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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딱 한번 쉬는 토요일, 원래 양떼 목장에 갈까 하다가 이런저런 연유로 취소가 된 후 아침부터 어디론가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밀리는 길에 나서 차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아 서울근교 단풍 구경할 만한 곳을 찾다보니 남한산성이 눈에 띈다. 어렸을 적 가보긴 했지만 기억이 거의 없고, 단풍이 좋다하길래 얼른 결정하고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달려 남한산성에 도착. 등산객,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아침이지만 산성앞 주차장은 이미 꽉 찼다. 솔직히 남한산성의 첫인상은 실망이었다. 도심사람들에게 유원지로 알려져 있다더니 산성입구에는 온통 음식점이다. 도심을 떠나 좀 한적한 맛을 즐기고자 일부러 여기까지 왔건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두 산성을 따라 걸어야겠길래 간략한 지도를 보고 길을 정해 걷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은 규모가 꽤 커서 하루만에 산성을 다 돌아볼 순 없었다. 서문으로 올라가 북문으로 내려오는 코스. 길고 긴 음식점들을 지나고 나니 한적한 숲길이 나온다. 나무냄새도 나고, 기분이 괜찮았다.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기대했던 단풍은 없다. 아직 단풍이 들기엔 이른건가? 한참을 올라 정상에 다다라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단풍이 없는게 당연했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단풍지대가 아니라 노송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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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단풍 보겠다고 찾아와서 저 넓고 넓은 단풍지대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노송지대를 걷다니. 원망은 당연히 남편에게 향한다. 나 아니면 남편밖에 없으니까. 정상에서 목을 빼고 단풍지대를 바라보니 아직 단풍이 많이 들진 않았다. 그나마 위안을 삼으며 성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전경이 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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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SBS차량이 많이 눈에 띈다. 서동요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는 모양이다. 말도 여러마리 구경하고, 여기저기 널부러져 잠이 든 병사로 분장한 엑스트라들도 구경하고, 제법 안면이 있는 탤런트도 볼 수 있었다. 혹시 이보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촬영장쪽으로 가자고 남편을 졸랐으나 남편이 혼자 가란다.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한산성에서는 전투장면만 찍었단다. 다행이다. 이보영은 어차피 남한산성에는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을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지라 거의 다 내려왔을 때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식당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렵다. 누가 인터넷에 차 많이 주차되어 있고 사람많은 식당으로 가라길래 그런 식당을 하나 골랐는데 마침 대를 이어 하는 집이란다. 한옥에 방이 칸칸으로 나뉘어져 한칸을 독차지 한채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호기롭게 들어가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앗차 싶었다. 산채정식 1인분이 만 육천원! 둘이면 삼만 이천원이다. 그렇다고 돌아나갈 용기도 없어 그냥 눌러 앉아 산채정식 2인분을 시켰다. 그래도 값이 있는데 괜찮게 나오겠지 했는데, 잔뜩 기대를 가지고 기다린 밥상은 실망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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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하다. 동태전, 닭볶음, 녹두전 두 쪽을 빼면 전부 풀이다. 그나마 몇 가지 되지도 않고, 전과 닭고기는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이런걸 보고 바가지라고 하는거 겠지. 눈물을 머금고, 독채에서 밥먹는 값이려니 위로하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앞으로 절대 남한산성에서는 밥을 사먹지 않으리라.
밥을 먹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늘어졌다. 삼만 이천원을 카드로 계산하고, 쓰린 발걸음을 돌려 서울로 향했다. 2시가 조금 지난 시간. 옆에서 졸면 운전하는 사람도 졸릴까봐 참아야지 생각했지만 언제나처럼 생각만 하고 남한산성을 떠나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고개가 아파 몇번 뒤척거렸다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바로 집앞이다. 여러가지로 아쉬움 많고, 바가지도 썼지만, 편안히 걸으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남한산성을 꼭 다시 한번 찾을 것이다. 그 땐 꼭 단풍지대로 가고, 도시락도 싸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