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2026이라니. 비현실적인 과학공상영화속의 년도 속을 살고 있는 느낌이다. 여고시절, 2030년대는 내 나이 60대인데 그때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는 했는데.... 이제 머지 않아 내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게 생겼다.


지나온 세월이 꿈만 같다. 올해는 우리나이로 59세. 29세때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날때의 떨리던 마음이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이 벌써 30년전이라니. 그사이 두아들은 28세 25세가 되었다. 남편은 명예퇴직후 몇년을 더 연장받아서 아직은 아침마다 출근을 하니 확실한 퇴직의 상실감은 유예중인것 같다.


나는 육아와 약간의 알바와 주부연한 삶을 살면서 30년을 보냈다. 어찌보면 별 풍파가 없었지만 사회속에서 치열한 삶은 살지 못했다. 이제 자식들도 다 성인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 뭐라도 좀 하면서 살아야 되는게 아닌가. 그러나 서리 내리는 나이에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라니 언감생심이고 그저 지난 30년이 그랬듯 개인적인 추구와 자연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동반한 채 조용히 살아가겠지.


2025년 봄은 산티아고가 있어서 특별한 한해였다. 지난 12월은 꿈에 그리던 차마고도를  

걸어볼수 있어 감사했다. 몇년전만해도 나에게 있어 차마고도는 거의 꿈이었는데 이제는 추억의 한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나이가 드니 성격도 변하는것 같다. 변하는 내 성향을 순간순간 들여다 본다. 


새해이니 늘 그랬듯 여전히 소박한 꿈들을 꾸어본다. 산티아고를 다녀온후 듀오링고앱으로 작심 6개월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를 하다 지금은 겨우 출석만 이어가는 중인데 다시 시작해야겠다. 돈만내고 별로 보지 않던 넷플릭스를 오랜만에 클릭해보니 언어지원이 많이 풍성해져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외국어 공부를 할수있는데... 그게 참 어렵고도 어렵다.~~ ㅎㅎ


거북이 처럼 엉금엉금이라도 멈추지 말고 공부해야겠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모국이 하나 더 생기는것과 마찬가지 인것같다. 차마고도 가서 독학 중국어를 마음대로 해보는데 통하니 짜릿했다.  


산티아고 순례기도 정리중이다.  800km를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 걸음걸음마다 감사함 마음이 이니 묘하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은 52% 도전했다. 작년에 60프로 달성하자 맹서했건만 못했다. 올해는 70%까지는 확실히 올리자고 다짐해본다.



냉동인간의 산티아고 순례기 3


오랜만의 유럽, 긴 비행의 시작(출발, 경유 그리고 도착)

 

부산 김해공항 출발

 

2025330. 나답지 않게 1년을 준비하여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그 첫발을 떼었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국은 오후 540분이었지만 1시간20분 정도 걸리는 공항에 가기위해 오전 1130, 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을 나섰다. 혹시나 무슨 변수라도 생길까봐 일찍 출발했는데 교통 흐름이 좋아 일러도 너무 일찍 도착하여 공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김해 공항은 한산하였다. 국적기가 아닌 중국 항공사를 선택했기에 중국 비행기 안 풍경은 어떨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나랑 같은 상해항공에다 상하이를 경유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가는 스페인 교포여성(이하 마드리드 언니)을 만나 잠시 얘기를 하다 긴장감이 해소 되었다. 좌석이야 다르다 해도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과 같은 항공기를 타고 상하이 푸동공항까지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도 잠시 첫 발권 수속 시작부터 가슴이 철렁하였다. 입출국 공항을 편도로 달리 끊은 것이 문제였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국하여 상해 푸동공항을 경유하여 파리샤를드골 공항에 무사히 내리는 것이 나의 1차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김해공항의 상해항공사 직원은 내 비행기티켓을 발권하기에 앞서 샤를드골공항에서 스페인 땅까지는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 파리에서 스페인국경을 넘는 교통수단의 티켓이 있어야 발권이 된다고 하였다. 지갑을 뒤져 샤를드골공항에서 비아리츠(BIQ)공항행 비행기티켓과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행 기차표 복사본을 찾아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는 거잖아요.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어떻게 넘으실 건가요?
걸어서 갑니다. 45일을 걸어서 순례하고 마드리드를 통해 귀국할 예정입니다.”

