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이라. 90년대 초였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책을 통해 대구에 오래된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당시 소설을 읽고 난 후, 대구에 들르면 꼭 한번 찾아봐야지 마음먹었으나 어쩌다 보니 못 가게 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세기 말 언저리에 조카랑 작심을 하고 한번 찾아 갔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간 그날은 무지 더운 날이었는데 <녹향>은 여느 찻집과 달리 시원하지가 않았다. 후덥지근한데다 음악마저 묵직하고 비장미가 느껴지는 곡을 틀어놓으니 휴식은커녕 심장의 압박을 느꼈다. 하여 후루룩 주스를 급하게 마시고 30분쯤 앉아 있다가 나왔다.

 

'아무리 고색창연해도 자주 찾기는 글쎄...'하며 <녹향>을 잊었다. 그렇게 쭉 잊고 살았는데 지난 5월 중순쯤 신문을 읽다가 잊었던 <녹향>이라는 두 단어를 보게 되었다. 사연인즉, 녹향을 살리기 위하여 음악가들이 녹향에서 연주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엥? <녹향>이 아직 살아있었단 말인가?'

 

잊고 살았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거늘 그 땅값 비싼 도심 한복판에서 녹향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말인가. 심히 놀라웠으며 갑자기 호감이 급상승 했다. 녹향에서는 <아티스트 녹향으로 가다>라는 주제로 6월 한 달과 7월 초순까지 총 18회에 걸쳐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녹향 살리기 '음악 바자회'인 것이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다 가고 싶었지만 거리와 시간을 핑계 대며 일단 피아니스트 강충모씨와 첼리스트 정명화씨의 일정에 예약했다. 그런 다음 강충모씨의 회차 때 나 혼자 가서 분위기를 살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되는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아이들이 지루해해서 음악회 분위기를 망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결론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첼리스트 정명화씨와 함께 한  날인 지난 6월 22일 아이들을 데리고 일지 감치 녹향을 찾았다. 정명화씨는 다음날 부산에서 연주회가 있어 부산을 가던 길에 어렵게 시간을 낸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소중한 옛것을 너무도 쉽게 갈아 업고 새 건물을 지어올리곤 하는데 이 녹향은 지금 이대로 낡은 이대로, 그대로 보존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실은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녹향은 대한민국 제1호 고전음악 감상실이라는 것이었다. 1946년 이창수 옹이 처음 문을 열었다는데 올해가 2010년이니 만 6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당시 20대 초반에 녹향을 열었던 이창수 할아버지는 팔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녹향을 지키고 계셨다. 

 

<아티스트 녹향으로 가다>는 이제 4번 밖에 남지 않았다. 7월 2일 신상준(바이올리니스트), 3일 주영위(국악지휘자), 5일 은희천(바이올리니스트), 9일 이승호(플루티스트)씨가 녹향의 밤을 꾸민다(저녁 7시30분~9시 T.621-3301).

 

대구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방문해 보시기를. 역사가 느껴지는, 64년이라는 시간 동안 녹향을 고스란히 지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는 현대의 음향기기가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향기가 묻어났다. 

 

<녹향>. 음악의 고향 <녹향>. 오래도록 존재했으면 좋겠다.

 


첼리스트 정명화

오늘은 나와 동생과 엄마가 버스를 타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구 어딘가에 있다는 녹향을 찾아갔다.

 

동성아트홀 앞에서 외사촌 누나를 만나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드디어 들어갔다. 아니.... 출입구가 가로 1미터 될까 말까 정도에 출입구가 시작부터 마음을 더욱더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너무 좁았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이 지루한 시간도 도통 흘러갈 생각을 안했다. 시간이 흘러 첼리스트 정명화라는 소리와 함께 어디서 많이 본 동네 슈퍼에서 만난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의 50대 아줌마가 등장하였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정명화 선생님이었다. 나와 동생 그리고 앞좌석 유치원 애들 빼고 고막이 터지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도 책에서 보던 정트리오 중의 한사람이 이런 작은 녹향에서 연주를 하러 왔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직접 듣지 못하고 라디오(시디의 착오)녹음된 것을 계속 들었으나 막판에 어떤 아저씨의 질문으로 직접 첼로를 켜게 되었다. 난 머가 먼질 잘 모르겠다. 그 연주가 끝나고 사인 받고 사진 찍었다.

 

나와 동생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좋아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유명한 사람을 이 내 두 눈으로 보아서 이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초등 5년생 큰애의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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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3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4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는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봉하마을엘 갔다. 역시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우리처럼 기차타고 간 사람들이야
괜찮았지만 자가용으로 온 사람들은 참 그 자가용이 불편해 보였다. 두발로 걸으면 되는 우리로선 살짝 미안해지기 까지 했다.

두고 내릴수도 없고 앞으로 가지지도 않고... 그렇게 한번 고생하면 두번다시 차 가지고는 오지 않으리, 확실한 체험이 될까. ㅋㅋ

마산에 사는 친구가 조만간 봉하에 간다는 말을 며칠전에 했기에 혹시 봉하에서 극적 상봉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문자를 보내니,

'안그래도 오늘 갈려고 했는데 갑자기 신랑에게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못 갔어.'
'다음에 오더라도 차는 꼭! 놔 두고  기차타고 오길 바래. 차들이 너무 엉킨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한가할때. 가지 뭐.'

'한가라굽쇼? 앞으론 아예 한가할 시절이 없을 것 같아. 그냥 기차를 이용해서 빨리 왔다 가.'
'그 정도야?'
'그렇다니깐. 예전에 비해 묘역도 정비되고 추모관이며 기념품을 살수 있는 곳도 있고
봉하막걸리, 파전, 매밀국수 등 요기할 곳도 있으니.. '

이처럼 봉하마을은 이제 추모의 장소이기도 하면서 또 우리들 마음의 쉼터도 되는 것 같았다.
다른 관광지와 다른 점이라면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국수를 먹으면서도 파전을 찢으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한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것이다.^^

글쎄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한번씩 봉하에 발자국을 찍고 나면 이땅의 민주주의도 완성되지 않을까.
난 그럴것이라 믿는다. 다만 시간의 문제 일뿐. 시간의 문제라 해도 어느 하 세월은 아닐것이다.
......
그건 그렇고..
지방선거 결과 앞에서 난 여러번 굴욕을 당했다. 뭐, 당해 싸기도 하고..ㅋㅋ
'아니, 정말 대구 사람들 왜그래?'
'정말, 대구는 구제 불능인가봐.'
'어떻게 그렇게 몰표를 주니?.'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러게 말야. 미안해. 쪽팔려 죽겠다.'

그러나 이 쪽팔림도 머잖아 끝나기는 할것이다. 내가 사는, 대구 인근의 시인 우리 지역에서
두명의 비례대표 시의원중 한사람은 민주노동당이 차지하였다. 무소속 마저도 속을 까보면
한나라당과 동색인 이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시의원이라 환영인가 싶어 눈비비고 다시 봤다.ㅋㅋ..

정말 맞았다.^^

내 생각은 바람의 사나이 유시민이 시장도 말고 대구 지역구 의원도 말고 대구에서
'구청장'을 하면서 대구 사람들 마음을 좀 녹여 주었으면...  한번도 변화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유시민이라도 대구에서 단번에 시장이나 의원을 먹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구청장 이라면 단번에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보다 규모가 작은 구청장일 하면서 다른 구 사람들에게 냄새를 솔솔 풍기는 것이다.

'야~~ 00구 구청장으로 유시민이 당선되더니 완전 동네가 바뀌었다데. 울 나라에서 제일 모범적인
구라며 구민들의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더라. 우리도 00구로 이사갈까?'   정도 되면 대구의 여타 구청장들도
변화하지 않을까. 그렇게 밑바닥을 다지다 보면 대구 사람들도

'박근혜는 그냥 좋고 유시민은 왠지 싸가지 없어 보였는데 알고보니 정반댈세.
합리적이고 소탈하고 능력있고 문화감각있고.....'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뭐, 어디 까지나 내생각~~우좌간 대구 경북은 변화가 필요한데 다른 지역사람들이 다들 '버린 듯' 하다. 우물안에 사는 사람들의 나름의 자부심도 예전 같지 않은듯. 뭔지 모르겠지만 부끄럽고..  

'어, 세상이 왜 우리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거야. 예전엔 부산도 같이 가서 당당했는데 이젠 우리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타 도시들은 왜 저러지? 정말 우리가 틀린 것일까. 우린 정말 좋은 의미의 보수아닌 그냥 '꼴 보수'였던 거니? 어마 그런거야? 난 몰라. ' 조
금씩 껍질이 깨질락 말락 하는 느낌 이랄까...

본론은 펌글 인데 서론이 길었다. 나도 이번 선거는 노무현의 성공이라 본다. 사람들이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은 노무현 얼굴 보고 준 것이다. 더불어 민주노동당의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였다고나.^^
그럼 즐감하시길~~ 
  


성공한 노무현    

김동렬



노무현 대통령이 이겼다. 이제 누구도 님을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님의 자서전에는 실패를 언급하며 자책하고 있지만 그건 다른 의미다. 그것은 ‘지성인 노무현’의 관점에서 이 나라 지식인 그룹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나는 그것이 님의 본심은 아니라고 본다. 지식인 노무현 외에 또다른 노무현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 노무현이 진짜 정체성이다.

성공이나 실패를 논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 관점이다. 역사기록자 입장에서는 역사에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박정희나 이명박이 도로 닦고 운하 만들었댔자 그딴걸로 역사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지식인이 역사를 기록함은 그냥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지능을 형성할 목적인 것이며 인류집단지능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가로 판단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인류집단지능에의 기여가 진짜 성공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기록자인 지식인집단이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는 키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식인 집단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 집단에게 배반당한 님은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해주는 양심적인 지식인이 이 나라에 열명만 있었어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고 또다른 노무현이 있다. 가슴 밑바닥에 있는 진짜 노무현은 아웃사이더 노무현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웃사이더 출신으로 성공했다. 대통령 당선 자체가 성공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치는 성공모델을 만든 거다. 그리고 이 모델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 나라의 썩은 지식인은 노무현대통령을 실패자로 판정하였지만 그건 2007년 기준이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필자가 예전에 여러번 한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가 왜 최고의 영웅이냐고? 십자군 전쟁으로 아랍의 도서관에 쳐들어가서 책을 뺏어왔더니(암흑시대 게르만족은 글자가 뭔지도 몰랐지.) 많은 책들이 서두를 ‘위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께서는..’.으로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알렉산더 이전에는 유권자 인구 일만명 남짓 도시국가들이 대부분이어서 지식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냥 암기해도 되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통합했기 때문에 갑자기 지식이 처치곤란으로 양적 팽창을 이루어서 다투어 파피루스에 기록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알렉산더로부터 알렉산더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앞으로 모든 일들이 노무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성공이다.

김영삼 이전은 독재정권이므로 논할 바가 없고 김영삼은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다. 상도동계 중에 남은 인물 없다. 이명박도 기업가 출신으로 옆에서 끼어든 외부인물에 불과하다. 박근혜는 근본이 다르고.

결국 김영삼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상도동계는 사라진 것이다. 동교동계라 해서 다를바 없다. 권노갑, 한화갑, 박지원 중에 누가 제대로 살아남았는가? 없다시피 하다. 단 하나 동교동 출신은 아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어느 정도 계승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도 실패한 대통령은 아니다. 인물의 계보는 달라도 역사의 정통성으로 보면 노무현은 김대중의 계승자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다들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정권교체는 당연한 것이고 영구집권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인위적으로 후계자를 당선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성공이냐 실패냐는 그 세력과 정신이 계승되고 있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전인자를 가진 젊은층이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무현그룹은 폐족위기에 몰렸다. 단 하나다. 동원력이 없다는 거다.

열린우리당은 여론조사상으로 많은 지지자를 가졌지만 그들은 투표하지 않았다. 흩어져 있어서 결정적으로 지역구도가 불리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부활했다. 동원력을 보여준 것이다.

민주당 캠프의 배경그림은 원래 녹색인데 이번에는 위로 갈수록 노랗게 변해갔다. 결국 노무현그룹과 민주당세력이 힘을 합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 이번 선거의 의미다.


03113646296_61000020.jpg      [아래는 녹색인데 위로 갈수록 노란색에 가까워지는 배경]


왜? 동원력이 다시 살아났으니까. 이젠 트위터 시대이고 아이폰 시대이다. 노무현세력의 위력은 점점 상승한다.

지난 대선에 한나라당에 진 이유는 딱 하나다.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는 오세훈, 김문수, 이재오가 무슨 인물이냐 쓰레기지 하겠지만 일반 유권자들 중에는 ‘오세훈이 인물은 좋은데 당이 한나라당이라서’.. 이런 소리 하는 사람 꽤 많더라. 기가 차는 일이다.

무슨 뜻인가? 김영삼이 망한 것은 인물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 쓰레기들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세훈, 이명박, 김문수, 이재오, 정몽준, 박근혜 등은 한나라당이 성공적으로 인물을 영입한 경우에 속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외에도 조순, 고건, 진념 등 많은 인물을 발탁했다. 김종필 이인제도 김중권 이종찬도 잡아놓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인물이라곤 정동영 하나 밖에 없어서 진 것이다. 하여간 김대중 대통령 때는 민주당에 인물이 버글버글 했는데 지금은 없다. 찾아봐도 없다.

어쨌든 한나라당에는 오세훈, 이명박, 김문수, 이재오, 정몽준, 박근혜 이렇게 인물이 있는데 우리쪽에는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신공으로 한나라당을 박살냈는데 그게 오히려 그쪽이 세대교체를 성공하는 촉매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쪽은 어어 하는 사이에 인물이 말라버렸다. 게다가 지금은 시민단체에 괜찮은 인물이 있어도 스카웃 할 방법이 없다.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이 전화를 하면 되지만 지금은 정세균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누가 정세균 보고 오겠나?

결국 김영삼은 인물을 키우지 못해서 망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인물을 잘 영입해서 성공했고, 한나라당도 인물을 잘 영입해서 성공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인제 정몽준 등이 이탈하면서 인물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다.

대신 젊은 인물을 키웠고, 그렇게 키운 인물이 이제 막 기지개를 키기 시작했다. 유시민, 한명숙이 낙선했지만 목에 힘 줘도 될 만큼은 선전했고, 이해찬까지 가세하면 공중전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낙관적이다. 이번 선거로 유시민, 한명숙, 김정길은 마지막 검증의 관문을 통과했으며 이해찬도 복귀할 명분이 생겨서 다시 이쪽 진영에 인물이 즐비한 느낌이 되고 있다. 손학규, 노회찬, 심상정 등도 대선에서 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뒷맛이 있으므로 인물이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가 된 것은 그쪽에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김두관은 여러번 낙선했지만 그게 거름이 되었다. 한명숙 유시민은 졌지만 그 투자한 지분은 거름이 되어 축적되어 있다.

유시민, 한명숙이 다 지자체로 가버리면 공중전 전력이 약해져서 앞으로의 선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쁜 것은 아니다. 다음 총선에서 유시민, 한명숙, 이해찬, 김정길이 돌격장을 맡을건 뻔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세력을 키웠고 그 세력이 이번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앞으로 10년 후에는 노무현의 사람들만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많은 인물이 발굴되었다.

