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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낚시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평점 :
누구든지 자기소개서나 입회원서를 작성할 때 취미란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딱히 즐겨하는 것도 없는 사람에게 취미가 무엇입니까하고 누군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보통은 만만한 독서나 영화감상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늘 운동과 영화감상을 적었었다.
요즈음엔 각종 영화잡지며 영화관련 TV 프로그램 덕분에 누구나 영화 비평가가 되어 꽤 어려운 이야기도 늘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영화는 단순히 취미란을 메꾸는 적당한 유희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된 듯도 하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이야기로 영화를 해부하는 건 질색이다. 전문인들끼리 전문분야의 지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면 모를까 대중을 대상으로 어려운 얘기하는 건 싫다. 물론 나도 새로 개봉된 영화를 선택할 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비평가의 평을 참조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야후 영화란에 실린 보통사람들의 솔직담백한 평을 더 즐긴다.
내게 영화는 누군가의 인생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인생에 빠져들고, 영화를 보고 나서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게 영화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전문적이지 않으며 영화 내용 자체에 충실한 김영하의 영화감상문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김영하가 바라본 영화속 인생, 영화와 관련된 그의 인생을 엿보며 내가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들, 잠시 잊고 있었던 이전에 보았던 영화에 대한 추억들을 마음 따뜻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
책에는 18편의 영화감상문이 실려 있는데, 난 그중에서도 인터뷰감식법이란 제목이 붙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에 대한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글에서 그는 권력있는 자의 질문의 폭력성을 지적하는데, 난 글을 읽으며, 신경질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못하면 멍청하다고 윽박지르던 대학시절 교수를 생각했다. 어디 그뿐이랴. 학창시절 겪었던 부적절한 질문의 예는 수없이 많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인데, 당시에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서워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한번 되물어보지도 못했다. 새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외에도 영화 대부에 대한 글도 좋았다. 나는 대부 시리즈를 참 좋아해서 여러번 보았는데, 볼 때 마다 뭔가 찡하면서도 그게 뭔지를 잘 몰랐었다. 그런데 김영하가 대부가 보여주는 세계가 우리 모두가 사는 바로 여기, 이 세상이라잖는가. 아 그랬구나, 매일 그렇게 살지 말하야지 하면서 결국은 시덥지 않은 일상을 반복하는 내 모습이 바로 원치않던 보스 역할을 맡아 형제에게 총을 쏘아대던 마이클의 모습이구나. 알 수 없는 찡한 감정에 대한 해답이 풀리면서 한동안 보지 않았던 대부 시리즈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봤던 영화에 대한 김영하의 솜씨 좋은 감상문을 읽으며, 그 추억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한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어느새 당신은 비디오 가게에서 신프로 코너를 기웃거리는 대신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주인장에게 대부 시리즈 있어요 하고 묻게 될 것이다. 구프로는 추억에 덤으로, 500원 할인된 가격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