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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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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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논하는 일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인식이 최근들어 상식처럼 굳어지고 있는 것 같다. 상식이란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상식의 대부분은 규제와 관련되므로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페미니즘의 사양길을 상식이라고 규정하는 일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독자의 평소 상식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일단 나의 상식선에서는 그렇다라고만 말해둔다.

한 때 페미니즘 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이들이 한껏 인용했던 이들 중 '시몬느 드 보봐르'와 '한나 아렌트'는 익숙한 이름이다. 전자는 샤르트르의 연인으로서 그리고 '제2의 성'의 작가로 유명하다. 후자는 '이스라엘의 아이히만'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다. 그녀들은 언제나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죽을때까지 자유로웠다. 수전 손택은 반전운동으로 유명하며, 섹슈얼리즘으로도 뭐 누구 못지 않게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인터뷰에 응하는 그녀의 태도는 권위와는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이었다. 전문적인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만남은 이토록 명료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인터뷰 내용을 만들어내는구나 싶어 한편 놀랐다. 내가 읽어본 인터뷰 글 중 가장 뛰어났다. 조너선 콧은 그녀에 대해 굉장히 자세히 그리고 깊이 알고 있었고, 수전 손택은 조너선에 대해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 살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고, 열 세살 때 만, 카프카 등을 섭렵했다는 수전 손택은 분명 언어영재임이 틀림없다. 그녀는 타고난 사상가이자 작가다. 글쓰는 작업이 무척 어려웠다는 것은 그만큼 완벽을 기하고자 하는 그녀의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어에 익숙해서 그녀의 책을 모두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주 잠시.....(it's impossible)

 엄마가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앉아서 읽은 책이다. 제목에 쓴 세 사람의 저서를 비교 분석하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임파서블 투 미....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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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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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앞에 (2016-OO)이라고 연번을 붙이는 까닭은 올해 나의 독서 목표와 관련이 있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이상 올해 2월 22일자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결코 명석하다고 볼 수 없는 나의 지적 수준으로 박사까지 했으면 인간 승리에 해당한다...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아울러 이 이상 바라는 일은 인간의 양심에 어긋난 일이며, 상식을 벗어나는 일탈행위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도 확신한다. 따라서 내가 앞으로 더이상 아카데미즘을 기웃거리며 어딘가에 발 한짝 쑤셔넣어볼까..혹은 새끼손가락 손톱 정도 걸쳐볼까...하는 짓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그들만으로도 벅차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교롭게 이 책을 읽은 후로 이런 나의 생각은 더 굳어졌다. 지은이인 '309동 1201호'님은 국어국문학 전공인 것으로 보인다. 얼마전에 존폐 위기에 몰렸던 그런 과다. 도대체가 취업이 잘 안되는 과이고, 정체성도....좀 그렇다. 왜냐하면 언어학과, 문예창작과, 국어교육학과, 한국어학과 등이 국어국문과의 역할을 조금씩 나눠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 과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일반인들은 궁금해한다. 이들이 들으면 천지가 개벽하고, 세종대왕이 진노할 망언이지만 대학 평가를 취업률로 따지는 시대적 흐름을 감안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뭐...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이들의 취업은 신문방송학과나 문헌정보학과 등과 견줄만하다.

 여전히 신춘문예가 성황이고,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주목받는 우리나라이지만 '문예창작과'가 등장한 이후 국문과의 위상은 위태로워졌다.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튼 문예창작과 출신이 글을 쓰면, 국문과 출신이 평론해주는 형태로 큰 줄기가 잡혀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창과 출신이 평론도 못쓰리란 법이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나마 국문과가 힘을 쓰고 있는 분야는 학술대회와 같은 아카데미즘이다. 문창과 친구들도 논문이란 것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작품을 책으로 묶어 내놓는 형태로 학위를 받는다. 그렇다면 저널에 발표되는 글쓰기와 동떨어진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희미한 옛 그림자처럼 추억하고자 하지만 학술적 글쓰기는 정말이지 무미건조하며, 비인간적이고, 쓸데없이 규범이 많고, 지나치게 논리적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 어체를 따라갈 수가 없다. 교수들이 이상한 그들만의 어투로 말하는 까닭은 모두 그 저널에 기고하는 논문들 때문이다. 의사들이 의료용어로 대화하듯 교수들은 그들의 언어가 있다. 생활인들과 접촉하지 않는 편이 그들의 글쓰기에 유리하다. 말이 꼬이기 때문이다.