정리하자. 성공과 실패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맥락에서 판단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집단지능의 형성에 기여하는데 있고 이를 판정하는 역할은 지식인 집단이며, 2007년 기준으로 지식인 집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실패했다고 판정했고 님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본심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력을 만들었고 그 세력이 이제 뿌리를 내렸으며 앞으로 많은 일들이 노무현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이고 바로 그것이 역사가 입장에서 주목해야 할 인류집단지능이며 역사가들이 성공이라고 기록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그 흐름을 완성시켜 꽃을 피우는가는 우리의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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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의 의미는 무엇보다 지역주의를 깰 가능성이 보였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영남의 노무현과 호남의 김대중, 충청의 김종필이 악수하는 식으로 보스들간에 거래였고 유권자들은 심리적으로 융합하지 않았다. 보스들간의 악수만으로 지역주의가 깨지지는 않는다. 이번에 충청과 강원 경남으로 진출하면서 완전히 다른 판구도가 만들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주의 깨뜨리기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영남에 유시민이 뜨면 호남에도 그만한 인물이 뜨고 둘이 엇비슷해서 어느 쪽도 밀리지 않게 되어야 대세가 모여드는데(구조론의 축과 대칭 원리) 정동영이 딴짓하고 천정배가 뻘짓하고 정세균이 약해서 호남쪽 인물의 부재로 딜이 안된다는 거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송영길이 뜬 것은 그나마 좋은 소식이 되겠다. 옛날에는 노무현+이인제로 김대중과 급을 맞췄고 탄핵때는 노무현 대 정동영으로 급을 맞춰서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었는데 정동영의 급몰락 때문에 급을 맞출 수 없게 되어 우리당이 무너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런 보스 대 보스의 악수가 아니라도 지역주의를 깰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호남에 김대중이 없고 영남이 노무현이 없다. 그러나 사대강과 세종시로 충청에 강원에 경남까지 뿌리가 뻗어서 화학적 융합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거물 보스의 악수가 아니라도 지역주의에 대항하는 대세력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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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지방 선거는 항상 여당이 진다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번에 여당이 패한 것은 천안함 북풍이득과 여론조사 조작이득, 언론장악이득 등 엄청난 화력지원을 고려할 때 그런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참패이며, 천안함 정치이용은 유권자 뇌리에 갚아야 할 가불한 돈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나라당은 실로 그 이상의 패배를 한 것이다.

가불하면 언젠가는 돌려줘야 한다는거 알아야 한다. 열린우리당도 탄핵때 너무 많이 가불해서 썼기 때문에 나중에 두고두고 피를 빨렸다. 돌발상황에 따른 정치이득은 반드시 언젠가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지자체가 원래 야당에 유리한게 아니라 그 이전의 선거에서 누가 지갑을 주웠다고 유권자가 생각하면 그걸 일종의 가불한 돈으로 치고, 지방선거에서 결산하여 돌려받는다는 말이다. 주었던거 다 회수해 간다.

97년에 이인제 때문에 졌다고 생각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결산하자고 해서 민주당이 패배한 것이며, 2002년에는 멍준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불이 되었다고 믿는 한나라당 유권자가 많았고 또 탄핵도 마찬가지다. 이전 선거에 어느 당이 후보단일화 등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을 일으켜 성공하면 다음에는 반드시 진다.

이번에 한나라당은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이겼다. 대선에 이기면 총선에 져야하는데 총선까지 연달아 이긴 것은 이명박이 돌발적으로 가불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졌을까? 간단하다.

지자체 선거가 야당에 유리한 것은 그 이전선거에 패배한 쪽의 대선불복 심리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선불복이 아니다. 이명박은 압도적으로 이겼다. 그렇다면? 결국 이명박의 집요한 삽질이 한나라당 패배의 원인인 것이다.

무엇인가? 김대중 노무현은 100프로 지는 게임에서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뜻에 의해 이겼고 기본적으로 불리한 구도였으며 그러므로 지자체에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반면 이명박은 쉽게 이겼고 기본적으로 유리한 구도였으므로 수평비교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번 승리가 지갑주운거 없이 합종연횡 없이 돌발상황없이(아니 정반대의 돌발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북풍에 역풍은 없었고 오세훈과 김문수는 순전히 김정일 덕분에 되었다고 봄) 순수한 실력으로, 순수한 동원력 대결로 이긴 첫 선거인지도 모른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강원에 이광재를 안배하고 충청에 안희정을 안배하고 경남에 김두관을 안배하고 경북에 유시민을 안배했으며 지역마다 대표인물을 하나씩 키운 장기사업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렇다. 이번에 이긴 이유는 하나다. 노무현대통령이 10년 앞을 내다보고 미리 안배해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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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김두관이 선전했으므로 존재가치는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길이 무소속으로 나왔다면 부산에서도 이겼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 입당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만약 참여당이 밖에서 갈구지 않으면 안에서 동영당이 민주당을 접수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에너지는 항상 밖에서 들어오므로. 정세균은 구조론의 축 역할을 맡아서 대칭을 이룬 참여당과 동영당을 교착시켜 제어하고 있다. 바깥의 참여당을 이용해서 안의 동영을 단속할 수 있다.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도 참여당은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다.


http://gujo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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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6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대구경북은 한마디로 재미없다.
다른동네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낙선하면 어쩌나 애간장이 타들어가기도 한가본데
여기는 엎치락 뒤치락이 없으니 통 흥이 안난다.

때문에 충남 사람들이 부럽다. 이런 후보를 내 손으로 찍을수도 있고 안찍을수도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니~~
딴지 총수의 인터뷰 솜씨도 대단하고 그에 조곤조곤 대답하는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더냐?

평소 나름, 멋있는 사람 미리 알아보는 센스가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 남자에게서는
완전 빗나갔다. 이제사 알아보다니, 장동건 저리가라, 구준표, 강동원 나가놀아라~~
이 분 앞에서는 모두 애송이 일 뿐이다.ㅋㅋ^^

그동안 홀로 그 고독 다 견디고 우뚝 선 만큼 바야흐로 비상할 날만 남은듯~~
하여간, 노무현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멋지다.

현재로선 이 분이 최고~~^^

그럼 즐감하시길~~~






[新뽕빨이너뷰] 안희정을 만나다.





2010.5.20.목요일

딴지총수


오래 전부터 안희정을 만나고 싶었다. 한 초선의원을 20여년을 보좌한 그는, 정작 그 초선의원이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대신 감옥엘 갔다. 출소 후에도 임명직은 물론 선출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내내 낭인이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케이스다.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런 그가 출마했다.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는 2010년 4월 28일 오후 한 시, 국회의사당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여의도 모빌딩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본지에선 총수와 신짱이 출동했고 안희정은 인터뷰 내내 보좌관 배석 없이 혼자 응했다.











사무실은 참 담담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저렴한 집기에 휑한 공간들. 갑자기 10여 년 전, 부산 국회의원 낙선 직후 방문했던 노무현의 사무실이 오버랩 됐다. 그때도 꼭 이런 느낌이었다.










안: 그런데 생각보다 덩치가 꽤 좋으십니다?
총: 생각보다 덩치가 작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요? 사진이 워낙 산적으로 나와서..
안: 어디더라? 그 인터넷 티비...
총: 예. 한겨레 방송.
안: 네. 연세대 심리학 교수가 나온 거.. 그거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총: 하하. 재미 있었죠.
안: 어, 근데 난 그 주제로 계속 가면 교수님 올 해 문 닫을 같다.. 했었죠.
총: 으하하하. 원래 개인적으로 친한 분인데, 사실 정치적인 분은 아니고 평상시 하던 이야기였는데, 정치적이지 않으니까 그런 이야기도 그냥 있는 그대로 했던 거죠. 근데 그 방송이 그 정도 파급이 있을 줄은 예상을 못 한 부분도 있고.. 해서 접었죠.


안: 그래서 그런지 단어나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시더라구요.
총: 정치적 압박을 평소 느껴본 적 없는 분이시다 보니 오히려 평상시 생각대로 한 거죠. 근데 세상이 요즘 그러나요. 하하. 자, 이제 인터뷰를 시작해보죠. 선거 시즌이라 인물 인터뷰를 하는 타이밍이 아니긴 하지만, 딴지일보와는 처음 인터뷰니까 오늘은 인물 인터뷰부터 시작해보죠.
안: 예.


총: 해서...이제 옛날 얘기부터 한 번 가보죠. 고대 운동권 출신 아니십니까?
안: 예.


총: 근데 제가 어디서 보니까 학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써클을 들어가셨더라구요.
안: 예. 제가 그때 대학교를 갈려고 했던 게 학생운동을 해보겠다고 간 거였기 때문에.


총: 아니 근데 그땐 애잖아요. 애. (웃음)
안: 하하. 네. 근데 사실은 난 고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내가 애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어른이라는 생각을 했지. 고등학교 때 제가 학교를 두 번 제적당하고 한 번은 자퇴를 했고. 그렇게 한 2년을 날백수로 놀다가...


총: 검정고시를 보고...
안: 예. 한 번은 80년에 첫 번째로 학교 제적당하고 나서는 시골 가서 농사일 좀 돕다가..
총: 첫 번째 제적은 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 여러 가지 책을 읽었는데, 러시아 혁명사라든지. 그런데 거기 보면 트로츠키가 열 네살, 레닌이 열 여섯 살에 써클에 가입을 해요. 그 브나로드 운동, 민중 속으로, 운동을 위해서. 혁명의 전사로서. 민중과 없는 사람들 같이 좀 살자.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 위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그때 그런 것이 제 이상으로 잡혔던 거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5.18하고 사형 건이 나왔는데, 그때 대전 내에 있는 사회과학서점에서 평천하라고 하는 신문을 만들었어요. 그 평천하 편집장이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고등학생들과 운동에 대해서 논의를 하다가 그 편지가 검열에 걸려가지고 소탕당한 거죠. 근데 나를 이제 잡으러 와 보니까 고등학생이란 말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다음날 학교 교장실로 왔더라구.





총: 그게 고1땐가요?





안: 네. 그런 과정을 통해 대학교 가서 학생운동을 한 번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싶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시험을 봤는데, 정일학원 종합반 한 3개월 다녔어요. 그 입시학원도 뭐 성적 따지고 학원마다 레벨이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아무런 입증할 게 없었으니까...정일학원 원장한테 가서 이만저만한 사정으로 학교 관뒀는데 중학교 성적표 떼어 가지고가서 이만큼 성적은 되니까 수업진도 따라갈 수 있다, 하고 결국 들어갔어요.

그런데 한 4~5개월 다니고 그만 뒀어요.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겠다. 국영수만 하자. 그 짧은 기간에 이거저거 다 손 대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온다. 국영수 150점 만점 맞고 170점 암기과목에서 반타작하고 체력장 20점 맞으면 고대 정도 갈 수 있겠다. 그래가지고 혼자 공부 시작했죠. 그래서 국사는 스물다섯 문제 중에 여섯 문제 맞췄죠.(웃음) 그래서 한 270점 맞아서 고대에 갔죠.





총: 근데 애잖아요. 애. (웃음) 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게 오로지 책이었어요?








안: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웃음) 그러니까 중 3때 박정희 죽었을 때. 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웃음) 그때 이제 주변 반응이나 선배들의 반응이나 이런 걸 보면서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는 건데...


총: 박정희, 저도 초등학교 6학년이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초등학생이 뭘 알아. 그런데도 울고 불도 하는 애들도 있고, 교장이 방송으로 흐느끼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사실 나로선 애들이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하여간 분위기는 그랬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갑자기 민중을 떠 올린다는 건...





안: 중학교 때 제가 존스타인 백 소설이라든가 하는 걸 많이 읽었어요. 대부분 못 사는 민중들에 대한 얘기였고 <분노의 포도> 같은 경우는 공황기 때 노동자들의 삶 이야기 아녜요? 귀농을 했던 미국사회의. 아, 그거 정말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잖아요. 소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랑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못 배우고 어려운 사람과 같이 하려고 했던 그런 정의감. 그런 데서 굉장히 영향을 받았어요.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때 우리 어머님이 계몽사 한국사 이야기 열 두 권 짜리 사줘서 그걸 죽 읽었는데, 그중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게 권력자들의 이야기들. 항상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있는데, 권력만 잡고 나면 그 사람이 또 예전 권력자처럼 되어버리고. 이 쳇바퀴를 어떻게 멈추나. 그걸 참 이해할 수 없고 답을 알 수가 없구나. 답답하구나. 좋은 뜻으로 출마를 했는데 그 사람도 결국 과거 권력자들과 똑 같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누님이 79학번, 형님이 81학번이다 보니 누님과 형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총: 누님, 형님도 운동권이셨고?

안: 예. 누님은 당시 서울 교대 나와서 박형규 목사님이 하시던 일 도우며, 거기서 노동자들  야학 강사였었죠. 야학운동을 했었죠. 노동을 하며.


총: 그럼 기본적으로는 책으로, 스스로 성장한 자생적인 운동권이네요.
안: 에이, 물론 주변에서 다 영향을 받았었겠죠. 근데 어쨌든 주로 그런 프로세스를 통해 저한테 어떤 정의감 같은 거, 옳다는 일을 내가 추구해서 이뤄내겠다는 영웅심...


총: 어릴 때 그런 애들이 대체로 참 재수 없죠.(폭소)

안: 으하하하. 그렇죠. 재수 없는데... 하여튼 그때 저는 옳다 싶으면 막 질러버리는, 어린  놈이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박정희의 죽음이라든지, 70, 80년의 상황, 그리고 그런 책들.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라든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그런 것들이 이제 제가 살았던 농촌마을의 기억들과 결합을 하고. 제가 살았던 곳이 당시 아래 마을은 소작인이 살고 윗마을은 지주 동네였어요.

저의 집은 그래도 중농이었는데 지주 마을의. 춘궁기 때는 소작인 마을이 땅 붙이는 걸로 서로 싸워요. 어렸을 때는 그걸 무심코 봤는데 근데 그게 그런 책들을 보고 나니까 그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아... 그때 그래서 봄에 그렇게 두드려 맞았던 거구나, 그 사람이. 예를 들면 그렇게 어릴 때 기억이 조금 커서 읽고 보고 한 것들과 재조합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 같은 게 성립되기 시작한 거 같아요.


총: 그러니까 정리를 좀 하면 어릴 적 겪은 환경, 소작농의 문제, 조금 커서는 책의 영향 그리고 또 형 누나가 가까운 터울로 영향을 줬고.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써클에 들어간다는 게, 그게 가능한 건가...





안: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운동을 하겠다고 그러면서 교과서를 죄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1학기 마치고 고등학교 그만 다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러던 차에 잡혀서 잘린 거고. 그 어린 시절의 나는 크게 한 판하고 학교를 잘릴 생각이 있었던 거죠. 학교 교육과 일반적인 지식인의 코스로는 난 가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그렇게 딱 한 마디 했거든요. 지식인은 부르조아 계급의 창녀다.





총: 그러니까 어릴 땐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안돼. (폭소) 조또 모르는 상태에서.. (폭소)

안: 으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어쨌든 그렇게 필이 딱 꽂혀 가지고, 어린 놈이 완전 필이 꽂혀서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지~(웃음)








총: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그런 사람들 있죠. 제 생물학적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진지하고....(폭소)

안: 터무니없이 조숙하고.(웃음)


총: 그러면서 어른들의 단어를 벌써 어릴 때 빌려 쓰는. 그런데 말이죠. 이건 제 생각인데 대충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이제 후배들이 생기면 아주 사람을 잡는다 말이죠. 써클에 들어가면 후배가 생길 거 아니에요. 걔네는 갓 대학에 들어와서 이제 막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지 처음으로 배우는 과정에 있는데, 이미 스스로 만땅 의식화된 선배가 씨발, 니네는 왜 그것밖에 안돼!(폭소) 그럼 거기다 대고 반박은 못해요. 후배들이. 논리에서 게임이 안 되니까. 우선 반박은 못하는데. 근데 이게 정서적으로, 몸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거든요.





안: 아니 어떻게 점쟁이 같아요. 어떻게 알았어. (웃음) 제가 그걸 고백했는데, 내 인생의 가장 큰 패배이자, 최초의 패배이자...

총: 후배들 입장에선 재수 없거든 씨바.(폭소)


안: 하하하... 제 가장 큰 스승이 84학번, 1년 후배들이에요. 그 친구들이 나한테 과제를 줬어. 그 친구들 덕분에 내가 배웠죠.
총: 어떤?


안: 안 오는 거야. 애들이. 합숙 시작해야 되는데. 내 딴에는 아, 이제 2학년도 됐고 하니까 나는 이제 후배들을 잘 키울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데, 그래 가지고 후배들을 1학년 때부터 포섭을 해서 조직을 해서 몇 명씩 묶어 놨는데, 1학년 여름방학 돼서 집에 잠깐 인사 좀 하러 갔다 온다고 하던 애들이 안 올라오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게 힘든 거야.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거죠. 그런 상태로 후배들하고 겉돌았어요. 그게 만만찮은 문제죠. 도저히 후배들이랑 가까워지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후배들한테도 좋은 영향을 못 주고.





