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방구석 중독자'인 나는 오늘도 방구석을 사수했다. 명절이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터라 어디 나갈 일도 없고, 성묘는 사람 밀리는 날짜 피해 주말에 가곤 하기 때문에 추석 온종일 집 안에만 있었다. 아이들도 어려서 모처럼만에 애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최영미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시인이자 미술사학자이다. '시대의 우울'이란 책에 반해서 그녀의 책은 모두 사서 읽었는데 최근 발간한 소설은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 책도 성공적이라고 본인 스스로 평하고 있어 놀랍기도 했다. 내가 읽어봤을텐 아니었는데 여하튼 평론계에서 후한 점수를 준 듯 하다.
어쨌든 이 책은 그녀가 여행을 하는동안 보고 느낀 점들을 적어놓은 글이다.역시 서울대 미술사학과 출신의 엘리트, 이 시대의 주목할만한 시인으로 선정된 전적이 있는 감각적인 시인인 저자가 쓴 글인만큼 수준은 괜찮았다. 문제는 글을 쓰는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의 글 속에서 권태가 묻어져 나왔다. 글을 쓰고 싶어서 쓴 게 아니라 무슨 이유가 되었든 어쩔 수 없는 피치못할 사정에 의해 의무적으로 써나갔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더 문제인 것은 글 속에도 어느정도 그런 그녀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메모를하지 않아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느니...마음내키는대로 온종일 호텔에만 있었다느니...마치 그녀가 갈겨쓴 종이조각을 비루하게 읽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럼에도 글의 내용이 훌륭했다는 점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유명해져도 절대...절대...이런 식으로 책을 내진 않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고마운 책이다. 전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 책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다름아닌 그녀의 태도라고 보면 된다. 알고보면 세상은 꽤 정직하다. 명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