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후 맞이한 연휴.
무얼하며 지내야할지, 어디를 가야할지 토요일 오후부터 안절부절 못하다가 순전히 충동적으로 경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경주에 가면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걸 가을이 가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충동적으로 여행을 계획하지는 않는 바,
숙소를 정하려고 알아보니 왠만한 호텔, 펜션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숙소때문에 포기해야 하는건가 싶어 낙담하고 있을 때 관광안내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경주관광호텔. 관광호텔이란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일단 전화를 해보니 방이 있단다.
얼른 예약을 하고, 출발은 다음날 아침 일찍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대충 아침먹고 경주로 출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중 갈등하다가 그냥 경부고속도로를 선택했다.
선택이 탁월했던지라 한 차례의 막힘도 없이 달리고 달려 콧노래를 부르며 경주에 5시간만에 도착했다.
인터체인지를 지나 드디어 경주시로 진입했는데, 나즈막하고 조용한 경주의 분위기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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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보문관광단지 쪽으로 가서 호텔을 확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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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져리한 호텔들 사이에 너무나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는 관광호텔. 저곳에 머물러야 할지 경주여행 자체에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하고, 인터넷에서 미리 조사해간 음식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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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덕분인지 사람들은 유명한 음식점을 잘도 알고 온다. 다른 집은 그저 그런데 이 집만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도 조금 기다리니 앉을 수 있었고, 주문하고 나서도 조금 기다리니 음식이 나온다. 멧돌순두부집에 갔으니 당연히 순두부 찌개와 그냥 순두부를 먹었다. 그냥 순두부도 고소했고, 순두부 찌개도 맵거나 짜지 않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함께 나오는 반찬도 맛있다.
점심을 먹고 호텔 숙소를 다시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 자주 오는 여행도 아닌데 조금 무리하더라도 보문호수 쪽으로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자보자. 현대호텔에 들어갔더니 방이있긴 한데 19만 8천원이란다. 조금 무리치고는 좀 너무한걸. 다음 호텔로 가자. 조선호텔에 들어갔더니 아예 방이 스위트룸 밖에 없단다. 아무리 무리를 해도 스위트룸은 과하지. 신혼여행도 아니고. 다른 호텔에 더 가볼까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관광호텔로 결론을 지었다. 어차피 잠자러 온 것도 아니고 늦게까지 놀다 잠만 자면 그 뿐 아닌가. 마음을 가볍게 먹고 호텔로 들어갔는데, 아.... 그 우중충함에 이상한 냄새까지. 8만 5천원치고는 너무하다 싶었으나 별 수 없었다.
얼른 짐만 부려놓고 다시 호텔을 출발 맞은편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둘이 타는 자전거를 빌렸다. 처음엔 혼자 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 실력으로는 무리다 싶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구나. 들뜬 마음으로 자전거 하이킹 고적답사를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보문을 출발 분황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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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에서 분황사 석탑을 보았다. 신라 선덕여왕때 세워졌고, 현존하는 신라석탑 가운데 최고 걸작품이란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9층 이었다고 하나 지금의 모습은 일제시대 3층 구조로 수리된 것으로 원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분황사에서 분황사 석탑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볼게 없다. 분황사를 나와 바로 건너편 황룡사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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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말 그래도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 원래 궁을 새로 지으려고 했던 곳이었는데,
황룡이 나타나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궁을 지으려고 했었기 때문인지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인지 정말 그 터가 넓다. 황룡사는 몽고가 침략했을 터 불에 타버렸고, 그 때 유명한 황룡사지 9층 목탑도 함께 불타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석조로 건물을 지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천년전 신라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을텐데.
황룡사터를 거닐다가 짝짓기에 몰입중인 나비 한 마리를 잡았다. 설마 잡히랴 싶었는데, 정신이 없었는지 쉽게 잡혔다.
이제 황룡사터를 확인했으니 다음 목적지 첨성대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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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때 세워진 첨성대는 천문관측대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라고 한다. 중간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사람이 들어가 사다리로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갔다고 하는데, 아무리 쳐다봐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무리 옛날이라지만 겨우 저 정도 높이에서 별을 관찰했다는게 이상하다. 그냥 땅바닥에서 보는 거랑 별로 다를 바가 없을거 같다. 그리고 사람이 들나들었다는 구멍도 이상하다. 굳이 저렇게 어중간한 위치에 만들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냥 밑에 뚫어놨다면 손쉽게 드나들었을 터인데. 설명에 의하면 일단 저 사다리를 놓고 저 구멍으로 들어가 다시 또 사다리를 놓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단 얘기다.
우리는 첨성대를 천문관측대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제단, 기념물, 불교건축물들 어러 가지 설과 이견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양 최초의 천문관측대라는 설명은 과연 정확한 것인가?