총: 그게 진짜 골 때리는 거거든요. 선배 말이 틀린 건 아냐. 틀린 건 아닌데, 우리더러 지금 당장 어쩌라는 거냐.. 부터 시작해서 왜 자기들만 그래야 하느냐.. 자기들도 대학생으로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다 그런 게 있는데 왜 지금 당장 모든 걸 버리고 투사가 되어야 하느냐... 반발심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죠.





안: 그때만 해도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가야 되는데 갑자기 가투 나가거나 세미나를 해야 될 때. 그럴 때 정말 힘들거든요. 벌지 않으면 학교 다니기 힘든데.





총: 기본적인 개개인이 처한 당장의 현실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거니까. 지나치게 이념화된 혹은 이상에 미친 선배 하나가 자기를 죄의식을 건드리면서 괴롭히는 거죠. (웃음)
안: 그래요. 그때 기분 아주... 그들한테 철저히 깨지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둘 다 점심을 먹지 못해, 짜장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5분간은 짜장 먹으면서 대화.










총: 그렇게 너무 일찍 진을 빼서 아직도 국회의원 한 번 안 되는 거예요.(폭소) 후루릅쩝쩝.(짜장 먹는 소리) 그러고 나서 그 왜 자살사건. 안희정 하면 제가 아는 키워드 중에 자살사건이 있어요. 남산 끌려갔다 자살미수 사건.





안: 그게 자살사건이라고까지 크게 말할 건 없구요. 87년도에 고대 지하조직 사건으로 들어갔다가 그해 9월에 풀려났는데. 남산터널 입구에서 지하 벙커에 들어가는데.. 난 처음에 거긴 지도 몰랐어요. 들어가자마자 다 벗으라고 그러더니 고무신이랑 군복 딱 던져주더니 입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옷 다 벗었더니 그때부터 발로 걷어차고 난리가 아니더라고. 온 방은 스티로폴로 덮여 있고.





총: 방음용?

안: 죽지 말라고. 그리고 철제책상 딱 하나 있는데 철제책상 모든 모서리에도 고무패킹으로 처리가 되어 있어요. 쪄서 죽지 말라고. 거기서 초반 한 일주일 잠을 안 재웠던가. 사람이 한 일주일을 잠 안 재우고 괴롭히니까 5일째인가 오줌에서 피가 섞여 나옵니다. 노랗지 않고 새빨간 오줌이 나옵디다.


총: 환각도 본다던데.

안: 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당했던 거에 비하면 나는 그렇게 심하게 당했던 게 아니더라고. 몽둥이나 워커발이나 주먹질을 당하는 정도였지. 물고문은 안 했으니까. 근데 그 사이에서 조직이 다 드러나 버렸어요. 조직의 총 책임자중의 하나로서 거의 절망이었죠. 더 이상 이 조직을 지켜야 될 필요성이 깨져버린 거죠. 어찌해야 할까.

버틸만한 어떤 명분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더러 너도 이제는 이름 하나만 불라고 하더라구요. 너도 뭘 하나 협조를 해야 한다고. 이미 조직이 와해된 상태로 절망해서 친구 두 명의 이름을 불었어요. 그러고 나니 정말 죽고 싶었죠. 그래서 혀를 깨물었는데, 당시 제가 젓가락이 통과될 정도로 앞니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이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총: 혀를 깨물었는데.
안: 네. 앞니가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까 이게 혀가 피가 날만큼 꽉 안 물리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혀 양쪽 끄트머리를 깨물었는데, 그냥 피만 나고 말더라고.(폭소)


총: 으하하하... 그럼 더 비참하잖아.(폭소) 근데 이미 조직이 다 드러났는데도 굳이 너도 하나만 대라고 하는 건, 실제 그 이름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 알고 있으니까, 당사자한테 완전한 패배감을 안겨 줄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스스로 무너지고 자괴하라고.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데...





안: 그렇죠. 실제 그 친구들은 그걸로 수배가 되거나 잡히지도 않았어요.
총: 그러니까. 걔들이 그런 짓을 해 온 역사가 한 두 달이 아니잖아요. 선수들이니까. 그리고 본인도 사실은 나이 어릴 때 아닙니까. 그런 거 한 번 겪고 나면 인간적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

안: 실제 제가 스스로 가지고 있던 운동가로써의 자부심이 모두 깨져 버렸죠. 그래서 저녁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어요.
총: 스스로에게 남사스러워서.
안: 예. 수치스러운 거죠. 쪽 팔리고. 수치스럽고.











총: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원기를 회복하셨을까?
안: 아... 갇혀 있는 내내 내가 불었던 친구들이 나를 용서해 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그들과 의절하는 것으로... 어차피 나는 더 이상 남들 앞에서 진지한 척, 멋있는 척 이야기를 하고 그런 인생은 없다. 나는 이제 보조자 역할이나 하는 것이 낫다. 이제 목숨 걸고 싸우는 그런 지도자가 되겠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미...


총: 더렵혀졌다.(웃음)
안: 네. 이제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에 늘 종사하는 사람은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 보조 역할을 하면서 내 인생을 살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리를 했죠.


총: 근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안기부 친구들이 고마워요. 전기를 마련해줬으니까.
안: 그렇죠. 저도 그런 면이 있다 생각해요. 만약에 내게 그때의 패배가 없었다면 아마 저열한 인생이 되었을 거 같아요.
총: 훨씬 재수 없는 인간이 되었을 거예요.(웃음)


안: 하하..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84학번 후배들도 인간적으로 저를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어 준 친구들이죠. 그때 정말로 1년 내내 힘들었었어요. 마치 처녀 총각으로부터 아이를 낳고 진정한 엄마 아빠가 되는 그 환골탈태의 과정에서 엄마아빠들이 다 시행착오를 겪고 힘들어 하잖아요?

그런 과정을 84학번 친구들이 저한테 해줬어요. 그리고 4학년 때 반종파 투쟁 품성운동을 했죠. 그때도 참 많이 배웠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다 괜한 자존심과 어깨 싸움으로 논리를 동원하는 것에 불과했다...





총: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셨었어요? 구성체 논쟁 같은 거 했을 때도?

안: 86년 그때 고려대학교 내에 지하 써클이 열 세 개가 있었어요. 큰 써클만. 열 세 개마다 혁명이론이 다 다른 거야.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 뭐고, 지금 우리 주요 타격 대상은 어떻게 해야 하고, 우리는 이 시기의 어떤 싸움을 해야 되고... 열 세 개 써클마다 다 논리가 달라서 자기 써클 잘났다고. 이래가지고 사상투쟁을 막 하면서, 다른 써클 다른 정파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었죠. 그렇게 싸웠는데...


총: 실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진 않았죠. 진보진영보면.

안: 네. 그때 열 세개 써클이 또 나뉘어져 NL, PD로 투쟁 위원회를 각각 구성을 했어요. 서로 관점이 다른 투쟁 위원회를.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하는데 일반학생들이 볼 때에는 운동을 하겠다는 놈들이 서로 싸움을 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친구 하나가 내부자 합의를 깨고 따로 조직을 만들었다고 화가 나서 각목을 가지고 와 가지고서는 선배를 팼네... 전두환 노태우를 어떻게 무찌르느냐에 힘을 합쳐야 할 판에, 그걸로 함께 투쟁을 하자는 사람들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목으로 선배를 두드려 패는 상황까지 가게 된 거죠.


그때 우리 내부에서 반성이 일면서 결과적으로는 이게 다 ‘써클’ 중심적으로 종파투쟁 때문에 싸움이 생긴 게 아니냐. 그래서 그 열 세 개 써클을 4학년 여름 때 다 해체 시켜 버리죠. 열 세 개 써클을 다 해체 시켜 하나의 단일한 써클을 만든 게 바로 애국학생회 라는 건데, 그 조직을 만든 것 때문에 감옥을 간 거죠. 그때 이후로는 서클 간 분열이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고, 그 결과로 전국 대학생들의 협의체인 전대협 조직이 출범하게 된 거죠. 옛날 얘기죠 머.





사실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론과 이성으로 감정을 지배하거나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불길이 오히려 논리를 만들고, 생각을 만드는 거 같아요. 일체유심조라는 단어가 있긴 합니다만, 불경의 그 말이 뭘 뜻하는지 다 말할 자신은 없지만 결국 정서와 감정이 모든 걸 지배하는 것 아니겠느냐..





총: 그렇죠. 오히려 나 감정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라고 말 하려고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죠. (웃음)
안: 네. 나 화난 거 아니야. 나 미워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려고 이론을 만들어내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실은 화나고 미워서인데.










총: 많은 경우 그렇죠. 그게 88년이죠. 그리고나서 그 다음 해인가요. 누구더라. 김덕룡의원인가? 보좌관으로 들어갔죠?
안: 예.
총: 왜 거기 들어가셨어요?


안: 88년도 감옥생활을 하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특별 사면으로. 대략 그때가 12월인데... 그때 제 마음을 그렇게 정리했어요. 이제 운동 지도자로서의 안희정은 끝났다. 난 거세당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태 믿어 왔던 것과 반대의 길을 갈 수는 없다. 내가 비록 지도자로서 부족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또 스스로가 정말 부끄러워서 학생운동을 앞에서 이끌 수는 없다. 더 이상은.





제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대협을 조직해 전국 총학의 84, 85 학번 집행부에 강의를 한 게 몇 번이고 사람을 만난 게 몇 명이냔 말이죠. 그렇게 멋있는 척, 고상한 척 다 해놓고 남산 가서 한 달 만에 무너져 버렸단 말이죠. 그땐 정말 죽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죠. 그런데 그런 일들을 겪고 보니까 생명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끊기가 참 어렵구나. 그런 걸 깨달았고. 두 번째로는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이제 정치적으로 반성하고 다시 태어났다,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건 참으로...





총: 남사스럽고..





안: 남사스럽고.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러니까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 읍내의 서점아들. 그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적어도 내가 맺어왔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지킬 의무는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내 역량을 넘어서는 과도한 구호를 내세워, 나도 망치고 조직도 망치고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는, 그런 인생을 다시는 살지 말자. 고렇게 정리를 하고 감옥을 나왔어요.





여기까지가 그의 대학생 운동권 시절. 





총: 까불다가 어른이 되신 거네.(폭소)
안: 아, 나 참 부끄럽게... 흐흐흐... 그렇게 정리를 하고 감옥을 나와서 이제 아내하고 6년째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 지금 당장 부나방처럼, 당장 혁명할 것처럼 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 그런데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사람이다 보니 결혼을 하려면 취직을 해야 되는데 그래야 돈 천 만 원이라도 대출받아 방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보니까 취직할 데가 없어요.


국가보안법으로 정치 2범이 어디 취직이 되겠어요. 그렇다고 주민등록증을 가라로 만들어 노동하러 가자니 - 예나 지금이나 증 하나 없으면 결국 현장으로 가야 되죠 - 이미 현장은 노동자들 넘치고. 그러던 차에 김영춘 씨가 당시 김영삼 총재 곁에 있었는데, 총재 비서였으니까, 그 분이 이제 나더러 몇 학번 선배인데 하고 전화가 왔어요. 아니 내가 전화를 했던가... 하여튼 비서실을 꾸려야 되는데 니가 한 번 가 보면 어떻겠느냐. 그런 제안을 받아서 가게 된 거죠.





총: 운동을 하다 이제 취직을 한 거네요.

안: 예. 취직을 했죠. 당시 노사 분쟁이 벌어지면 사측이 당시에는 재무제표나 그런 자료를 일체 공개를 안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정당한 임금협상을 위해 필요한 자료도 얻기가 어려웠던 시절이고 그래서 내가 그 역할을 하게 됐죠. 자료를 구해주고.


당시 생각으로는 학생 운동의 지도자로서 패배한 사람이지만, 어떻게든 그 패배를 내 방식으로 책임을 지자. 그것은 이렇게 후방에서 조력자로 사는 것이다. 그게 내가 취해야 할 인생의 태도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91년 92년 되니까 김근태, 이부영 뭐 장기표까지 소위 민중운동의 지도자라고 했던 분들이 제도권에 다 들오기 시작하네..










총: 그때가 본인 나이가.
안: 스물여섯이었네요.


총: 아직 청년인데. 가만, 그럼 와이프는 고 3때 만난 게 되나요.
안: 아, 고대 동기. 83학번 동기.
총: 들어가자마자 만난 거네요?
안: 들어가서 알고 지내던 친군데 2학년 때부터 사귀기로 했죠.


총: 첫 연애와 바로 결혼. 젤 나쁜 케이스네.(폭소)
안: 우리 집사람도 그런 소리 합디다.(폭소)
총: 으하하하..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안: 89년이요.
총: 일찍 하셨네요.
안: 네. 88년 12월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89년 1월부터 김덕룡 실에 다니고 89년 12월에 결혼을 했지요.


총: 그 즈음이 인생에서 굉장히 큰 전환점이 되신 거네요. 감옥 갔다 운동 행로를 바꾸고, 결혼 하고, 취직 하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아직 20대 중반에 어린 나이인데. 근데 그 시절에 정치판도 근본적으로 뒤흔들렸잖아요. 재야가 대거 제도권으로 진입하고.





안: 예. 그리고 90년 삼당 합당 할 때 저는 김덕룡 의원실에 사표 내고, 노무현 대통령은 삼당합당을 거부하고. 그리고 삼당합당 거부한 당직자들과 안 쫒아간 국회의원들 일곱 명이 모여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죠. 그때 저는 이철 사무총장실의 비서였었어요. 그런데 91년도에 그만 뒀어요. 제가 못 있겠더라구요.





총: 왜요?

안: 정치가 과실 따먹기 게임만 하니까. 땅 자체의 기운을 높이는, 그런 일은 너무 어렵더라구요. 역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과 의지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이미지와 득표를 위한 공약을 하고 결국 득표를 통해 지위를 보장받고 하는, 그런 정치에 대해 정말 환멸을 느꼈어요.


총: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요, 아니면...
안: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정치 자체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는 가치를 따지기보다 패싸움의 기술만 익히는 정치였어요. 정치판 자체가 늘, 만날 그런 것만 보고 배우게 되는 곳인 거죠. 패싸움의 기술. 이렇게 패볼까 저렇게 패볼까. 아, 정말 싫더라구 그런 게.


총: 체질에 안 맞았구나.

안: 그런 거 같아요. 사람이 가치가 있고 대의가 있고 명분을 있고 나서, 패는 것도 있는 거지. 나한테 서운한 게 있다고, 개인적으로 은원 관계를 따지고. 실제 속마음은 그런 거면서 겉으로는 논리를 막 만들어서 내세우고. 실은 자기들끼리의 친소 관계를 가지고 패를 모으는 것에 불과한데 거기 마치 대의명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친소 관계의 핵심은 이게 나한테 유리하냐 불리하냐. 나한테 이득이면 삼키고 불리하면 뱉고. 이 공학으로 정치가 움직이는 거예요.


총: 그래서 그런 후에?


안: 그래서 92년도에 그만 두고 학교에 복학을 했어요.


총: 졸업을 해야 하니까.

안: 예. 졸업을 하기로 했으니까. 아, 당장 복학하진 않았고 제도 정치가 이런 수준이라면 차라리 돈이라도 좀 벌자, 이런 생각으로. 하방 사업을 하자. 정신노동 가지고는 안 되겠다. 육체노동으로 좀 살아보자 해 가지고 창원에 내려가서 창원 노동복지회관을 짓고 왔어요.  함바집에서 기숙하면서 막노동하면서. 수입은 좋았어요. 150만원 노가다 월급을 받았으니까. 뭐 일이 공치는 날 다 빼고도 한 150만원 수입이 되었죠.


총: 91년도라고 말씀하시니까 저도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도 그 해에 군대 갔다 와서 쓰미  데모도(조적공 보조)를 해서 그 생활을 좀 알죠.
안: 나는 잡부였어요.(웃음) 까치발 매는 작업. 그때만 해도 그게 뭐냐..
총: 아시바.(웃음)


안: 네네. 그게 다 목재라서 외벽을 세운 다음 거기다가 까치발 매고 철제판 달아서 인부들이 작업할 수 있게. 차전놀이 할 때 받침대처럼 통나무 두 개를 엮어서 꺾어요. 하나는 기둥에 묶고. 그럼 그게 꼭 까치발처럼 보인다고 해서 까치발 맨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철사 굵은 거 이만큼 가닥 끊어 놓은걸 허리에 차고 올라가서 붙들어 매는 거죠.