걸어서 간다고요?”

. 프랑스 국경지역에서 하루정도 걸어가면 스페인 땅이에요.”

 

직원은 재차 프랑스에서 스페인 땅 넘어가는 열차든 버스든 증빙이 되는 티켓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직원이 너무 단호해 보여 떠나기 전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늘이 노랬다.

프랑스에 불법 체류할 생각 하나도 없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인 생장피드포르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코스중의 하나라 프랑스를 잠시 거쳐 갈 뿐이에요. 그곳으로 향하기 위한 비아리츠 공항 행 비행기 표도 있고 기차표도 있는데 안 되나요?”

 

프랑스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는 것 말고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하는 티켓이 필요해요.”

, 그것은 걸어서간다고요.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고요. 산티아고 순례라고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걸어서 분명히 갑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겠다며 열심히 준비한 지난 1년이 출발도 못해보고 막히는가... 발에 물집 같은 거 없이, 여타 아픈 것 없이 완주하겠다며 집 앞의 486m 산을 가뿐하게 오르고 강변을 10킬로미터 이상씩 달렸다. 20층 계단 오르기 5~10회 혹은, 걷기 2만보 이상, 헬스장 트레드밀 7킬로 이상 등을 번갈아가며 하루에 한두 가지씩은 꼭했다. 그렇게 요란을 떨며 1년을 준비했는데 그냥 돌아가야 된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김빠진 맥주 곱하기 100, 1000배 김빠질 일이었다.

 

잠시 후 완고하게 안 된다던 직원은 너무도 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면 증명서를 한 장 써줄게요.”

 

...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직원은 긴 내용이 적힌 서류 상단에 영어로 이 사람은 걸어서 프랑스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붉은 볼펜으로 적어주었다. 나는 그 종이를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비행기도 못 뜨고 나의 순례가 막을 내리는 줄 알았는데 천만 다행이었다.

 

짐 검사를 하고 출국대기를 하면서 여분의 배터리도 있고 해서 배터리 걱정 없이 폰을 사용하였다. 그러다 잔 여량이 50프로 이하라 충전을 하려는데 갑자기 충전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폰에 충전기를 꽂으면 충전이 되고 있다는 표시가 떠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폰이 고장인지 배터리가 불량인지 충전기 선이 문제인지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해왔다. 만약 폰이 고장이라면 폰 없이 순례를 해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니 또 아득하고 막막했다. 폰 공 기계를 가지고 올까 생각하다 마지막에 까먹은 것이 생각났다. 다음부터 개인 여행 시에는 여권 복사본과 함께 휴대폰 공 기계는 필수임을 뼈에 새겼다. 공항 안 어디서 배터리 혹은 충전기를 산다는 말인가.

 

상하이 푸동 공항에서 경유

 

수심을 가득 안은 채 어쨌거나 김해공항에서 나의 비행기는 17:40분 출발하였고 19:30분 경유지인 상하이 푸동공항 무사히 안착하였다. 이제 환승이 문제인데 하필 비행기 앞자리에 앉아 일찍 나오고 보니 뒤를 졸졸 따라만 가는 일이 불가했다. 그래서 트랜스펄(Transfer) 글자를 찾다가 사람들이 줄서서 대기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뭔가 그쪽은 아닌듯한 느낌이 들어 안내직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보다 나이가 연상인 듯한 여성분(이하 독일 언니)이 한국말로 환승 어떻게 하는지 나보다 더 불안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우리 같이 찾아봐요.”

 

긴장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긴장되는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나는 독일 언니와 함께 공항 직원에게 환승 경로를 확인받으며 계속 앞으로 전진 하여 기내 수화물 심사대까지 도착하였다. 수화물 검사 장소에 도착하니 과거 패키지여행 때 환승 또한 기내 수화물 검사부터 다시하며 시작했던 게 생각이 났다.

 

다시 한 번 더 배낭과 보조가방을 검색대에 통과시켜야 되는데 내짐을 심사하려던 찰나 공항 검색대 컴퓨터가 작동이 잘 안되었다. 직원은 당황해하며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드렸고 다른 직원은 검색대위의 내 짐바구니를 다시 뒤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계속 컴퓨터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나는 어머나! 내 지갑, 내 여권이 계속 검색 바구니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 심히 불안하였다.