 '309동 1201호'는 야심차게 글쓰기를 시작했고, 글도 야무지게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연애 이야기는 철저히 제외되어 있어 사생활과 글쓰기를 연관짓지 않는구나...음...다시 말하자면 이 글은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 자신이 속해있는 어떤 집단을 대표해서 쓰고 있는 것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글에 대해 쏟아지는 관심과 비난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다...라고 생각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리 명석하지 않다. 따라서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만했지 이것이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실제적으로 이런 것을 누구와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이야기한다한들 대답해 줄 사람도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다)

 '309동 1201호'는 사회학을 했다면 더 잘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학자는 일단 경계에 있어야 한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입장이라는 것이 딱 그 경계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09동 1201호'는 아카데미즘과 그 밖의 이야기를 잘 엮어 나가고 그 자신은 아카데미즘에 당연히 속해야 하는 사람으로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굉장히 날카롭게 비난한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기를 포기할 의지는 없다. 그냥 이 바닥이 이렇게 더럽구나....에이 씨팔 못해먹겠네...하면서 다른 일을 찾기보다 그냥 거기 있는다. (최근 신문기사를 읽으니 그가 시간강사도 그만 뒀다고 하던데 여튼 이 지면은 오로지 이 책에 대한 리뷰이므로...)

 마르크스의 이론은 노동자와 자본가로 대표되는 사회구조론으로 설명된다. 사회가 구성되고 돌아가는데 작용하는 복잡한 매커니즘을 대단히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논리가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현재는 아니다. '309동 1201호'의 논리도 조금은 다른 시선에서 고쳐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더 상황이 나은 시간강사들을 만나보고, 혹은 더 상황이 나쁜 시간강사들을 만나보고 그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면 더 힘을 갖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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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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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장님이신 우한용 교수님께서 주신 책이다. 논문과 관련이 있다고 직접 챙겨주셨다. 어렵사리 퇴고를 마친 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다. 생각보다 쉽게 책장이 넘어갔지만 내용은 깊은 사유가 후폭풍처럼 몰아칠 것을 예고했다.
재능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향이 천재의 탄생에 깊이 관여한다는 그의 주장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하는데 독서를 통해 구원받은 케이스로 여겨졌다. 그도 나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교수님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헤아리며 천천히 재독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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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62
루쉰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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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문호라면 루쉰이 떠오른다. 공자와 맹자, 노자, 순자 등 역대 사상가 등이 지금까지도 동양권 국가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대문호가 탄생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에 해당하는 일이 늘 그렇듯 루쉰의 인생도 그리 평탄해보이진 않는다. 아Q정전은 인상깊게 읽었다. 풍자적인 것과 세밀한 묘사 등이 그 당시의 글이라고 보기에 힘들만큼 세련되고 정돈되고 견고하고 훌륭하다. 흡입력도 정말 추리소설 못지 않게 굉장하다. 물론 중간중간 길고 흥미롭게 끌고 갈 수 있는 부분에서 다소 의아한 설명하기로 마무리 지은 곳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감안하면 거의 문제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여겨진다.

공산당이 중국을 변혁하던 그 시기의 아Q가 어떻게 처신하며 살았는지...이념의 본질들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사회가 변혁되고 있었으며 기존의 파렴치한들이 또 어떤식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갔는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즈쥔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자전적 소설인 듯 한데....마음이 아프면서도...뭐랄까 그 쓸쓸함이 여기까지 밀려오는 것 같아서 참기 힘들었다. 현진건의 소설을 읽는 것도 같았고, 평생 원고지를 머리 위에 쌓아두고서 글을 쓰는 것이 소원이라던 채만식을 보는 것도 같았다. 루쉰은 결국 중국의 대문호로서 그리고 중국인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성공적인 삶으로 마무리했다. 가난과 편견과 박해 속에서도 그가 그런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유전자 속의 귀족의 피....뭐 그런게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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