총: 까치발 작업 하셨구나..
안: 공구리도 치고.
총: 나라시하고..
안: 어. 나라시 하고..
총: 잡부 맞네 잡부(웃음)
안: 그리고 주변 청소하고(웃음)


총: 그렇게 노가다를 하다 관두고 이제..

안: 92년에 복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하겠다고 했던 내 인생은 패배를 겪고, 90년에 동구권은 몰락하고, 3당 합당으로 반독재 전선은 붕괴되고, 전국연합 조직도 붕괴되고 그러면서 퇴역 군인의 실업문제와도 같은 그런 상황이 한꺼번에 몰려왔죠. 양심과 시대의 정의를 위해 청춘을 던졌던 사람에서 점점 시대에 뒤쳐진 천덕꾸러기 인생으로 전락하는, 그런 인생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죠.


형수님이 간호사하고 남편이 노동운동 상담소 하다가 그런 백수 같은 사위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또 전망도 희망도 없는 그 불투명한 결혼 생활과 남편의 무책임함에 지쳐버린 그 형수들의 반란으로, 그렇게 해서 이어지는 이혼들. 그런 것들도 너무나 많이 봤고. 운동권 출신들의 와이프들이 보통 간호사 약사 교사... 그런 직종에 있으면서 남편을 부양했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수입 하나 없으면서 역사와 민중만 이야기하고.





총: 먹고 사는 문제에 부딪히는 거죠.
안: 네. 그 현실 문제에 부딪혀서.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전선은 끝났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당대출판사에서 나왔나요? 역사의 종말. 뭐 이런 책들에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하는 책들까지. 그 당시 사조는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 모던, 그러니까 이제 역사고 조직이고 다 끝났으니까..











총: 각자 갈 길 가라! (웃음)





안: 네. 그거죠. 갈 길 가라. 근데 나는 그게 너무 무책임한 거야. 아니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인생 조지는 길을 가라고 선동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가 죽겠으니까 나는 빠진다고 할 수 있나. 그런 책임감과 동시에 내가 살아온, 내 어린 인생에 대한 엄청난 자괴감. 이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죽어도 좋다고 살아왔던 내 인생의 선택이었나. 포레스트 검프의 마지막 장면처럼 실컷 뛰다가 나 이제 집에 갈 때 됐으니까 니들도 집에가. 이런 거냐 인생이. 그건 너무 무책임한 짓 아니냐. 그런 생각이 밀려들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92년도에 출판사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제 수입도 많이 늘긴 했는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 한 1년 반 출판사를 하다가 노무현 대통령 책을 출판하자... 여보 나 좀 도와줘. 그 책을 만들게 됐어요. 그거를 제가 출판사 있을 때 냈어요.



총: 인연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안: 인연이야 그 전에도 있긴 했죠.
총: 꼬마 민주당 때.


안: 네. 그때부터 가깝게 지냈기는 했어요. 그래서 출판사 하면서 책 하나 내시죠, 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이제 복학을 해요. 그 시절 지난 시대 내가 인생을 조져도 좋다고 믿었던 그 믿음이, 어떤 논리적 근거였는가. 어떤 희망을 향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보고 하자는 생각으로.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혁명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인가.

그때는 뭐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 하자고 했던 그 혁명은 뭐냐. 역사라는 것이 그렇게 이제 끝, 다시 시작하고 하는 문제인 것인가. 그래서 학교에 돌아가 고전들을 보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막시즘 과의 책들을 봤다면 그때는 이제 주로 동양의 고전들, 사서삼경, 플라톤 같은. 그런 고전들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역사를 더 길게 보는 법을 배우려고 했고.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하나는 내가 너무 어린 나이부터 내 인생을 조지고 있구나. 이렇게 그냥 살기는 억울하다. 왜 갑자기 잔치는 끝났다는 거냐. 누군가 나 대신 나서주면 난 그 사람의 조력자라도 할 수 있는데. 부역자라도 해 줄 수 있는데. 다들 이제는 끝났다고 집에 가자고 하니까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시절 저만 그랬던 게 아니라 심한 경우도 있었어요. 85학번 후배 하나가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해서 면회를 갔는데 그 후배 놈이 무릎을 꿇고 나한테 형님 잘못했어요. 막 이러는 거야. 자기가 조금만 더 잘했었더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막 우는 거야.





총: 무너진 거네요.

안: 뭐 학삐리와 노총 출신 부부들 깨지는 거, 마누라가 전문직으로 벌고 남편은 운동하다가 이혼하는 거. 정말 한 인생 조져도 좋으니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우자 했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감을 한다는 것이 과연... 난 이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으로 혁명하자고 하는 것도 전혀 비현실적이다. 혁명의 시대는 이미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인가. 그 고민을 하는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게 된 거예요.


총: 근데 꼬마민주당 시절에 이미 노무현대통령을 봤잖아요. 근데 왜 하필 그 시점에 같이 하게 된 거예요?


안: 실은 90년 3당 합당 거부하고 나서 바로 노무현대통령이랑 일을 하고 싶었었어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 방에서는 더 이상 나를 받을 만큼의 능력이 없었어요. 워낙 박봉인데 나까지 거기 가서 일 한다고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당시 사무총장실 비서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노무현 의원한테 갈 수는 없는 거니까.





총: 배신이니까.
안: 네. 그리고 괜히 두 분 사이를 어렵게 만들까봐. 하여간 그래서 그때는 만날 수가 없었었고. 그런 고민들 속에서 출판사를 하고 또 독학을 하던 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구소 만들 때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해 왔죠.





여기까지가 노무현을 만나기 이전의 안희정.






총: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왜 안희정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던 겁니까?
안: 이광재가 추천을 했더라구요. 대단한 놈이더라구.(웃음) 노무현 대통령도 제가 살아온 이력을 맘에 들어 하셨나 봐요. 중간 중간 또 이렇게 만나면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드린 적도 있었고. 그때라고 제가 지금 하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겠습니까,
총: 더 했겠죠~(폭소)
안: 더 했죠. (폭소)


총: 으하하하. 사실은 이런 이야기만 했겠죠.
안: 네 하하하. 그런 문제의식에 대해서, 그러니까 혁명운동의 정신은 놓치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옛날 방식하고 다른 뭔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뭐 그런 이야기들. 그때 제가 정리했던 개념은 막시즘의 휴머니즘은 간직하자. 과거 우리끼리의 논쟁은 오히려 막시즘의 휴머니즘은 버리고 마키아벨리즘만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 자기비판.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인간이 동학을 만나면 동학이 되는 거고 막스를 만나면 막시즘이 되는 거고 황건적을 만나면 황건적이 되는 거. 결국은 인간애가 기본이다. 그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진보주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기분을 놓치지 않는 거다. 그랬을 때 노무현대통령이 말한 게 바로 원칙과 상식이에요. 그럼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이론은 나중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분이이에요.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은 삼당 합당이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막 무너지고 그랬을 때도 이 양반은 오히려 더 세게 나가요. 활기차게. 이런 원칙 없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굉장히 고상한 관념으로 역사 투쟁을 하려고 했었던 건데, 그래서 그 고상한 관념이 깨지니까 관념으로써 역사투쟁이니 하는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무력해졌는데, 노무현이라고 하는 정치인에게는 오히려 현실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싸워야 될 이유가 원칙과 상식으로 있더라구요. 그게 제가 노무현 대통령이랑 일하면서 느낀 행복함의 시작이죠.



총: 그렇게 좋던가요. 노무현대통령 처음부터?
안: 아주 좋았어요. 아주 훌륭했어요. 하하하하..








이 대목에서 아주 환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노무현과 만남 이후.


총: 노무현 대통령이 뭐가 그렇게 달랐습니까. 그 이전 정치인들과.

안: 모든 것이 다릅니다. 품성, 합리주의, 타인에 대한 인격적 예의, 배려. 모든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비서라고 할지라도 그 책임과 권한을 존중해주죠. 기존의 정치인은요, 비서들에게 그냥 지시하고 비서는 그냥 하는 거예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면 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오고 갔는지 비서들에게 와서 보고를 해요. 내가 당신들에게 보고를 해 줘야지 당신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나는 당신들에게 보고를 한다.


직무와 관련되어서 정확하게 상황들을 알려주고, 물어보면 모든 일을 오픈해줬어요. 기존의 정치인들은 절대 그런 게 없죠. 감히 물어보기도 어렵고. 절대 안 그럽니다. 뭐 그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치인이었어요.그리고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한테 한 한 마디가 당시 내 고민을 푸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어린 빨치산이, 아우 내가 빨치산이 될 때는 인민을 해방시키고 좋은 의미에서 왔는데 말이야, 빨치산 선배를 보니까 무도 훔쳐 먹고 난 실망이다. 그러니까 다른 빨치산이 한 얘기가 뭐냐면,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이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위대한 거야. 이렇게 말을 해요. 근데 난 왠지 그게 찝찝했어어. 왠지 그 정도로는 안 되겠더라고. 아우씨,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지. 게다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역사가 좋아질 거라고 믿고 내가 가냐...





90년 초반에 나왔던 얘긴가.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뭐 쓰면 뱉고 달면 삼키고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는 정치공학적인 행보를 보면, 오히려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더 심하다는 소리죠. 이론을 만들어내던 영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정당성을 막 만들어내서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는데, 노회한 정치인이 볼 때도 그게 참 한심해서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표현이 나온 거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진보를 하느냐. 그런 정치만 보다보니까 제가 모든 게 회의스럽고 그러던 시절인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에게 뭐라고 했냐면,





“ 희정씨 그거 참 어려운 주제인데. 그게 그런 거 같아. 이런 말 있잖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사람은 안 변하는 것 같아 내가 볼 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개체로써의 인간은 안 바뀐다는 거야. 그런데도 인류는 진보한다는 것이 신기한 것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는데, 독백처럼, 어, 그게 나한테는 몇 년을 고민하던 문제에 답을 줬어요. 그때 무슨 득도한 것처럼 중요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건 전혀 아니에요. 그냥 독백처럼 한 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까 그런 말들이 저한테는 남는 거예요. 인간이 대한 믿음이랄까. 그 대통령의 그 말씀이 지금까지 남는 거라. 개체로써의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그 개체가 모인 집단으로써의 인류는 늘 진보해 왔다. 그것이 진보주의자의 역사관 아닐까.











그렇다. 사람 하나하나에 대해 실망할 일이 아니다. 사람 하나하나에 실망하고 신념을 꺾지 말고, 인생은 뭐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포기하지 말자.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사회화 되는 첫 번째 과정이 인간에 대한 실망을 조직하는 거예요. 난 이걸 사회화 과정의 첫 번째라고 봐요. 별 수 없는 거야 인간은. 똑똑한 체 하지 말고 적당히 사는 거야. 그렇게 인간에 대한 실망을 학습 시키는 것이 사회화가 되는 가장 첫 번째 내용 같아요.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나면 사람들이 적당히 살기 시작해요. 그렇게 적당히 살기 시작하면서 시민사회와 공동체적 관념도 없어지고, 불 꺼진 뉴욕, 정전된 뉴욕 밤거리 같은 인생 속에서 자본주의적 탐욕에 의해 재편되어 가는 거죠. 그렇게 인간에 대한 실망을 느꼈던 게 제가 처했던 94년까지의 상황이에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제게 다시 불러일으킨 거죠.





그랬단다.





총: 그랬군요. 자, 그런데 부산시장 선거 떨어지잖아요. 고난이 시작되는 건데. 하지만 동시에 그때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진심을 알아주기 시작했죠. 바보 노무현 이라고 해주고.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계속해서 관두고 부산 내려가고, 내려가고 한 걸 내부에선 보좌진들은 동의를 했어요?





안: 88년도에서 이겼던 부산 동구에서 92년도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똑같은 사람한테. 5공의 허삼수한테. 두 번째는 택도 없이 떨어졌죠. 그리고 95년도 부산시장 선거에서 또 졌죠. 그리고 96년 종로에 와서 종로선거에서 떨어지고 98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또 99년 초에 도 부산 출마선언을 했죠. 그때 다 반대를 했어요.




총: 너무나 당연하죠.
안: 네. 다 반대했어요. 종로에서 그냥 정치하시고 다음 대선 후보군에 들어가는 게 낫지 뭐 하러 가서 그 위험한 배팅을, 도전을 하느냐.



총: 그럼 본인도 반대하셨나요, 그때.
안: 아뇨 저는 그때 찬성했었어요. 저는 대통령의 결정을 무조건 존중했어요.
총: 그건 왜 그랬어요? 참모인데.


안: 왜냐면 나는 그 분을 믿었어요. 믿고 있었던 대장이 내린 결정이니까. 역사책에 보면 신돈이 초반에는 굉장한 사람이었어요. 막판에는 분열증이었지만.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과연 정상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내린 판단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따르겠다. 내가 판단할 것은 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인가. 내가 인간적인 관계에 얽매여 그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건 아닌가, 그 판단만 하면 되는 거에요.





총: 좋은 참모네...
안: 그런데 내가 봤을 때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고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그럼 저는 믿고 지지합니다. 물론 제가 한 두 번 결정적으로 반대를 한 때가 있기는 합니다.


총: 어떤 반대를 하셨어요?
안: 97년 선거에서 이인제가 나가면 나도 나간다. 이랬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총: 이인제 싫어하시는 건 옛날부터 대단했군요. (폭소)


안: 네. 이인제가 사이비 세대교체의 깃발을 들고, 다음 시대의 리더인양 하는 것을 나는 허용할 수 없다.
총: 왜 그 정도로 싫어하신 거예요?


안: 아, 90년 이인제씨가 3당 합당 쫒아갈 때, 그때 그냥 쫒아 간 게 아니에요. 지배적 대세가 여기 있는 거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 만찬 하는 자리에서 그랬다고 해요. 난 직접보진 않았지만. 그러면서 이인제는 상임위도 불성실하게 했죠. 그런 것들이 노무현의 기준에는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마지못해 3당 합당한 게 아니라 대세가 이거라면서 가는 걸 보고. 그래서 97년에 이인제 나가면 나도 나가겠다고 하셨을 때 제가 한달 반을 쫓아다니며 그 출마 선언 못하시게 말렸어요. (웃음)










총: 그건 왜 그러셨어요?
안: 음... 대통령의 도전은 그 자체가 목표여야지, 이인제를 주저앉히려고 나온다는 건... 안 되는 거 아니냐. 일단 나와서 나중에 김대중 후보를 돕는다. 그런 것도 별로 좋은 거 같진 않았어요. 온전히 노무현 후보가 스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고. 이인제가 나온다고 하니까 배 아파서 나온 거네. 그런 구도로 빠질 거 같은 거죠.


총: 그때 출마선언을 할 뻔도 했구나.

안: 예.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제가 제안했던 게 뭐나면 국민후보로 갑시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96년도 새국민회의를 안 쫒아갔단 말이에요. 정계은퇴 번복하고 영국서 돌아오신 김대중 대통령이 530 선거 끝나고 나서 11월 첫째 주인가 새국민회의를 만들었잖아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은 정계은퇴 선언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냥 변호사 업무만 전념하겠다고. 그리고 신한국당 경선에 이인제 나온다고 하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전 나가겠다면 새국민회의가 아니라 독립적인 국민후보로 하자.


이래서 당시 민노당이 아직 없을 땐데, 그쪽 진영, 민노총 뭐 이런 그룹한테 당신들이 노무현을 후보군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그쪽에 결국 온 답변이 뭐냐면, 공식답변은 물론 아니었습니다만, 뭐 단일 조직이 아니니 공식답변이랄 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돌아온 답변이 운동권 출신들 모임 내에서 노무현 카드를 검토하다가 안 되겠다고 결론이 났다. 서울대 나와야 한다. 그래서 권영길 내보낸 거예요. 흠, 그때 거기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까...하하하





서울대를 나오지 않아서. 웃기고들 있었던 게다.