 

배낭이야 옷과 생필품뿐이니 없어진다 해도 그만이지만 여권과 지갑은 앞으로 펼쳐질 내 45일의 생명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의 나라 물품 심사대에서 뭔 일이야 없겠지만 내 마음만이 공연히 불안하고 안달이 났다. 그래서 내 물건이 있는 지점에 눈을 떼지 않고 있는데 잠시 후 직원이 옆 검색대로 옮겨가라고 하였다.

 

바디랭귀지를 썩어가며 마이 백?’을 말하니 직원은 손짓으로 가방도 그 쪽 검색대로 옮긴다는 시늉을 하였다. 옆 검색대로 옮겨가자 뒤쪽 검색대의 잠긴 문도 열려 내 짐이며 내 짐 뒤에서 검색을 대기하던 승객들도 옆 검색대로 옮겨와 다시 줄을 썼다. 이번의 컴퓨터는 정상 작동 되었고 내짐이 나왔다. 먼저 나와 있던 마드리드 언니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고 독일 언니는 검색대 통과한 언니의 노트북을 한 번 더 검사한다며 되돌리는 바람에 다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금방 되돌려 받았다.

 

과거 패기지로 푸동공항을 몇 번 이용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게이트가 많고 넓은 줄 몰랐는데 이번에 제대로 구경했다. 나는 134번 게이트 마드리드 언니는 120번대 그리고 독일 언니는 22번 게이트였다. 독일 언니와는 숫자의 차이가 상이하여 우선 독일 언니네 게이트를 먼저 찾았다. 길이 아주 길었다. 독일 언니는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딸네 집에 간다고. 나이는 60대 중반인데 보다 젊었을 때는 여동생이랑 렌터카를 빌려서 유럽여행을 많이 하였다고.

 

세상에는 용자가 그 얼마드뇨? 그 용기 제가 삽니데이.”

 

진심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딸이 독일에 살고 있는 큰 딸을 만나러 또 가는지. 뿐인가. 상하이에는 둘째 딸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딸들의 전성시대, 코리아우먼의 전성시대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22번 게이트 찾아 항공편명과 비행시간을 확인한 후 여기서 기다리시면 된다하고 우리는 돌아 나왔다. 게이트 위치가 워낙 달라 마실을 오갈 처지는 아니었다.

 

독일 언니는 게이트를 찾아 안착한 것만도 감사해 5시간대기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노트북으로 영화 두 편 보면 탑승할 시간이 되는 것이라고. 여러 번 상하이를 경유하고 내렸음에도 오늘 만큼 당황스러운 적은 없었다고 하였다.

 

독일에서 상하이를 경유해 한국으로만 왔지 상하이 경유로 독일 가는 것은 처음이라 그랬나 봐요.”

저는 나 홀로 경유가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는데 언니가 말 걸어 주어 바로 안심이 되었어요.”

 

작별인사를 하고 마드리 언니와 나는 우리들의 게이트를 찾으러 갔다. 둘이 찾으니 역시 든든했고 나의 134번 게이트와 언니의 120번 대의 게이트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마드리드 언니는 나의 게이트에 앉자고 하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다시 폰 충전을 시도 했는데 이런 아무 일 없었던 듯 충전이 잘 되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마음의 근심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뿐한 마음으로 마드리드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아들둘이 군대도 갔다 왔고 큰아들은 올해 졸업, 둘째는 휴학, 남편은 명예퇴직 후 재계약을 하였는데 그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제 나는 자유다! 호호호~’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언니는 어릴 적 아버지 사업을 따라 스페인으로 이민을 와 스페인에서 자랐으며 (아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도 잘하였다.)우연히 무슨 박람회에서 통역을 하다가 계속 비슷한 역할을 엮어나가다 뜻하지 않게 통역가이드로 쭉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장시간의 패키지 가이드는 힘들어 못하고 스페인 공인가이드로 한 달에 2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스페인 그라나다지역에서만 전문가이드로 일한다고 하였다.

