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나의 남편이(그 당시엔 예비 신랑)이 나의 일기장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 일기장은 사적인 영역이므로 읽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읽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나의 남편은 그 일기장을 읽고 충격을 받아 결혼을 파기하려고 했었다.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마음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었다.
나는 상식 밖의 생각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한다. 혼자서 소설도 많이 쓴다. 사람들이 '설마...'하는 일들을 나는 자주 상상하고 때로는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추진력 있다' '기발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싸가지 없다'라고 뭉뚱그려져 평가된다. 욕망과 열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한편으로는 본능에 충실하고, 한편으로는 명예를 드높이는데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드라마틱 그 자체이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나처럼 살 것 같진 않기에 '사는거 뭐 별거 있어?'라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든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가슴 속에 숨기며 살아야하냐는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로는 제대로 내 마음을 담아 일기를 써 본 일이 없다. 살아가다보면 불만스러운 것도 있고, 짜증나는 것도 있고, 부화나는 일이 있어 터뜨리고 싶은데 나는 그러면 안된다고 나의 외로운 남편이 못을 박아놓았다. 나는 대한민국 표준 아내이자 엄마여야하며 오히려 더 분발하여 다른이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 거듭나야한다.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나는 실실 잘 웃는 편이고 굽실대기를 잘 한다. 인사를 할 때도 90도로 하는 편이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도 많이 한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고마워하는가 아닌가는 둘째 문제이고 아무튼 나는 그렇다. 나는 내 천성이 곱고 착해서(?) 이런줄 알았는데 얼마전 읽은 책에서 가만히 살펴보니 '기회주의'성향을 가감없이 내뿜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실실 웃고 다니는 일, 공과 사를 잘 구분못하고 좋은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일도 그렇게 처리하는 일이 나의 기회주의성향 때문이라니....
아침마다 유민이 유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 만나는 정훈이 아버님이 계시다. 어찌나 인상이 무서운지 처음엔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안녕하세요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검은색 양복에 너무 말끔히 차려입은 모습만 봐서 무슨 검사나 판사 정도는 되는 줄 알았다. 얼굴은 KBS 주말연속극 '결혼해주세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생겼다. 아들은 참 예쁘던데...정훈이는 엄마를 닮았나보다. 어쨌든 중요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아버님의 태도이다. 전혀 웃지를 않는다. 그런데 정훈이한테는 참 상냥하게 말한다. 너무 깜짝 놀랐다. 화만 낼 것 같았는데 자상하게 이런저런 말도 걸어주고, 예뻐해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안그런다. 선생님들에게도 말 한마디가 없다. 이런....그러니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며 깍듯하게 대한다. 나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실없는 소리 했다가는 된통 무안당할게 불보듯 뻔하니 그냥 가만히 예의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근거없는 호의도 거절당할게 뻔하니 도리대로 이치대로 하는 수 밖에 없다. 아마 직장내에서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예상컨데 그 사람 책상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정돈 되어있을 것이며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감일을 지키는 철두철미함을 지키고 설사 급한 사정에 의해 못하게 되면 전혀 비굴한 모습 없이 당당하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못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