총: 하하하하. 끝내 대통령 못 됐겠죠.
안: 그 당시 제 생각은 그렇게 나가서 결국 김대중 지지하는 거다. 끝까지 가는 게 아니라. 어차피 정권교체라고 하는 가장 큰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이회창 싸움에서, 3자 노선을 끝까지 끌고 가선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김대중 지지선언하고 들어갈 생각이 있었죠. 그게 명분과 실리가 있는 거다.


요즘 그쪽 분들 보면 정치하면서 명분만 가지고 어떠한 타협책도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던데, 그건 정치가 아니거든요. 모 아니면 도. 그건 혁명의 게임이죠. 혁명운동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래서 그 때 제가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한테 정말로 세게 말렸고. 그리고 대연정 문제 때 제가 말려 보려고 했는데, 제가 청와대에 근무했던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말려질 사람도 아니고. 2005년 5월 대연정 제안이 있기 전에 2월인가 3월에 말씀을 해주셨었어요. 나 이런 거 생각하고 있다고. 그때 전 어맛, 깜짝이야 했죠.. (폭소)





총: 으하하하하.
안: 이건 무슨 발상인가. 정말 역발상이구나. 전 그런 생각조차 못 해봤는데. 그런 면에선 역시 제가 알고 있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게 참 대책 없는 제안이기 쉽습니다. 그 제안을 누가 어떤 식으로 받겠습니까... 이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진지에서만 머물면서 소리만 치고 있는데 정말 싸울 거면 성문 열어놓고 백병전 하자 얘기 아니냐.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다.

나한테 총알 안 날라 오는 이상 이제 성문 안에서 총 쏘는 화려함만 보여주면 되는, 그 정도의 경쟁구도에서 아주 안정되어 있는 정치판에다가, 니들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밖에 나와서 백병전 하자. 이런 제안이거든요. 지역으로 진지를 구축한 정당들에게 실질적으로 국민의 갈등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전환하자는, 그런 뜻인데 이건 당사자들에게 물어봐야 된다. 그래가지고 이제 당에 상의한 건데 그 과정에서 이게 밖으로 나가버린 거예요.


민주주의는 뫼비우스 띠와 같아서 투쟁의 길을 한창 걷다가도 갑자기 타협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민주주의의 뫼비우스의 띄라고 난 생각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어디 부분에 와 있는가.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난 안 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이제 신중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시겠다 하시고 열린우리당 지도부한테 신중하게 한 번 상의를 하겠다고 했다가 그 얘기가 이제 나가버려서 별 수 없이 정론화 된 거예요. 물론 대통령은 그걸 할 의지가 분명히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되고 그런 프로세스의 주체가 만들어지기도 나가 버린 거죠.





총: 그랬군요. 아까 부산에서 다 말릴 때 안 말렸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그 덕에 사실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런데 그건 다 결과론이고 실제로 떨어진 직후에는 좌절이잖아요. 엄청난. 그렇지 않았었나요? 제가 그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요. 떨어진 직후의 침울한 노무현 사무실, 2000년 부산 시장 인가.





안: 부산 국회의원 선거

총: 아, 국회의원. 그때 인터뷰를 갔는데 회의실이라고 정말 작았어요. 테이블이 있었는데 테이블 다리가 안 맞아. 흔들거려. (웃음) 그리고 커피를 타줬는데 존나 맛이 없었어. 커피가. (폭소)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랑 참 심심하게 인터뷰 했는데, 막 떨어진 양반이다보니 매가리도 없고. (웃음) 아, 이 양반 인터뷰를 해줘야겠다. 떨어졌지만 의미가 있으니 우리라도 어떻게 인터뷰 해줘야겠다 싶어서 간 건데. 그 과정에서 다른 말들은 생각이 안 나고 이 말이 생각나요.


“역사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요~”


뭐라고 하다가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다만 그런 이야기를 그 양반이 웃으면서 했다고. 원래 그게 안 웃어야 되는 타이밍이거든요. 정치인들은 그런 이야기할 때 비장해야 폼이 난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웃어버리니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그게 진심이란 게 느껴지는 거죠.

연출된 게 아니고 이 사람이로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그래서 10년이 넘었는데 그 얼굴이 생각나요. 어쨌든 그때 그 사무실 분위기가 어땠냐 하면, 존나 침울했어요. 존나. (폭소) 아, 이제 이렇게 해서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씨앗을 뿌렸구나, 이게 아니고 존나 침울했다고요.(웃음)



안: 하하하.. 그때 총선 치르고 나서 정말 힘들었어요.


총: 그때 내부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안: 그때는 제가 물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웃음)
총: 으히하하하하


안: 98년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 되시고 나서, 희정씨 나한테 현재 가장 큰 고민이 물장사다. 보증 섰다가 망하고 개자식 되어 버렸는데. 이거 어떻게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요 문제를 도와주는 것이 현재 그 양반에게 가장 절실한 거구나. 그래서 주식을 다 나한테 넘겨라. 그걸 넘겨받아 가지고는 연구소를 위한 수익사업으로 추진을 했죠.

옥천에 있는 공장에 OEM으로 납품해서 수익구조를 예상하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OEM 납품으로는 수익 구조를 제대로 남길 수가 없어서 자체 브랜드 파워를 키워서 영업 조직망을 함께 패키지로 해야겠다. 그래서 오아시스라는 판매회사를 별도법인으로 만들고 판매조직과 판매사업을 시작했죠. 그때 이제 선배들한테 투자를 받으려고 했었죠.





총: 그래서 나중에 본인이 문제가 된 건데. 근데 사실 생각해 보면 그때 상황에서보자면 노무현이 몇 년 있다가 대통령 될 거니까 미리 알아서 정치자금을 준다, 이런 거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상황 아닙니까.



안: 그때 누가 노무현이 대통령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심지어는 2001년에 대선후보 선언을 처음 했을 때조차...
총: 아무도 생각 안 했죠.


안: 그걸 정치자금이니 로비를 했으니 하는데, 나중에 로비자금이라고 하는 혐의는 벗어났습니다만... 하여튼 그때 저로선 정치를 하는 이상 이 사업을 하다가 내가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 대장 가마를 내가 메고 있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탕이면 그냥 서 있어야지. 내가 서 있는 바퀴 쪽이 진흙 쪽이면 그럼 가마를 걸치고 서 있는 거죠. 가마 내려놓고 내 발만 마른 땅에 두겠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2000년 총선 끝날 때까지 2년 반을 생수사업에 했죠.





그랬단다.





총: 아까 이인제 나오니까 나도 나가겠다고 하신 거 말고, 본인이, 노무현 대


통령 본인이 이제 내가 대통령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했던 순간이 있었어요? 전 2001년에 처음 출마 선언 하셨을 때도 이게 꼭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를 한 거라기보다는 이 판에서 자신을 역할이 있다. 그래서 나간다. 그런 정도의 느낌이었거든요.





안: 노무현식 정치 노선, 노무현 가문의 정치적 철학의 특징을 얘기하자면, 이 외형적으로는 세 바둑이에요. 집 바둑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국회의원 되어야지, 내가 대통령 되어야지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겨냥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가치라고 하는 이름의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2002년도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주의 통합,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자. 그리고 우리 툭 까놓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이게 목표였어요. 지역주의 정치를 그만하고 특권 없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그리고 원칙과 상식대로 살아도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 그래서 법치주의 사회를 만들자. 요것이 정치를 하는 이유였단 말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해야 되겠는데 필요하다면 대통령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승패하고도 상관이 없었어요. 지든 이기든, 이 가치를 가지고 그 무대에서 싸우면 그 가치를 가지고 기여하게 되는 거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지면은 아무것도 없다고 얘길 하지만, 그건 단기 순익 얘기이고. 단기 순익이 아니라 자산 가치를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노무현 가문의 정치 철학은 가치 중심이에요. 이런 가치를 가지고 싸워 나가는 것, 그게 대통령 선거가 되면 대통령 후보의 자격으로 그 싸움을 하는 거에요. 자신의 급이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할 기회가 있으면 그러면 출전을 하는 거예요.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 후보랑 후보단일화를 하던 2002년 12월 그 저녁에 이겼다고 전화를 드리니까. 어, 그래 알았네. 간단하게 한 마디만 하셨죠. 그리고 그 다음 날 만나서는 어떠세요 하고 물었어요.





왜냐면. 후보단일화 하고 각서 쓰고 또 러브샷 했던 그날 밤에, 제가 엄청 울었거든요. 평 생 모은 재산을 그 부잣집 도련님한테 한 방에 뺏기는 구나. 너무 허망하더라구. 너무 억울하고. 저 사람은 그냥 자기 용돈 조금 떼서 배팅한 거지만 우리는 평생 모은 재산을 다 배팅하는 건데. 그 상황까지 내몰린 처지가 너무나 억울하더라구. 그래서 그 왜 러브샷까지 해서 사람 속을 쓰리게 하시냐고... 대통령한테 30년 수절했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재취하는 느낌이라고.(웃음)





총 : 그것도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모르는 남자한테. (폭소)
안 : 그랬더니 대통령이 아, 그 친구 갑자기 러브샷하자고 들이 미는데 어떡하냐고. (웃음)


총 :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어떠냐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안 :


“내가 단일후보로 이런 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내가 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패자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승자로서 아량을 베푸는 것보다 패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역사의 교훈이 있지 않겠느냐, 하시더군요. 정치란 게 어차피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의 변화를 통해서 시대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 정치인데, 그렇다면 나의 역할 모델이, 패자의 역할 모델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괜찮다. 잘할 자신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아, 맞다, 그런 거구나. 정치가 이런 거구나. 정치를 이렇게 해야 엣지가 있는 거야~ 내가 속으로 그렇게 말했죠.




참, 노무현답다.





총 : 제가 이 질문을 시작한 이유가 뭐냐면 2002년 출마했을 때 이인제가 나오니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97년 때도 그러셨다고 하니까. 근데 당시 지지율이 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선언할 때만 해도.



안 : 2001년 10월에 우리가 대통령 선거를 선언했을 때는, 지지율이 한 4퍼센트 대.
총 : 그렇게까지 높았나요?(웃음)


안 : 네. (웃음) 2,3 퍼센트에서 4퍼센트까지 올라갔었고, 이인제씨가 18프로에서 20퍼센트 벽을 넘느냐 마느냐 하고 있을 때였어요.
총 : 1퍼센트는 넘었구나.(웃음)
안 : 그때 김근태 선배가 1퍼센트 밑에 있었죠. (웃음)


총 :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노무현 대통령이 출마 선언했을 때 자기가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또 대통령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97년에 내가 구도를 만들어서 김대중을 밀겠다고 한 것처럼, 어느 시점에 누군가를 밀겠다고 출발한 건 아닙니까.





안 : 2001년도 초에 해수부 장관을 그만두셨을 때쯤 이광재 의원이랑 제가 금강빌딩에 대선사무실을 한 층 통으로 얻어버렸어요. 그리고 퇴임하신, 해수부 장관을 그만두신, 직후 노무현 의원을 금강빌딩에서 만나자고 해서 금강빌딩을 보여줬죠. 그랬더니 "잠깐 보세요" 그러는 거야. 한 쪽 방에 가서 우리를 이렇게 보더니 "자네들 이 사무실 왜 얻었어?"그러는 거야 "하셔야죠." 그랬더니... "이인제한테 질 때는 어떡하지?"





총 : 하하하하. 이인제한테.
안: 이인제 포스터 들고 선거운동 해줄 자신 있어?
총: 오, 만약 진다면.
안:


“난 자신 없어. 어떻게 이인제 같은 사람을... 그런데 경선에 붙으면 패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패자가 되어서 그걸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경선 붙지 말아야지.”





총: 음... 그렇게 생각하셨다...
안: 네. 그러면서 자네들인 지금 무슨 생각 하냐고 물으시는 거였어요. 당연히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건데, 만약 나가게 되면 지더라도 승복을 해서 그 후 상대의 당선을 위해서 진심으로 뛰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처음부터 가지고 경선을 해야 하는 건데, 자기한테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아직 안 되어 있다. 이인제 같은, 그런 정치인이 대통령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러면서 고민을 하셨죠.


총: 노무현다운 고민인데. 그리고 고민은 이해가 되는데. 그럼 결국 나가신 이유는 뭡니까?

안: 다른 선택이 없었던 거죠. 96년도 총선에 떨어지고 나서 노무현대통령이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는 삼김 청산 하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중구에서 출마했지만 잔류한 민주당 사람들이 다 떨어졌어요. 그때 이부영 정도 살아남았나? 죄다 떨어졌어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씀이, 이것이 현실이다. 호남의 대통령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것을 삼김정치이나 보스정치니 하면서 관념으로 이기려는 자체가 억지고 무리다.


그런 자세가 정당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유연함이고, 현실정치인으로서 현실적 판단능력인데. 지난 2008년도 7월 6일 전당대회 끝나고 민주당최고의원들 쭉 모시고 봉하마을에 인사를 갔더니 그때 김민석 최고가 지난 시절에 대해서 사과 비슷하게 유감의 발언을 하니까 노무현대통령이 앉아계시다가, 책상 탁하고 치시면서





“그 이야기는 그만해도 된다. 정당과 정치인이라는 것은, 나랑 이렇게 앉게 되는 것은, 당원들이 시킨 일이 아닌가. 당원들이 결정해서 자네가 최고위원이라는 지위를 얻고 나는 또 전임대통령으로서 자네를 만난 것이고. 정치는 그것으로써 충분히 화해가 되는 거야. 그런 옛날 문제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사과하고 그럴 필요 없어. 이걸로 화해했다고 보세. ”





이렇게 하고 퉁치고 넘어 가시더라구요. 그러니까 개인적 차원에서의 정의와 옳고 그름의 잣대, 현실 정당 정치인으로서의 타협과 관용. 그러면서도 이인제의 원칙 없는 정치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 그럴 경우는 반드시 도전해서 싸워서 이겨내는 정신. 그런 복합적인 것에 정치인 노무현의 훌륭한 리더십이 있는 거죠.





총: 다시 제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러니까 처음 출마 선언할 때는 양보할 수 있다, 그런 생각 있지 않으셨나요. 예를 들어서 그나마 노무현대통령이 인정했던 선배 중 하나가 김근태 정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안: 민주화운동의 선배로서 인정했죠.
총: 그래서 혹시 김근태가 경선에서도 힘을 받으면 김근태를 밀어줄 수 있다 이런 생각 하고 나가신 건가요? 97년 김대중 때처럼.


안: 그때 금강캠프에서 했던 이야기가 이인제한테 지면 승복할 자신이 있나 이런 거고. 조금 있다가 이런 말도 하셨어요. 경선해서 김근태가 나보다 지지율이 안 올라오면 어떻게 하느냐...


총: 더 나오면 밀어줄 수 있는데?
안: 더 나오면 얼른 김근태를 밀어주지. 둘이 싸울 일이 뭐 있냐. 근데 그때 되어서도 김근태가 나보다 지지율이 안 오르면, 그때는 김근태가 나를 밀어야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나. 이 고민을 2001년도 초반에 했었죠. 김근태라는 화두 때문에. 노무현대통령이.


총: 그랬구나.
안: 그래가지고 심지어 2001년도 막판에 한화갑 김근태 노무현 셋이 단일화해야 된다고 이야기 나왔을 때 노무현 후보가 쾅, 하고 오백원짜리 동전을 내놓더니 여기서 이걸로 결정을 합시다.(폭소)










진짜, 노무현 답다.





총: 푸하하하하. 그럼 비슷한 맥락의 질문인데 지지율이 한참 떨어질 때 그러니까 후보로 결정되고 나서 후단협도 나서고 난리 나고 정몽준 나와서 단일화해야 한다고 그럴 때.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단일화가 억울할 일이잖아요. 당연히 다 반대했을 것 같은데 캠프 안에서는. 힘겹게 힘겹게 재산 모아서 거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부잣집 아들이 나타나가지고 한 방에 다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노무현대통령은 그때 상황에 밀려서 간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정몽준한테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안: 그거는 현실정치인의...(긴 침묵) 민심과 여론을 향한 서핑이죠. 그 상황에 딱 들어가 버리면, 승리의 카드가 누구냐 이런 논의에 딱 들어가 버리면 그 게임에 대해서 충실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하고 단일화를 받았을 때 제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다 그랬더니,





“ 하지만 이거 안 하고 그냥 가면 이길 수가 없겠지? 그렇게 해서 지면, 야당이라도 우리가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는가? 못 지키겠지? 양김이 87년에 분열 되어서 우리가 지금도 이렇게 난린데, 또 다시 분열로, 국민들에게는 분열로 설명이 될 텐데, 그 분열에 의해서 선거에 져 버리고 나면, 그 귀책사유의 책임을 생각해 보게.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네. 이건 받아들이게. 그걸 받아낸 상태에서 또 이겨낼 생각을 하세.”



