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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에 난해한 소설은 아니었다. 책이 그다지 두껍지도 않고 문장이 어렵지도 않아 술술 잘 넘어가는 책. 문제는 이야기의 전개가 아주 특이하다는 것이다.
음, 일단은 겉표지에 '에쿠니 가오리의 실연을 담은 소설'이라기에 헤어짐의 고통 등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다. 소설의 첫장도 여주인공인 리카가 같이 살던 남자친구 다케오로부터 이사해야겠다는 고백을 들으며 시작되니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야기가 영 이상해진다. 다케오는 친구를 마중하러 나간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하나코에게 반해 리카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코는 머물 곳이 없다며 리카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하고, 하나코 역시 집세문제와 다케오를 계속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참으로 이상한 전개 아닌가. 게다가 리카는 처음부터 하나코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살면서 그녀의 존재감에 의지하게 된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나코의 행각은 점점 더 기기묘묘해져서, 10년이나 지속된 연인사이를 깨놓고도 다케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리카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도 하고, 제멋대로 다른 남자와 어울리기도 하고, 리카의 항공권으로 홍콩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까지 한다.
처음엔 리카와 다케오의 이별이 소설의 주제려니 생각했으나 읽어나가면서 하나코의 이상한 행각이 소설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리카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모든 사건의 핵심에는 하나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하나코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하나코를 사이에 두고 다케오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던 리카도 하나코의 죽음을 계기로 다케오와의 관계를 마감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의 실연은 표면적으로는 리카가 다케오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서 사랑받은 하나코가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속박받고 싶지 않아 죽음을 택하는 것이 진짜 이별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다만, 하나코가 모두를 버린 것인지 하나코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하나코를 버린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나코 스스로 자유롭고 싶어 죽음을 택했지만, 하나코에게 의지했던 남은 이들은 하나코의 죽음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참으로 묘한 소설이었다. 읽으면서는 뭐 이런 인간들이 다있어 생각하며 다케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리카가, 하나코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다케오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하나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닥 현실감 있는 인물들이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인간관계의 공허함 같은게 느껴진다. 10년씩이나 사랑했어도 그 사랑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마음으로 의지한 친구도 떠나버려 결국 혼자 남게 되는. 혼자 그 감정을 모두 마무리하게 되는. 실은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하루키'라고 불린다더니 소설속에 특정 음료수 이름이 매번 등장하는 것이나, 음식이나 의상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묘사가 여지없이 하루키를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하루키와 전혀 다른 색깔이다. '여자 하루키'라는 표현은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잘못 오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하나코의 작은 발, 작은 얼굴, 갸냘픈 다리가 무지무지 부러웠다. 소설속의 여주인공이 아름답지 않을 그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슈렉에서 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동화속의 여주인공이 아름답지 않다면 너무 실망스럽다고 했었다. 모든 고난을 다 이겨내고도 아름다워질 수 없다면 너무 김빠지지 않느냐고. 과연 그런가. 하나코의 다리가 두꺼웠다면, 발이 넙적했다면, 아무래도 모두로부터 사랑받기는 어려웠을까.
군더더기가 길어지지만, 번역작가의 어이없는 실수를 꼭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글쎄 책을 다 읽고 나서 후기를 읽는데, 후기 맨끝에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다케오가 아니라 겐코라는 것이다. 처음에 다케오로 한자를 잘못 읽었고, 그 이미지가 굳어버려 나중에 실수를 깨닫고도 어색하고 생소하여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배신당한 기분! 작가 후기 맨끝에 단 몇줄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실수가 아닌가 싶다. 나 또한 똑같이 그의 이미지가 다케오로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번역이란 원작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하는데, 실수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는 사실은 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소설의 감상을 망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