만, 자연에 대한 몰이해와 이런 잣대가 빗어낸 그릇된 어떤 틀을 인간들이 학습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에 대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순리에 대한 몰이해를 다분히 경외 혹은 경탄으로 국한한 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닐는지. 

 

『늑대는 절대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 아마 늑대와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늑대에게는 큰 사냥감 동물을 하나 잡아서 죽이는 일이 힘든 작업이다. 성공하기 위해 밤새 사냥을 하며 일대를 50~60마일씩이나 답파하기도 한다. 늑대에게 이 일은 사업이나 직업 같아서 일단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분한 고기를 얻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쉬고, 사귀고, 노는 데 바치기를 더 좋아한다.(p194~p195)』 


인간이 재미로 하는 것들, 즐기는 것들. 대표적인 게 사냥이 아닐까. 덫을 놓고 총을 준비하며 누구는 재미삼아, 누구는 돈벌이삼아 그런 살육게임을 즐긴다. 만약, 인간이 그만한 돈벌이가 되고 그만한 재미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대답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 상상해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강력한 공공의 적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모든 두려움의 근간은 자연이나 동물들에서 인간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설마’라는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인 믿음을 희망삼아 자신의 의식세계를 허물어뜨리지 않게 버텨내고 참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부분의 몸통에서 남은 것들을 살펴보니 질병이나 심각한 쇠약의 증거가 있더라는 사실이다. 뼈의 기형, 특히 두개골의 괴사(壞死: Necrosis, 생체 세포·조직의 일부가 죽거나 죽어가는 상태 -옮긴이)에 의한 기형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두개골에 달린 이빨이 닳은 정도로 봐서, 순록들이 늙고 병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갓 잡은 몸통을 바로 조사할 수 있는 현장은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은 늑대가 순록을 잡자마자 다가간 경우도 있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뻔뻔스럽게 늑대들을 쉬이 하고 쫓아버리고서 말이다.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겁을 적당히 먹고 물러났다. 이들 순록 중 몇몇은 안팎으로 기생충이 심하게 들끓어서 언제 죽을 줄 모르고 걸어다니는 불쌍한 순회동물원용 짐승 같았다.(p195~p196)』 


팔리 모왓이 전하는 이러한 흥미로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 늑대가 나약하고 병든 카리부를 사냥감으로 택하여 생존해나가며, 그것으로 인해 순록은 건강한 유전자를 유지·발전시키며 생명을 이어가고 진화한다는 보고를 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소설과 에세이의 애매한 경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 책의 사실성에 집착하기보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진실성’만큼은 한 번쯤 더듬어 봐야하지 않나 싶다. 만약 소설로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가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다소 불편한 진실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비로소 드러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염두에 두고 말이다. 


『동쪽 어디선가 늑대가 울었다. 가볍게, 궁금하다는 듯이.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전에 많이 들어본 소리였기 때문이다. 조지였다. 없어진 가족의 대답을 듣기 위해 황야에 울려 퍼뜨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소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조화롭지 못한 역할을 선택하기 전, 한때는 우리의 것이었던 세계. 내가 얼핏 알아보고 거의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 스스로가 외면하고 만 세계에 대한 노래였다.(p233~p234)』 


기나긴 여정의 끝은 씁쓸했다. 늑대 울음은 더 이상 소름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저 편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에게 가족을 빼앗긴 채,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천진하게 가족을 찾는, 평화롭기까지 한 울음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버려버린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각성의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간절한 울음임과 동시에 일상적인 울음이다. 조화로움을 싣고 퍼지는 화해를 청하는 전령임과 동시에 곧 바스락 소멸될지도 모르는 처연한 울음이다. 


누구에게는 마음을 열게 하는 울음이며, 누구에게는 더 굳건하게 마음을 닫게 만들어버리는 울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자세에 달렸고, 언제까지 기다려줄 것인지는 우리 선택의 몫일 것이다. 부디 사라져버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팔리 모왓이 이 책에서 그려낸 늑대는 우리가 그동안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쌓아온 야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다. 한때 인간과 공존했던 늑대는 인간 문명의 탐욕에 희생된 대표적인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늑대에 대한 ‘신화’는 인간 자신의 죄와 비겁의 투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늑대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몰이해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정작 피에 굶주린 야수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이다.(옮긴이의 글 中)』 


인간과 늑대의 이미지가 뒤바뀌어 버린 세상. 그것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간에 문명이라는 미명아래 가득히 들어차있는 탐욕스런 인간들, 제 죄 값을 타인들 혹은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비열한 인간들, 또 겁은 많아서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편견을 학습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약한 인간들, 이해라는 과정을 배제한 채 무조건 빠른 해답·결과를 바라 몰이해를 가장 효율적인 투입요소로 생각하는 비효율적인 인간들. 인간의 각성은 언제쯤 일어나게 될까. 


덧붙이건대, 책의 재질이 어떤 면에서는 조금 아쉽고 실망스럽다. 또 어떤 면에서는 가볍고 나름 분위기도 있다. 페이퍼백 재질이어서 쉽게 닳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양장본으로 깔끔한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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