이러셨어요.





총 : 여론조사가 그때 노무현 후보에게 불리하지 않았습니까?
안 : 그게 정치인 노무현의 방식이죠. 오히려 여론조사가 가장 밀렸을 때, 정몽준씨보다 뒤쳐졌을 때 정몽준씨가 스스로 유리하다고 하는 발상을 역발상으로 받아버리는 그 타이밍은 순전히 노무현의 정치 감각이죠. 자기가 우위에 있을 때, 기세를 가지고 공세를 취해서 빨리 단일화해야 한다는 게...


총 : 그게 보통 정치인들 하는 짓이잖아요.
안 : 예. 하지만 스스로 몰린 상태에서 그걸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쳐 버리는 게, 그게 노무현의 방식이죠.


총 : 사실은 그래서 사람들도 노무현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저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여론조사가 뒤집어 졌죠. 사실 그런 배짱과 감각은 타고 나야 하는 거거든요. 머리로 되는 게 아니라. 품성이죠. 그리고 후단협 나오고 그런 내부 논란이 있었던 건 지지율이 떨어져서도 그렇지만, 사실은 노무현이 대선후보급의 자금을 땡겨 온다거나 세를 만들거나 그런 게 없어서였던 거 아닙니까.





안 : 없었죠.
총 : 그래서 그렇게 후단협 나오고 그랬던 거 아닙니까?


안 : 전통적 방식의 보스 권한, 그런 걸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고 전통적 방식의 보스 의무를 하지 않았죠. (웃음)
총 : 그러니까 돈을 안 땡겨왔다는 거 아냐(폭소) 아, 못 땡겨온 건가. 안 땡겨온 게 아니라.
안 : 아, 안 땡겨온 겁니다.
총 : 그래요?


안 : 제가 손댈까 싶었는데, 후보가 못하게 하셨어요. 2002년 4월에 우리가 후보가 됐어요.
총 : 근데 돈을 안 땡겨오면 정치판에선 말빨이 안 서잖아요. 후보가.
안 : 그렇죠. 후보가 딱 등장을 해서 사무총장 불러다가 당 자금 철철 넘치게 해 주고, 선거대책 본부장들한테 딱딱.


총 : 꽂아주고.
안 : 꽂아주고.
총 : 그래야지 조직이 움직이고...


안 : 그러면 사람들이 아- 역시 우리 보스가 이제 대세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줄 서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빚을 진 것을, 대통령 되면 무슨 수로 갚습니까.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걸 일체 못하게 했어요. 저는 그렇게라도 해서 후보의 지위를 굳건하게 하려고 마음이 흔들렸었는데, 노무현 후보가 못하게 했어요.





총 : 아이, 참 잘하셨어요.(폭소) 그런데 막판에 정몽준이가 삐져 가지고 집에 쳐박혀 있을 땐 뭐라고 하던가요? 사람들이 막 사과하러 가야한다고 그랬었잖아요.





안 : 저도 그때 과로로 링겔 맞고 있다가 그 얘기를 듣고서는 링겔 뽑고 달려갔어요. 당사에. 그랬더니 후보사무실에 수 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와서 왜 후보가 그런 말을 해 가지고 다된 밥에 재를 뿌렸느냐 그러면서 모두가 후보들을 비난을 하는 거예요. 정몽준씨 옆에 있는데 자 우리에게도 후보가 있습니다.

정동영~ 추미애~ 올라와보세요 해서 정동영 추미애 손을 흔들어주니까 정몽준씨가 노무현 다음에는 나다, 이렇게 모양이 갖춰주길 원했는데 이거는 배신이다 이러면서 간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 대해서 후보에게 막 힐난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난 실무자였으니까.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때 정동영 의원이랑, 정대철한테 그랬어요. 정말로 저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 대체 왜 이럽니까.





총 : 노무현 대통령이 앉아 있는데?
안 : 예. 소파에 앉아 있는데.
총 : 앉아 있는데 수십 명이 둘러싸고?
안 : 예. 그러고 난리를 부리더라고요.
총 : 으하하하하. 난리..










안 : 너무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상황이. 후보는 가만 앉아 있고. 그렇다고 자기가 소신 없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난리 났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자기가 화를 낼 상황은 아니고. 그러니까 아주 난감하게 그냥 죄인처럼 앉아 계시는데 미치겠더라고. 화가 나서. 그래서 사람들 다 물리치게 하고 김한길 위원장하고 네다섯 명 만나 가지고 최종적으로 집에 한 번 찾아가서 정몽준씨 철회를 요청하기로 하자. 노무현 후보는 안 가려고 했어요. 그 집에도. 철회를 하면 그 사람이 하는 거지, 하면서. 그러셨는데 결국은 끌려간 거죠. 끌려가다시피 해서 정몽준씨 집 앞까지 갔다가 외면당하고 돌아오셨죠.

총 : 가긴 잘 가셨잖아요.
안 : 아, 다들 나중엔 가기 잘 가셨다고... (폭소)


총 :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다음에 뭐라고 하시던가요? 정몽준 집에 쳐 박히고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할 때.
안 : 그 날 투표 하시고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개표방송을 여의도 한 호텔에서 나랑 수행비서랑 대통령이랑 넷이서 앉아서 봤어요. 초반에 보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난 들어가 잘란다, 그러시더라구요. (폭소)


총 : 크하하하하... 아니 본인이 대통령이 되나 마나 하는 개표를 보다가.
안 : 아니 개표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폭소)


총 : 그러는데 들어가서 잔다구요?
안 : 출구조사는 우리가 이기는 걸로 나왔어요. 만세 부르고 난리 났죠. 그런데 난 잔다고 하시더라구요. "확정이 됐을 때쯤에 깨워주게" 하면서.(폭소)
총 : 으하하하 확정이 될 때쯤 깨워주게 으하하하하....


노무현은 참, 노무현이다.





안 : 그때 큰 방을 얻었는데, 우린 응접실에서 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안에서 주무시고, 열시 반인가 열한 시 쯤 깨워드렸나. 모시고 나와서 당사에 가서 만세 부르고, 그랬죠.



총 : 제 말은 그 전날 정몽준 집에 갔다가...
안 : 그 뒤로는 그 이야기 일체 안 했어요.
총 : 그랬군요.


안 : 그 다음 날 제가 뵐 기회도 없었구요.
총 : 그런데 들어가서 잤어요? 하하하하. 잠이 오나 몰라요?
안 : 실제로, 일어나셨을 때 얼굴 보면 정말로 잔 얼굴이에요, 그 얼굴이.(웃음)

총 : 하하하. 뒤에서 혼자 보고 오신 거 아냐?(폭소)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로 듣다가.(웃음) 근데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는데 뭔가 큰 일이 있어서 다들 긴장하고 그럴 때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자 버린다고 하더라고.
안 : 맞아요.(웃음)


이제 오늘의 질문을 할 차례다.







총 : 아까 생수사업 잠깐 얘기하셨는데 결국 그 일로 재판받고 말이죠. 이게 제가 생각해도 이게 참 억울해요. 그게 뇌물이란 게. 근데 어쨌든 감옥 갔단 말이죠. 억울하게.


안 : 예.. 그때 사실 굉장히 억울했죠. 2004년도 12월에 구속이 되었을 때. 그 당시 대통령이나 저나 했던 고민으로는, 이건 그냥 여야간 정치적으로 무마하고 타협하고 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꺼내 놓는 게 옳으냐... 그때 판단으로는 꺼내놓자. 그러면서 기업의 비자금 문제도 이번 기회에 널어서 말려야 되지 않겠냐, 햇볕에.


총 : 네 뭐 그런 대의와 명분 다 좋은데, 이건 본인 얘기 아닙니까. 본인이 감옥이 가느냐 마느냐. 

안 : 2003년 2월에 인수위에서 제가 빠지고, 독립선언을 했었던 시점서부터 수사 받을 결심을 했던 겁니다. 이게 안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수사를 받자. 그때 제 심정이 어땠냐 하면 본진은 이제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남아서 추격꾼들을 맞아야 되는 상황인 건데.


총 : 게다가 그걸 영광스럽게 혼자 다 처치하고 다시 본진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고.
안 : 내가 여기서 이겨서 본진에 다시 합류할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게 희망을 품어 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희망은 없었어요. 끝내 5년 내내 본진에 합류하지 못했지요.


총 : 지금이야 안희정 하면 의리, 의리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어요. 정말 그래요. 이제는. 근데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다 바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데 그 영광은 단 한 번도 못 누렸단 말이죠. 최소한의 영광을 누릴 기회조차 없었어요. 당선 되자마자 청와대도 못 들어갔고, 청와대는커녕 감옥 갔고, 나와서도 공천도 못 받았고. 그러니까 그 5년 내내 아무런 혜택을 못 누렸어요. 이게 억울하지 않았어요 진짜로?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문재인 수석도 안희정 건을 구속 쪽으로 이야기한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버려진 거잖아요. 그때 일을 가지고 기업 비자금을 햇볕에 말리네, 하는 무슨 역사적 의미고 나발이고, 실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이지 야속하고 섭섭한 거 아닙니까. 게다가 그 이후가 보장된 것도 약속된 것도 아무것도 없고.



안 : 예 뭐 저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저뿐 아니라 가족들한테는 뭐 굉장히 어려운...

총 : 본인은 그나마 그 논리라도 이해하잖아요. 마음은 힘들고 몸은 힘들어도. 그런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그게. 평생을 바쳤는데 다들 영광을 누릴  때 혼자만 감옥 간다니. 그것도 혼자 그 돈을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안 : 그래서 대통령이 취임하시고 나서 5월인가 6월 국민과의 대화 시간에 안희정씨는 제 동업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신 거죠. 측근인 안희정씨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안희정씨는 제 동업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어요.










총 : 음...
안 : 그래 가지고.....(보좌진 들어어고 시간이 없단 사인을 한다) 아, 근데 이제 시간이 다 된 거 같은데(폭소)


총 : 크하하... 근데 이제 겨우 반 했는데.
안 : 에? 진짜 반 했어요?
총 : 반이죠. 출마한다고 왔는데 아직 출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잖아. (폭소) 이거 한 번 더해야겠네. 오늘은 일단 삼십 분만 더 주시고.


보좌관 : 아니 그럴 수가... 벌써 밖에 와 계신데. 교수님하고, 컨설팅 회사에서.
총 : 그럼 한 번 더 올 게요. 2부를 한 번 더 하죠.(웃음)
안 : 하하.. 예...


총 : 그럼 이 1부를 한 십 분만 더 주세요.
안 : 아... (보좌관과 눈 마주치며) 그래요.
총 : 아직 출마도 안 했기 때문에 (폭소)


안 : 그때 집에서 TV를 보다가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나서 집에 있을 때였는데, 그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때가 2003년도니까 7년 전이면, 제 나이가 마흔. 젊은 참모한테 대통령이 동업자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지금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한테. 이게 대통령한테 엄청난 공격거리가 될 거고.


그래서 그 며칠 뒤에 한 번 볼 기회가 있어서, 일요일 날 밥 한 번 먹자고 해서 가서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냐고... 그렇게 얘기 안 하셔도 전 괜찮고, 제 걱정 안 해주셔 된다고 하니까.





"자네걱정 하는 게 아니라 자네 가족들 때문에 그랬네"



하시더라고요. 자네 부모님이나 자네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그 일이 대통령이나 저나 뭐 대통령 편하자고 꼬리 자르기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주류가 보기엔 못 먹을 권력을 먹고 나서 그들에게 완전 당하고 있는 거였거든요.(웃음)





우린 그 면류관을 들고서 절대로 링 밖으로 떠날 수가 없는 팔자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세레모니 하고 집에 다 상패 가지고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 면류관을 쓴 채로 링에서 맞아죽거나 싸울 수밖에 없는 팔자가, 대한민국에서 노무현과 우리들의 도전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러한 시대의식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제 마음이 고통스럽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죠.





총 : 가족들은 노무현 대통령 욕 안 했나요?
안 : 음...
총 : 인간이라면 욕을 해야 마땅한 거 같은 데요 저는.

안 : 그게...
총 : 둘 사이의 교감이야, 두 분 사이의 일이고.










안 : 근데 우리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용케 대통령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편안하게 잘 나갔으면 모르겠는데 대통령 임기 내내 하루가 편한 날이 없었잖아요. 만약 안희정은 고생하는데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잘 나가. 그러면 원망이 있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대통령은 내가 감옥에 가는 거 이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시달리고 있는데 누굴 원망하고 할 수가 있겠어요. 임기 5년 내내 그랬잖아요. 그래서  다행히 우리 가족 누구도 대통령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총 : 초선의원을 대통령까지 만들었단 말이죠.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단 말이죠. 그랬는데 정작 본인은 감옥 가고. 지금이야 다시 의리라는 키워드라도 있죠. 그 5년간 본인은 묶여 있었고 잊혀져있었고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고. 무려 5년간이나. 스포트라이트는 예를 들면 유시민 전 장관이 받고, 이런 게 어떻게 억울하지가 않습니까? 인간이.





안 :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그런 마음이 있었죠.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용케 그 피리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잘 버텨왔어요. 돛대에 내 몸을 어떻게 묶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물론 노랫소리가 들리죠. 누가 잘 나가고 누가 잘 되고 누가 뭐하고. 그런 얘기 들리지만 그것을 극복했던 첫 번째는 문재인 실장이나 이광재나 유시민씨를 제가 좋아합니다.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잘 되는 걸 나도 기뻐하려고 노력을 했구요.





여기까진 준비된 답변이다. 평생 훈련된 정치 언어로 정제된 답변. 아마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을 해왔을 게다. 그리고 본인도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해두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인간이 명분과 논리만으로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순 없는 거다.



난 정치인 안희정이 아니라, 인간 안희정의 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다.


총 : 아니 청와대에서 그 흔한 무슨 직을 맡은 것도 아니고 감옥 갔다가 국회의원도 못 나가게 하고 장관은커녕 그 어떤 자리도 없었잖아요. 그거는 명예조차 없는 거거든. 허탈하기도 하고 백수니까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안 :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한테 패자가 되었을 때, 패자가 어떻게 역사에 기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큰 배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시기 질투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내 배역은 이 배역이다. 이 배역도 가장 적극적 배역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제 자신의 논리를 만들어서 끊임없이... 그랬죠.





그러니까 저는 제가 그 정도 재목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웃음) 노무현 대통령한테 그런 정신을 배웠고, 아까 말씀드렸지만 정몽준한테 패자가 되었을 때 아, 정치가 저런 맛으로 하는 거구나, 아 저거다, 저게 진짜다. 길게 봐서 역사를 썼을 때 볼록이만 활동하는 게 아니다. 오목이도 얼마든지 역할을 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에서만, 양지에서만 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했죠.





그리고 대선자금 수사에서 총대 메고 혼자 감옥 갔지만, 그 놈이 대통령과 맺어졌던 의리와 우정과 신념을 변치 않고 잘 버텨서, 5년이 끝나면, 그 끝나는 순간이 저는 제가 시집가는 날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총 : 거꾸로, 그렇게.
안 : 예. 그게 2004년도 감옥에 가서 했던 나름의 마음공부였어요.


총 : 글쎄요.(폭소) 지금이야 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씨바 왜 나만 좆 됐어!(폭소)
안 : 하하하하하
안 : 맞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을 하기보다는...(한참을 생각하다) 그냥 대통령이 난 좋았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명분과 논리로 현상을 설명하는 데 평생 익숙했던 그 자신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게다. 그 이유를. 



