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뜰에도 상사화가 피고 진다 - 세상 바깥에 은둔한 한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한 소식’
김양수 글.그림 / 바움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가는 사람
오는 사람도 없다.
내가 저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함은
저 길을 따라 걸어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다.

가지 위에 참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외로움(p48)』


저자는 그렇게, 그 ‘누군가’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말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답고 경탄할만한 병풍을 두르고서, 어리숙하고 때가 잔뜩 묻은 도시빈민인 내게 제일 먼저 편안함을 선물했다.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그에게로 가는 길에 흙먼지가 폴폴 날렸지만, 도시의 먼지와 공해보다 훨씬 좋은 맛이었다.

달과 별
새와 고요를 긴 팔로 껴안은
따뜻한 그림 한 폭.
『겨울나무(p42)』


그 아름다운 병풍 속에서 자연스레 발화한 것만 같은, 꼭 그런 느낌으로 충만한 게 그의 작품이다. 꾸밈없고 편안하며, 내가 늘 가보지도 못한 먼 어느 곳을 동경하며 거짓으로 그려 놓은, 훌륭하다고 그저 생각만한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름다운 그 병풍 속에 그려진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작품이며, 폴폴 날리는 흙먼지며 길가에 지려놓은 오줌자국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귀뚜라미 달 갉아 먹는 소리인 듯
창문 열었더니
둥근 달이 간 곡 없고
반달 홀로 나무 위에 걸려 있네.
『반달(p64)』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들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생각과 꿈을 갉아먹고 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귀뚜라미나 매미의 울음소리는 늘 성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진정한 아름다운 화폭을 우리는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소한 아름다움조차 알지 못하면서 진정한 미(美)의 가치를 논하느라 ‘귀뚜라미 달 갉아 먹’듯 허허로운 시간이 우리를 갉아 먹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 아닐는지.

안개 속에
점 하나 찍었다.

살아서 움직인다.
『새(p74)』


저자의 감수성은 이렇듯 세밀하다. 나는 늘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그 안개 너머로부터 불안을 떠안은 채 오로지 그 너머의 것만을 보려고 애쓰고 지레짐작하기에 급급하다. 나와 안개가 함께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는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다. 구태여 그 너머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불안이나 환희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떨어진 감은
나비들의 몫이고

달려 있는 감은
까치들의 몫이다.

생의 한 길가에 선
나는 누구의 몫인가.
『감(p68)』


한참을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그저 노니는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다 툭하고 떨어진 채 으깨진 ‘감’과 맞닥뜨렸다. 그리곤 아직도 세월 모르고 달려 있는 ‘까치들의 몫’을 올려다보았다. ‘생의 한 길가에’서 마주친 그 ‘감’은 화두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보다 더 근원적이고 겸손한 화두였다. 진정 ‘나는 누구의 몫인가.’

잎도 나무를 떠나고
열매도 가지를 떠나고
철새들도 떠날 채비 서두르는 길.

진초록의 강인함도
결실의 풍요로움도
보금자리의 따스함도
털어내는 저 자유로움.

늦은 가을
늦깎이로 홀로 서서
세월을 주워 담는다.
『늦은 가을(p76)』


가을은 늘 내게 풍요로움과 때마침 아름다운 그런 계절이었다. 모든 걸 비워내고 털어내는 ‘자유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종 늦가을이 주는 을씨년스러움과 허무함과 같은 감정은 만나보았지만, 이처럼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늦가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세월, 어떻게 그 세월을 주워 담느냐는 것으로부터 내 봄은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꽃도 사람인 양
봄이면 잎이 올라와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여름이면 꽃이 피어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목 놓아 흐느끼다 지쳐 잠드니
바람도 멈춰서서 울고 가는 밤.
『상사화(p131)』


나는 도시에 살면서 이 도시라는 경계 너머에 있을, 아니 저 멀리 밀려나버린 땅을 종종 그려본다. 도시에 비한다면 그 처량한 땅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그 땅을 처량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불손한 생각일지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 숭고한 땅으로 갈 용기가 없음에 나는 감히 ‘처량한 땅’이라는 연민을 품으며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에 불과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그 처량한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연을 따라 산다는 것은
순리를 따라 산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인연은 우리에게 옵니다.

무엇을 사랑한다고 이름 짓지 않고
무엇이 내 것이다 집 지어놓지 않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인연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어떤 것들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연(p158)』


인연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인연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삶이라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인연의 꼬리를 쫓아 그것을 쥐려했던, 지금도 그렇게 어리석은 헛수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 인연이라는 것을 탄탄한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가둬두고 빗장을 단단히 채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거리삼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늘 내 관심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내가 익히 알고 충분히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 이외의 것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만을 한 채로 말이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임을 몰랐던 것이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도시라는 화려하지만 도를 지나친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소리를 덮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네가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비 오던 날(p161)』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눈과 비가 외진 이 곳에서 비는 내 님이요, 그립다 지쳐버려도 맹렬히 사랑할 존재랄까. 내 마음속에 핀 상사화는 비를 향한 내 그리움을 양분으로 피고 진다. ‘모든 소리를 덮’고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내 마음속 상사화는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내 님을 맞는다. 오롯이 내 님과 단 둘만의 시간까지 허락되는 날이면, 나는 정신줄을 놓고 흠뻑 취하고 또 젖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내 님은 맑아오는 날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다시금 내 마음속 상사화는 그 오롯했던 만남을 양분으로 다음을 기약한 채 여전히 촉촉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 끝에 향기가 난다.
오시려나, 내 고운 님.
『예감(p192)』


어떤 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비’일수도 있고 어느 계절일수도 있다. 하물며 내가 기다리는 버스일수도 있고, 아련한 첫사랑과의 조우를 예감할 수도 있다. 어떤 예감이건 간에 그 속에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엉뚱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늘 혹은 종종 어떠한 예감에 사로잡힌다면, 굳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현실에 투영될 것이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진실로 바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도, 예감할 수도 없는 게 아닐는지. 바라고 바라는 그 마음속에는 사랑과 더불어 고마움도 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감정들이 잠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 수 없는 그 오묘한 예감 속에는 우리들의 모든 감정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의 작품 속은 단아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전혀 꾸밈도 가식도 없는, 때론 거친 보리밥을 씹는 듯했지만 그만큼 정겹고도 아련한 감정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쾨쾨한 도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병풍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꼭 만나리라는 열망의 씨앗이 심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씨앗이 내 마음속에 뿌려졌다면, 아마도 그것은 ‘상사화’가 될 운명의 씨앗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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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췌~말이지~~본 글보다 레인님의 사유가 더 멋지니, 이런 리뷰는 추천받아 마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