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사랑하느냐고 묻거든 - 우리 시대 시인 57인이 노래한 사랑의 신작시 ㅣ 문학사상 테마시집 1
김남조.고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제일 마음에 든 시 한 편 옮겨 놓는다.
허허
김 근
혹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어젰밤 어두운 벌판에서 베었던 수많은
꽃모가지들 아무리 칼을 놀려 베어도 잘린 자리에 끝없이 돋아 피던
그 밤의 꽃들이 실은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간밤엔 마른 바람의 불거
진 등뼈가 휘두른 칼끝에 만져졌다 칼날의 한쪽으로만 달이 뜨고 지고
등뼈를 다친 바람이 떨어진 꽃모가지들 위에서 한번 휘청거렸으나
그것은 시간의 일 한 백 년쯤 나는 또 꽃을 베듯 그대를 베었을지도
모를 일 그 한 백년쯤 나는 또 꽃을 베듯 그대를 베었을지도 모를 일
달도 지고 뜨지 않는 칼날의 한쪽이 챙, 짧고 낮게 울었다 낭자한
세월인 그대 지난밤 벌판에서는 벌거숭이로 낯선 짐승 한 마리가
실은 꽃을 쥐어뜯으며 먹고 먹다 토하고 토하고 다시 먹고 하였던 것인데
정녕, 아니었나 몰라, 그 붉음이, 실은, 그대가, 자꾸 부스러지는 공기의
지층 위 그대라는 달콤하고 슬픈 종족이 새겨놓은 희미한 암각화에
홀려 나도 짐승도 꽃모가지도 바람도 벌판도 가득 붉어지지는 않았는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