총 : 노무현이 그렇게 좋았나 봐요?
안 : 예. 대통령한테 도움이 되는 길이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을 했어요.


총 : 그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나요?
안 : 예. 아주 좋았어요.

총 : 노무현 대통령을 인간으로서 좋아하신 거 같은데... 한명숙 전 총리 인터뷰 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 서거소식 안희정한테 전화해 물었는데 근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했다고 그랬었거든요.



안 : 한명숙 총리한테 전화를 했던가? (일어나서 휴지 뽑아서 코 풀고) 잘 모르겠네.(울먹이며) 나도 문 실장한테 전화를 받고 봉하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총 : 왜 눈이 빨개지시는 겁니까? (웃음)


안 : 대통령이 좋은 분이다 얘기를 하고 나니까 갑자기 그리워져서. (다시 일어나 휴지 뽑는다. 눈물 닦고. 침묵. 울먹인다.) 맞아요. 내가 그... (다시 코 풀고) (오래 침묵) 아, 이게 참... 하여튼 그 분 도와서 감옥 가는 역할이라도 그 분을 위하는 일이라면 저는 행복했어요.










제가 뭐 억울하다는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좋았어요. 아...(다시 한참을 울먹인다) 그날 아침에 문용옥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형, 대통령이 아프셔서 병원엘 갔다고. 빨리 내려오셔야겠다고. (다시 코 풀고. 한참 침묵) 다른 얘기 안 할테니까 빨리 오라고. 아침 8시엔가... 아마 병원에서 한참 난리를 치고 전활 한 거 같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한참 침묵)





그러고 내려가면서 한 총리님과 통화했던 기억이 잘 안나네. 하여튼 그 당시 가는 내내 믿겨지지가 않았었으니까. 근데 대전쯤 지나 왔을 땐가, 천안 지났을 땐가 그때 서거를 공식화했다고 (눈물...) 아, 그때부터... 언제였지 4월 30일, 31일, 그때 검찰 소환 될 때, 그때 내가 버스를 막아서라도 못 가게 했어야 하는데. 그때 막았어야 했는데.(눈물...)





이 대목에서 그는 한참을 울었다.
아 씨바, 눈물 참느라 혼났다.
















총 : 이창동 감독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출두해서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을 막 찍고 그러다가 노대통령이 이제 그만 합시다... 하고 들어갔는데. 그때 이제 그만 합시다.. 하고 말하는 표정을 자기가 봤는데. 그때 자기는 굉장히 불안했답니다 그 말이. 그게 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어떤 불길한 느낌이 왔다고..





안 : 그 전 날 저녁에 여럿이 몰려가서 인사드리고 할 때 대통령이, 참여정부 때 장관들 앞에서 '면목 없습니다.' 하시는데, 내가 앞에 앉아 있다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 면목이 없습니까. 대통령 권력을 가지고 박연차 뭐 봐주신 거 있습니까. 대통령 권력으로 박연차 뭘 봐준 거 없잖습니까. 퇴임하고 나서 봉하마을 도움 좀 받았습니다. 그게 대통령 권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거 권력형 비리 아닙니다. 오래된 후원자가 퇴임한 대통령을 위해서 도네이션 한 건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랬더니 노무현 대통령께서 굉장히 겸연쩍어 하시면서.





"그 소리를 내가 할 수 있나...."



그러니까 그 소리를 누군가 대신 해줬어야 돼. 그 소리를 누군가가 해줬어야 되는 거였는데. 그런데 그때 이광재나 안희정이나 다 팔다리가 부러져 있었거든. 나도 대전지청에서 십억을 받았느니 십오억을 받았느니 해서 조중동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렇게 진흙 묻은 놈이 '우린 권력형 비리가 아냐~'하고 소리를 지른들 대통령한테 누나 끼치는 거지. 완전히 주변 팔다리 다 잘라 놓고 안방에 들어와 버린 거죠. 자객이. (담배에 불붙이고 한 모금 빨더니) 맞다. 나, 출마 이야기해야 하는데.(대폭소)





총 : 자, 이제 출마 이야기 합시다.(대폭소) 시간이 없으니 딱 한 가지만 얘기할 게요. 나 이명박한테 복수하고 싶다 씨바. 이런 사람은 많지만 방법을 못 찾고 있어요. 민주당은 미덥지 않고 참여당은 아직이고. 마음 줄 데가 없는 거죠.





안 : (연기 뿜고) 그래서 제가 충남 도지사에 출마합니다.(대폭소) 이번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승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겐 가장 가슴 아픈 패배가 될 겁니다. 16개 시도지사와 대통령이 협의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쇼. 그 분을 20년 가까이 모셔왔던 참모가, 그분이 세웠던 균형발전과 정책적 가치를 모두 기치로 내세워서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승리한다는 것. 훗날 역사가 이 상황을 뭐라고 기록하겠습니까. 저는 그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도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역사를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역사의 기록은 내가 그때 뭐라고 떠들고 주장했느냐가 아니라 국민들이 당시 어떤 가치판단을 내렸고 어떤 결론을 내렸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후임대통령이 전임대통령을 모욕주고 망신주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그를 위해서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그의 가치를 위해 헌신해온 안희정이가 그 죽음의 부당함을 알리면서 그 이듬 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그 승리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하는 출발점이 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그 기록은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도전하는 겁니다.



총 : 선거 이야기 이제 시작했는데, 바로 끝나네. (폭소) 후반전은 다음에 하죠. (웃음)
안 : 그렇게 하시죠. (웃음)


그렇게 출마 인터뷰하러 갔는데 결국 출마의 변은 딱 1분 듣고 끝이 났다.
그러나 그 1분으로 충분했다.















난 사실 안희정에게서 딱 한 가지만 궁금했다. 그는 왜 노무현을 떠나지 않았을까. 5년이면 짧은 세월이 아니다. 더구나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보상을 누리고 있을 때 오히려 버림받고 잊혀 진다는 건, 그 외로움과 배신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다. 더구나 그 끝에 어떤 대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건 명분이나 논리로 설명이 안 된다. 실은, 무작정이라고 해야 옳은 게다. 그는 왜 무작정, 노무현 곁을 지켰을까. 난 그게 궁금했다.


이제 알겠다.
그래서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구나.


이제 알겠다.
노무현이 왜 그를 위해 눈물 흘렸는지.






그리고 또 이제야 알겠다. 
인간 안희정이 어떤 사람인지.


정치인 안희정이 아니라,
인간 안희정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선거 끝나고, 다시 한 번 그를 만나야겠다.

멋진 남자에 대한 두번째 펌글


[옹호] 풍운아
(딴지노매드관광청 / 슈리슈바 / 2010-05-26)








“에이구, 즤 어미가 죽었어도 그리 슬플까. 물 한 모금 안 넘기구 자지도 먹지도 않구… 기진해 있어서 내가 뭐 약 좀 가져갔더니 어머니나 드시라구 거들떠도 안 봐.” 전화기 속에서 형님의 끊어질 듯 애달픈 목소리는 차마 더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려 알어, 온 나라 사람이 다 슬퍼하니께, 아녀, 좋아서 신나는 인간도 있을 껴. 내가 왜 이런다냐… 당최 나이값도 못 하구 악담이나 하다니.” 탈진해 누웠다는 조카보다 팔십 노인이신 형님 걱정이 먼저 든다.

“형님. 제발 이제 걱정은 놓으셔요. 제발요…….”

시집을 간 뒤 남편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으신 큰 누님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웠다. 작은 체구, 가녀린 몸피이시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눈매가 예사롭지가 않아 매사에 덜렁쇠인 나는 미리 겁부터 집어먹은 것이다. 부모님께는 더할 나위 없는 효녀이셨고 오남매를 낳아 시댁어른 모시며 농사짓고 가게도 하신다는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이 정갈하셨다.


망아지 뛰듯 덜렁거리는 내 허물을 훤히 다 보셨을 텐데도 어린 동생댁에게 단 한 번도 노엽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살그머니 손을 잡고 이런저런 덕담을 해주셨는데 작은 몸피에 비해 손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집간 누이는 노래나 시, 혹은 애잔한 글에서 많이 나오듯이 남편도 시집간 큰 누님에 대해 모성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묘한 감성을 갖고 있다. 누님은 논산군 연무읍내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 영외로 구보를 나갔는데 누님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열에서 뛰고 있는 동생에게 손수건을 던지셨다.

“00야, 땀 닦아라.”

작은 돌멩이와 함께 오천 원이 손수건에 싸여 있었다. 1968년이니 아마 꽤 큰돈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PX에서 곰보빵을 사먹으며 울었다고 했다. 돈도 없고 배도 고픈 신병 때였으니 빵 맛이 오죽 좋았을까.

빵을 먹으며 울었다는 남편보다 평범한 촌 아낙이었던 누님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더 놀라워 오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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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나 집안행사로 시댁에 갈 때면 남편은 은근히 누님댁도 들려오기를 바랐다. 남편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업무 때문에 늘 혼자 시댁에 가야 했다. 그러나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업고 무거운 보따리를 든 나로서는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혼자 가는 것도 힘겨운데 누님댁도 들려 인사하기를 바랐으니 지금 시절이라면 이혼하자고 덤볐을 것이다.

철없는 새댁이었는데도 남편의 간곡함에 마음이 동했는지 어느 해 누님 집에 갔었다.

평범한 농가주택을 개조하여 밖으로는 농기구(쇠스랑 삽. 기타 연장들)와 각종 철물들을 파는 가게에 작은 뜰아랫방이 있었다. 시누를 찾아온 친정 동생댁을 위해 잡채며 불고기며 갖은 나물을 장만하셔서 조금 놀랐다. 오남매의 간식으로 만든 도넛이 소쿠리로 가득 담겨 있었다.

종일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틈틈이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었다. 아랫방에 동생댁을 위해 정갈한 이부자리를 펴서 따로 잠자리를 해 주시고 어린것들이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데워 놋대야에 담아 들여보내 주셨다. 형님이 늦도록 뒷일에 매달리시고 밤에 집에 온 아이들이 옆방에서 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며 맛난 것을 배불리 먹은 나는 따뜻한 방에 누워 편히 잤다.

부끄러운 기억 하나 : 고모님이 만들어주신 식혜를 아구아구 먹은 네 살배기 큰애가 그날 밤 반지르르하게 푸세 한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지엄한 시댁 큰 어른 집에 가서 어린 것 단도리를 제대로 못 하다니. 무서워서 젖은 요를 몰래 개켜놓고 왔다. 젖은 요를 그냥 두고 왔으니 오죽 칠칠맞게 보셨을까.

아침에 부엌으로 나가 아침밥을 거드는 시늉이라도 내야 될 올케의 신분임에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린 것에게 젖을 물리며 미적거리는 사이 동터올 시간에 밖이 수런거렸다.

이 새벽에 무슨 소리일까?

창호지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아이들이 마당을 깨끗이 비질하고 물건들을 가게 밖으로 내 놓고 수돗가에서 싱싱하게 세수를 하고 있었다. 이제 더 미적거릴 염치가 없다. 젖먹이를 눕히고 방문을 열고 댓돌로 내려설 때 그때 막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던 중학생 머시매.

“외숙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허리를 굽혀 우렁우렁 인사하던 그 머시매들. 그 애들이 바로 형님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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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에 시집을 간 큰 누님은 부지런하게 농사일을 하며 농기구 파는 가게를 시작하여 작은 마을에서는 잘사는 편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어찌나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는지 동네 유지들이 선산에 쓴 묘 터를 탐냈을 정도였다. 교육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적도 없는 분이 어떻게 그리 아이들을 엄하면서 인자하고 반듯하게 키워냈을까?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랴만 형님은 남달리 지혜로우셨다.

“나는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어. 아이들에게 말했지. 글을 배우면 이 어미도 가르쳐다오. 정말로 애들이 글씨를 깨우치더니 나를 가르쳐 주었다네.” 그때 배운 한글과 알파벳으로 지금은 컴퓨터도 할 줄 아는 팔십 노인이시니 참으로 부단히 노력하시는 분이시다.

인내하고 덕을 베풀며, 없는 이를 깔보거나 누르지 말고 노력하고 노력해라. 이렇게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머리 좋은 형제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척척 합격하여 작은 마을이 떠들썩했다. 그렇게 공부하여 관직에도 들어가고 기업에도 들어가 돈도 벌고 차도 사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잘난 자식으로 효도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랬으면 지금,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작은 몸피의 형님이 애간장이 검게 타서 저토록 기진하지는 않았을 것을.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둘째아들은 내란죄로 사형이 언도된 김대중 씨의 사건 진상이 일본잡지에 실리자 그것을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번역해 학교에 붙였다.

그것은 운명이었을까? 학교는 어린 학생에게 설명해 주지 않고 길로 내쫓았다. 그것 또한 운명이었을까?

퇴학은 큰길로 나서는 것과 몸을 섞어 그 애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생각해보면 암울한 80년대였으니 평범한 시골의 수재들이 도시로 나와 최초로 부딪쳐서 보게 된 것은 기성세대의 위선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엄격하고도 반듯한 교육은 아이들이 올곧은 성품을 지니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올곧은 성품에 제 스스로 한 가지를 길렀으니 그것이 바로 위선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용기였다.

젊은이들이 길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죽어가던 곳.

저항의 함성이 천지를 울리는 그 자리. 인간은 위대하며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죽는다 해도 인간을 위해 큰소리로 부르짖는 그 자리에, 형님의 오남매는 용기 있게 서 있었다.

형님은 작은 새 가슴을 떨며 그 애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노동운동으로 일생을 보내며 감옥에 가는 사위를 바라봐야 했고, 전교조로 불이익을 당하며 싸우는 딸들의 투쟁도 봐야 했고, 반미가 용공으로 둔갑하여 범죄자처럼 다루어지던 시대의 아들을 꼿꼿이 서서 지켜 보아야 했다.

수배. 체포. 고문. 투옥. 감옥. 그런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칼이 되어 형님의 가슴을 찔렀다.

출세, 좋은 새 차, 예쁜 손자들, 멋진 집, 우아한 며느리, 고급음식점, 행복… 늙어 그리도 잘난 자식을 두면 이런 단어들과 친숙하여 평화로워야 될 것을.

남편이 동두천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 대학생이었던 조카가 외삼촌을 찾아와 얼마 동안 기식을 하고 갔다. 그 애가 간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다는 아홉 시 뉴스를 보았다. 아마 수배를 당하여 잠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을까. 몸을 숨기기에 영내관사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바빠서 그 애를 눈여겨볼 시간이 없었고, 그 애는 아마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리가 전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나는 친정이 빨갱이 출신이어서 숨죽이고 사는 터였으니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우리 애는 용공이 아녀, 반미였을 뿐이라고.”

남편과 통화하며 격양된 매형의 목소리에서 평범한 두 분이 변화 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씩씩한 아들이 육사에 가기를 소원하셨는데 아들의 옥바라지를 통해 엉뚱하게도 사상무장이 되기 시작했다. 형님은 작은 체구와 연약함을 지닌 가난한 여자였음에도 아이들을 불의와 맞서 저항하는 강한 전사로 키워내신 것이다.

그렇게 살면 필연적으로 가난이 동반된다. 고향을 등지고 금호동 달동네에서 사실 때 형님 댁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좁은 골목을 숨차게 올라가며 남편은 눈시울을 붉혔다. 파출부로 일용직으로 고단한 삶을 꾸리면서도 당당하게 사시는 모습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허리 한번 굽히는 법이 없이 꼿꼿하시다. 혹시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미안했다.

어느 핸가 남편의 생일날 두 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거실에 빛나게 세워둔 남편의 훈장을 슬그머니 치웠다. 기념패에는 대통령 전두환이라는 글자가 상장의 임자인 남편의 이름보다 더 크게 쓰여 있어서였다. 사실 훈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준 게 아니었음에도 어두운 80년대, 감옥으로 사위와 아들을 보낸 두 분에게 조금 죄스러워서이었다.

그때 그 기념패를 치운 뒤로 다시는 거실에 뻔뻔하게 내 놓지를 못했다. 보국훈장 삼일장이라는 훈장은 전역 후 쓰레기봉투를 일 년에 몇 장 거저 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우리는 그 대단한 영광을 자존심으로 거절했다.










