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거의 다 읽어간다. 아시다시피 에밀 아자르는 유령 작가이다.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가였는데 은둔 작가로 매우 유명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를 도대체 몇 번 반복해서 읽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은 안개 같다는 것이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분명 내 책장에 꽂혀있고 그리고 여러번 읽은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읽은 것 같긴하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시 자기 앞의 생으로 가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주인공 모하메드는 창녀의 아들로써 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엄마도 모르는 판에 아빠는 말할 필요도 없다. 로자 아줌마는 전직 창녀로써 쉰에 접어들자 그 일을 그만두고 창녀의 아들들을 도맡아 키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 소설에는 유난히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모두가 다 혼자 산다. 모하메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하밀 할아버지도 혼자다. 4층에 사는 프랑스 할아버지도 혼자다. 이삿짐 일을 하는 4형제는 조금 예외지만 동성애자인 5층 아줌마도 트랜스젠더인지라 입양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모든게 비정상적이라서 비정상이 정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소설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혼자서 늙어가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집성촌도 있었고, 친인척도 꽤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고 농경사회에서는 어쩔수없이 서로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 그렇게 혼자 쓸쓸히 비참한 지경으로 죽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굶어죽을 걱정은 없었다는 말이다. 마을이 그 노인을 혼자 놔두지 않았다. 노인을 공경했다. 노인의 지혜는 어찌되었든 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노인들의 지혜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나 가족간에 트러블이 생겼을 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 말고는 거의 쓸모가 없다. 농사일로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시스템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농사일이 되었다. 결국 노인은 잉여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더더욱 심각해지고, 깊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옆 집에서 그 누군가가 죽어나간다해도 이 사회는 너무 정신이 없고 바쁘기 때문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그보다는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가족을 위해 무슨 돈벌이라도 해야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쉽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 고급 문화도 접해야한다.  

노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디까지 사회가 함께해야할 것인가? 철저히 소외된 자기 앞의 생들의 노인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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