아무래도 내가 보기엔 다른 설과 이견쪽이 최초라는 말에 그냥 묻혀버린게 아닌가 싶다.
궁금증만 더하는 첨성대는 지금 동북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맨날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그 기능이 무엇이었든간에 오랜 세월을 묵묵히 한 자리에 서 있는 돌무더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첨성대를 뒤로하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 안압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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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경주에 왔었다. 다른 건 별로 기억나지 않는데 밤에 들렀던 안압지의 모습만은 유독 뚜렷이 맘속에 남아 있어 꼭 안압지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찾은 안압지는 그 때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낮에 와서 일까, 아니면 과거의 기억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낮에 찾았기 때문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압지는 우리의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최고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월지라고 한다. 동궁에서 바라보면 안압지의 연못에 달이 아름답게 비추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호수에 비치는 달의 모습을 보지 못한게 마냥 안타까웠다. 6학년 때 호수에 달이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마음에도 밤에 본 안압지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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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온 이상 고분들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분들이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 앙증맞다. 그냥 작은 구릉처럼 자연의 일부인듯 자연스럽다. 천마총도 확인하려고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갔는데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다. 10분쯤 기다리다 도저히 줄이 줄어들지 않는데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비도 한두방울 뿌려 천마총을 뒤로 하고 오늘의 고적답사의 마지막 코스를 마무리지었다.
이제 다시 보문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다보니 주변의 황금들판이 너무 아름답다. 경주는 거의 관광과 벼농사로 돌아가는 듯 여기저기 너른 논이 펼쳐져 있어, 사뭇 관광지 같다가도 금세 농촌길을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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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페달을 밟고 밟아 장장 6시간만에 자전거 하이킹을 끝냈다. 이렇게 긴 시간 자전거를 잘 타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리 훌륭히 마무리 지으니 뭔가 해낸듯 뿌듯했다. 하이킹 코스가 중간중간 끊기기도 하고 보문으로 돌아올 때는 오르막길에 자전거를 끌기도 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고 모두에게 꼭 경주에 가서 자전거 하이킹을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숙소로 돌아가니 제법 많은 차가 호텔마당에 주차되어 있다. 그 우중충한 호텔에 우리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맘이 좀 즐거워졌다. 얼른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느껴진다. 차를 타고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되짚어, 저녁을 먹고 경주의 그 유명한 황남빵을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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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경주빵이라고 알고 있는 팥소가 가득 들어간 작은 빵의 원조는 이 황남빵이다. 이 집은 체인점이 없어 오직 이 곳에서만 황남빵을 구입할 수 있다. 난 미리 조사를 해 갔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마총 정문 근처에서 또 경주 곳곳에서 비슷하게 생긴 경주빵을 사 간다. 그 사람들을 보며 원조집을 찾아가는 맘이 얼마나 뿌듯했던지. 천마총 후문 황남동에 위치한 황남빵가게에 가니 사람들로, 차로 가게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엄청나게 넓은 매장 가득 사람들이 팥소를 쌓아놓고 열심히 빵을 만들고 있다. 빵을 주문하니 40분이 넘어야 빵이 나온다고 한다. 주문만 해두고 기다리는 동안 저녁을 먹고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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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찾아간 곳은 숙영식당. 역시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었다. 마침 황남빵가게 근처에 있어서 더욱 좋았다. 역시 사람이 많은지라 조금 기다렸다 들어가 찰보리밥 정식과 논고동 무침을 시켰다. 논고동 무침은 원래 동동주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차가 있어서 남편이 술을 마실 수 없어 그냥 밥 반찬으로 먹었다. 그냥 소라처럼 쫄깃쫄깃했고, 양념은 골뱅이 무침 비슷해서 그리 별다르지 않았다. 찰보리밥 정식은 여러 야채에 찰보리밥을 넣고 된장찌개를 넣어 비벼먹었는데, 배가 고파서였는지 모르지만 정말 맛있었다.
밥을 먹고 빵을 찾아 숙소로 돌아오는데 황남빵 냄새가 차 안에 그윽했다. 도저히 뭔가를 더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지만 그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한입 베어물었다. 처음엔 뭐 이게 그냥 팥빵 비슷하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팥소가 달콤한데도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고 이상하게 자꾸만 먹고 싶어진다. 먹다가 한번에 다 먹어버릴까봐 서울로 돌아와서는 하루에 갯수를 정해놓고 먹고 있다.
밥을 먹고 돌아와 잠깐 보문호를 산책했다. 가족단위 여행객들로 보문호는 시끌벅적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씻고 바로 잠을 청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내일은 토함산에 해뜨는 걸 보러갈 예정이었다. 5시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