내 딸들은 자라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직업과 연결되는 대학에 입학했다. 형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전화 주셨다. 나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해요 형님, 형님은 아이들을 온통 다 내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우리끼리만 잘살려고 그러는 거 같아서요.” 그렇게 미안해하면서도 대학생 딸애 방에서 ‘껍데기를 벗고서’ ‘러시아 혁명사’ 따위의 책을 보면 간이 다 떨렸다.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바뀌어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어떤 격동의 시대에도 농부는 밭을 갈아야 되지 않겠니?” 아이들이 그 언저리에 가지 못하도록 획책한 비열한 수법을 아이들은 알아챘었을까.

딸은 졸업 후 입사한 보수적인 회사의 회식자리에서 윗분의 정치적인 견해를 듣다가 “아직도 조선일보를 보고 계신 분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은 젊은이가 있었다고 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조용해졌으며 기개 있는 젊은 동료는 그 뒤로도 묘한 왕따 취급을 당해야 했단다. 진보나 좌파는 무조건 버릇없이 세상을 뒤엎으려는 불손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보수집단에서 내 딸은 침묵했다.

나는 딸에게 잘했다고 하며 안도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비겁하니? 아니 그냥 알면서도 말 안 할 뿐이야.

얼마 전 아픈 손녀를 돌보러 딸네 집에 갔을 때 아파트 현관에 커다란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조선일보 넣지 마세요. 귀사는 신문지가 필요할 것으로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저는 더 이상 쓰레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실소했다. 그 뒤로 내용증명까지 해서 보내는 우스꽝스러운 싸움을 지루하게 하고 끝났다. 혹시 딸애는 보수집단에서 행동하지 않는 비겁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닐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한 움큼인 형님을 볼 때마다,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동안 혼자 아이들 키우고 밥벌이를 해야 하는 그의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빚은 조금씩 늘어갔다. 제발 그 짓을 안 한다면 어디 가서든 제 식구 제 밥벌이를 못할까.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그 애 인생에 관여하게 된다.

혼신의 힘으로 만든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그 흔한 감투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 애는, 감옥에서 그리고 낭인으로 그렇게 살았다. 사면조차 거절하여 끝까지 형기를 마치고 나온 조카를 출소 이튿날 둘째딸 시집보내는 식장에서 만났는데 너무도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은 더 깊어지고 맑았다. 그런 조카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불행한 서거는 얼마나 무서운 충격이었겠는가.

먹지도 자지도 않아 늙은 어머니에게 또다시 칼을 꽂는 아픔을 드렸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울었다.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그 애와 동지이면서도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영상을 보았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운 것이 없다. 가난한 남자들의 희고 청결한 우정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그러나 조카는 다시 일어섰다. 그 비통을 딛고서.






내 조카, 안희정

우리는 그 애를 도와줄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애를 모른 척 해주는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임에도, 처절한 가난과 날이 시퍼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행여 아는 척 하다가 오히려 불편함을 줄까 염려되어서였다.










노매드 관광청에 연재를 한 지도 6년이 넘는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고, 이런저런 수다 글 따위로도 제법 독자가 생겼다. 환갑이나 되었으면서도 싱싱하게 젊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젊음으로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에게 가장 쉽게 마음을 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편안한 미소, 잡아주는 따뜻한 손, 혹은 가만히 건네는 술 한 잔, 작은 엽서에 적은 한 줄의 싯귀,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마른 꽃잎 한 장, 너를 기억한다는 따스한 음성…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묵은 설거지를 하고 마른걸레로 싱크대 위를 윤나게 닦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세탁기를 돌릴 때보다 햇빛 좋은 날 빨래비누로 치대어 말갛게 헹군 하얀 블라우스를 바지랑대 걸쳐 널 때 마음이 착해진다.

그 착한 것들은 다 맨손으로 하는 것들이다. 그냥 맨손, 그렇게 맨손으로 그 애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제 늙으신 나의 형님 내외가 단 한 번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꼬부라진 허리를 펴고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이 깃들기를, 맨손으로 기원한다.

희정아. 네가 간 그 길이 진정 옳았다고,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구나.

제주도에 사는 안희정 외숙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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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충청남도지사 투표권을 가진 분들에게~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5-30 19:29 
    빛고을에서 산지 20년이 지나 제2의 고향이 되었지만,  원래 내 고향은 충청남도 당진이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74년 4월 22일, 고향을 떠났다.   지금은 작은어머니와 사촌들이 살고, 아버지 산소가 있어 두세 해 걸러 다녀온다.   이번 선거에서 '멍청도'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   충청남도에 사는 분들은, 이 글을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2. Broken Heart
    from 木筆 2010-05-31 10:16 
    broken heart >> 접힌 부분 펼치기 >> << 펼친 부분 접기 << 마음이 무겁다. 늦은 점심에 졸음이 밀려와 의자에 눈을 붙인다. 그래도 몸은 편치 않고 갑갑한 마음이 더해진다. 사무실을 조금 일찍나와 뭔가 마음의 가닥을 풀 꺼리를 찾지 않으면
 
 
... 2010-05-3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무현의 남자들은 다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이네요... 참 운도 없고, 복도 없는 가여운 양반이었는데, 그래도 인복은 많으셨던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그나마 그게 그 가여운 분을 지탱했겠구나 싶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폭설 2010-05-30 17:49   좋아요 0 | URL
저도 고맙습니다.^^ 노무현의 남자들 바야흐로 활짝 피어나서
노무현 대통령이 못다이룬 꿈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다려 보자고요~~~

2010-05-30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30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봉하 마을을 다녀왔다. 세상에 비도 비도 어쩜 그리 많이 내리는지... 아침 7시 출발부터  추도식이 끝날 때 까지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줄기차게 내렸다. 미리 우산과 비옷을 준비해 가긴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요긴하게 소용될줄이야.  

삼 십 줄 비혼 조카와 갓 마흔의 기혼 조카, 여자 셋이서 갔다. 진영역에 내리니 사람들이 북적북적.. 택시 없나 살피니 봉하 행 버스가 준비되었다며 자원봉사자가 안내하기에 버스를 타고 공단 공터에서 내렸다.

하여, 그곳 들머리부터 걸어갔는데 순식간에 빈틈없이  줄이 길게 이어졌다. 마을에 도착하여서는 나눠주는 노란 리본을 달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선물이라는 노란 술떡도 받았다.
추모장 곳곳은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염두를 못내고 부엉이 바위 아래 추도식 장소로 이동했다. 아무리 비가 내린다 해도 우리야 저 한몸만 챙기면 되었지만 안내하는 노사모 봉사자 분들은 수고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긴 했어도 그 비가 걸리적 거린다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나만이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런 것 같았다. 그저 내리는 비마져도 좋았다. 혹 노무현 대통령이 비가 되어 우리들을 감싸는 것은 아닌지.... 나무들도 그렇게 느끼는 듯 비 맞은 초록의 나뭇잎들은 풋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좀 이른 시각(10)에 도착했기에 2시의 추도식 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 딱히 한 것도 없었다. 우산 들고 돌아다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것 같아 일찌감치 부터 식장 의자에 앉아서 무작정 기다렸다.


우리만이 아니고 미리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기에 자연스레 따라 앉은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사니 구석구석 답사하는 일은 다음에 해도 되기에... )아무튼, 그렇게 미리부터 앉아서 고개만 한 바퀴 씩 돌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엉이바위, 사자 바위를 봤다가 초록의 나무들을 봤다가 오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셋이 이야기를 조금하다가....그리고 대부분은 빗소리와  비의 향기와 비의 자태를 감상하며 어찌 보면 무심이고 또 어찌 보면 충만함으로 마냥 앉아 있었다.

.......
이윽고 추도식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전 보다 더 빗발이 거세어져 조마조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찬 빗발에도 불구하고 단상위도 아래도 흐트러짐 없이 추도식을 엄수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앉은 뒤가 궁금하여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다 ‘까악!’. 수만 개의 눈동자가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적에 울컥 눈물이 났다. 
 

부엉이 바위 아래와 정토원 가는 길의 나무들 사이사이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서있었는데 나무와 사람이 그렇게 잘 어우러지는 것 또한 처음 보았다. 다시 단상으로 고개를 돌려, 조금 떨리는 사회자의 목소리, 이해찬 총리와 도종환 시인의 추도사와 시.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아침이슬....

(풋~ ‘나는 합창이 좋은 줄은 모르겠어’ 하며 불과 한 시간쯤 전에 무슨 얘기 끝엔가 조카가 말했었다. 그랬었는데, 비를 맞으며 연습도 없이 즉석에서 어우러진 수 만 사람들과의 공명에 합창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느낀 그녀는 몇 번이고 감탄하였다.^^)

식이 끝나고 묘역으로 가니 님의 묘비엔 이미 수많은 국화 송이가 덥혀 있었다. 박석은 미리 위치를 확인하고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찾아도 내 박석이 어딘지 모를 것 같았다. 미리 위치 확인을 하고 왔다 해도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자기 박석 찾는다고 헤매다간 민폐 끼치기 십상.^^

수많은 사연이 새 겨진 박석의 글귀를 드문드문 읽으며 묘역을 벗어나 시각을 보니 그럭저럭 3시 반. 그냥 오려니 섭섭하여 국밥 집에 들러 국밥 한 그릇 씩 먹었다. 배도 고프고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심정도 생각하여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루룩 순식간에 다 먹었다.

기차시간 까지는 여유가 있었으나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자니 역시 우린 빨리 나가주는 게 돕는 일인 것 같아 역으로 향했다. 공단 공터에 오니 임시 버스를 타려는 줄이 또 어마어마해서 일단은 걷기로 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줄도 끊임없이 연결되어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애초에는 한 30분 걷다가 택시타고 가자였는데 걷다보니 역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시간을 따져보니 봉하 마을에서 진영역까지는 두 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한시간정도의 시간이 남아 역 근처 중국집에서 시간도 때울 겸 짬뽕을 먹었다.

짬뽕을 기다리며 티비를 보는데 전교조 선생님들을 대량 해임, 파면한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참말로 가지가지. 소름이 끼쳤다. 그 어디보다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할 직업군인데 시민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할 일을 했거늘 상은 못 줄망정 해임이라니. 파면이라니. 공무원법에 어긋났다면 경고 조치를 하든가 해야지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다니.

이래저래 투표가 중요하겠다.

......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호실은 같으나 내리는 곳도 좌석도 제각각 달라 모두 떨어져 앉았다. 집에 오니 저녁 8시 30분. 나의 외출을 허락한 가족에게는 아부의 선물이 필요했기에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사서 선사를 하고 결정적으로 가방속의 술떡을 꺼냈다.

“ 자, 묵어라. 노무현 대통령의 선물이다. 조카들것 같이 먹고 내 것은 개봉을 안했다. 여러분 줄려고. ㅋ ㅋ”

그러고 보니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 들고 하루 종일 밖에 있어보기도 난생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감사한다. 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싶다. 게으른 중생이라 많은 실천은 하고 살지 못하겠지만 항상 잊지 않고 님의 뜻을 생각할 것이다.^^

(다음날 문득 궁금하여 박석 위치를 확인해 보니, 두 개의 박석 중 하나는 워매~ 무척 찾기 쉬운, 대통령 묘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조카의 문자 왈 ‘와~ 박석 완전 대박이데’ 뭐 어딘들 대박 아니랴. 박석의 기회 또한 감사하고 박석 값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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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중화방송에서 <첨밀밀>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 영화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늘 지나쳤던 영화였는데 장만옥이 함께 살고 있는 조폭 두목 동거남을 보고 '오빠'라 해서 띠잉~ 받혀서 채널을 고정하게 되었다. 모양새로 봐서는 분명 애인 역할인데 자막에서는 장만옥이 자꾸 그를 일러 '오빠'라고 하기에 혹시 진짜 오빠 맞나 싶어서 계속 보니 역시 친오빠가 아니고 애인 맞았다.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남의 나라 말을 번역할 때조차 연인을 오빠로 번역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영화 대사란 게 한눈에 척, 쓱싹쓱싹 읽고 지나가게 눈에 뛰게 번역해야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호칭이므로 그런 묘미가 필요한 단어는 아니다. 실지 중국 사람들이 애인(연인)끼리 서로 부를 때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빠'는 아닐 것이다.

 

혹시, 오빠라는 말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냐구? 그런 것 없다. 다만 오빠라는 호칭이 그 다정한 어감만큼 행복을 가져다주기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주부로서 10여 년 살면서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후배들을 지켜보니, 그렇게 불리는 남편들은 그 오빠라는 말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지 결코 아내에게 너그러움으로 베풀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연예인 부부들 너무해

 

요즘 TV에서 보면 부부 이야기쇼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한 프로들을 보면서 놀란 것은 거의 대부분의 여자 배우자들이 자기 남편을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석에서라면 몰라도 집에서라면 몰라도 어떻게 공중파에다 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 불가다.

 

때문에 몇몇 그런 방송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그것을 만드는 방송사 PD가 왜 그들의 호칭을 정정해 주지 않는지 의아하고 의아했다. 이제 남편을 오빠라 함은 빼도 박도 못할 대세인가. 그러나,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애들 키우고 살면서 남편에게 오빠라 할 수 있나. 물론 호칭은 호칭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이란 게 또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부름으로서 의미가 반영되고 굳어지는 것이다.

 

오빠, 좋다. 그러면 오빠라 부를 경우 누구에게 득이 될까? 각각 집 사정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가부장적 남편의 경우 오빠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 그 권력을 휘두르기 쉽다. 반대로 유약한 남편의 경우 오빠 소리는 듣지만 늘 시달리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빠라 부르면서도 서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앞에서도 말했듯 하루 이틀 사는 결혼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게 흐트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럴 경우 이 오빠라는 말은 평등을 이끌어 주는 말이 아니다. 부부 사이는 나이차를 떠나 평등한 사이인데 평등하지 않는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좋지 않다고 본다. 즉, 여차하면 오빠가 지 맘대로 함부로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오빠를 종 부리듯 부릴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부부가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되려면 우선 호칭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하면 그 드라마에 나오는 부부(연인)들이 어떤 호칭을 쓰고 존대는 쌍방인가 일방인가를 보는데, 그 하나만으로도 그 드라마의 품격(?)을 가늠할 수가 있다.

 

드라마 상에서만 봐도 서로 '여보당신' 혹은 '00씨' 하며 존대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사이가 좋다. 반면, 가부장적인 남편이 아내에게 존대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호칭은 이처럼 중요하다. 오빠 소리 들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존대하긴 힘들 것이다. 존대하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오빠라는 말은 평등한 부부가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단어임의 방증일 것이다.

 

평등한 호칭이 좋은 부부관계를 이끌어....

 

이러니 시절을 몰라도 너무 몰라보고 구닥다리 같은 주장만 하는가 싶어 의기소침해 지기도 하는데 남들의 생각은 어떤지요?

 

평소 부부간 호칭의 평등이 그 부부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기에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이는지, 최수종 하희라씨가 인터뷰 할 경우 항상 서로를 일러 '최수종씨는...' '하희라씨는....' 이라고 하는 것이 무척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세창 김지연씨 부부도 서로의 이름을 잘 불러주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항상 의문이 드는 이는 김보민 아나운서였다. 이분은 명색이 아나운서인데 김남일선수를 일러 '오빠'라고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어느 프로에선가는 아나운서로서 표준말에 대해 항상 긴장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남편을 일러서는 오빠라고 하였다.

 

물론 이 부부는 깨가 쏟아져서 오빠라고 부른다 해서 서로를 함부로 대할 사람들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김보민 '아나운서'아니신가? 아나운서가 '오빠'라는 말을 그렇게 오용하면 우리 보통사람은 누구를 따르라는 말인지.

 

둘이 있을 때야 뭐라고 하든 적어도 공중파에서 만큼은 모두들 호부호형(呼夫呼兄)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그냥 영원히 연인으로 산다면 모르겠지만 자식 낳고 살고 그 자식들 점점 커가고 하는데 여전히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글쎄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계속 그렇게 호명하다 이다음에 자식들이 결혼하여 며느리를 맞아서도 머리허연 남편을 일러 '오빠'라고 한다면?

 

혹,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만 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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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5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