 

언니는 또한 1살 연하의 스페인 공무원인 남자와 결혼했고 딸은 파리유학중이라고 하였다. 스페인은 전 국민이 연금이 나오는 등 복지제도가 잘 되어있다고. 외국남자와 사는 장점과 단점을 물으니 가정적인 것은 좋은데 너무 뭐든 같이 하려는 게 다소 힘든 감이 있다며 살포시 웃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본 사이임에도 두 여자는 폭풍수다를 떨며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보았고 사진을 찍고 전화번호를 교환하였다. 언니는 푸동공항에서 마드리드공항으로 나는 푸동공항에서 파리 샤를 드골공항으로 최종 목적지가 갈라졌다.

 

순례기간 동안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해요.”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샤를 드골공항 도착

 

상하이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 까지는 장장 12시간 30분 아니 13시간 걸렸다. 유럽은 2018년 스페인 일주 후 처음이니 장시간 비행에 아주 주리를 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자는데 내가 제일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좌우 옆 뒤 다를 미동도 없이 꿀잠을 자는데 나는 좌로 취침 우로취침 앞으로 취침 뒤로 재껴 취침...아오! 그 말할 수 없는 불편함, 허리가 뻐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모진 시간들이 지나고 착륙이 다가왔다. 무사착륙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었고 승무원들에게 무언으로 마음을 전했다. 나 하나로 축약하자면 나 하나 김해에서 파리공항으로 데려다 주기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지 진정 새삼 고마웠다.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승객의 비행으로 확대하자면 그 적은 인원으로 각기 요소요소에서 혹시라도 업무에 잘못이라도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저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에 무한 감사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비행 뿐 만 아니라 늘 누군가들의 조용한 움직임으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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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축복기도

 

그런데 내 나이 60세 전에 용기가 생겼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집 뒤 작은 산의 등산로에서 맨발 걷기 하는 분을 만났다. 나도 맨발 걷기를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진짜 맨발걷기 효험을 보았는지 물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알았다.

 

냉담 30년 글라라, 가톨릭 신자만 보면 반가워서 세례명을 묻고는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아네스 언니는 성당에 나오라 하면서 글라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나는 부담스러워서 마음은 감사히 받고 대신 그 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가톨릭은 좋아해도 매주 성당에 다니는 일은 생각 만해도 갑갑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한번 씩 가면 그날의 미사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고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런데 한곳을 정해두고 가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글라라 기도는 끝이 없어요. 하다보면 기도할일이 점점 많아져요. 그리고 기도할일이 왜 없어요? 기도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아네스 언니는 아무 생각 없이 던졌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기도 할 일이 있을 텐데요.’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한 달여 후, 엄마는 일생일대의 삶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나는 다시 언니를 만나 기도에 대한 의미를 오해했다며 정말 기도하는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언니는 자기네 성당에 한번 가자고 하였다. 나는 언니의 마음이 고맙다며 올해 안에 한번은 꼭 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이왕 갈 거 미리 가서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또 엄마가 돌아가신 이 시점에서 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성당엘 가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청소년기에는 찬송가와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 교회를 다니곤 했었는데 성당의 성가대도 너무 훌륭했다. 신부님 또한 성악가 못지않게 성가를 잘 부르셨다. 미사 후 언니는 신부님에게 축복기도를 받자하며 나를 데리고 갔다. 이미 몇 명의 신자들이 기도를 받고 있었다. 언니는 신부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신부님, 글라라 30년 냉담인데 기도좀해주세요.”

 

신부님은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 뭔가 침묵의 기도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부님은 내 머리에 올려놓은 손을 쉬이 내려놓지 않았다. 나도 순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자신의 손을 들어 정수리에 올려보시라. 금방 손의 열기와 정수리의 열기가 만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부님은 내 머리에서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손을 얹고 계시는 것일까. 그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는데 물리적 시간은 한 1분정도 되지 않았을까. 한참 후 손을 떼신 신부님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 30년 냉담하더니 냉동인간 다 되어뿟네!”

 

뭣이라고요? 냉동인간요? 라고 되묻지는 않았지만 냉동인간이라는 그 어휘는 무언지 모르게 무척 강렬했다. ! 하고 웃음이 터지려다 말며 한편으로는 신부님의 부정화법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은 달콤한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말로 해도 성당 나올까 말까인데 냉소적인 뉘앙스로 일침을 놓는 문장이라니. 그러나 그 강렬한 문장은 이따금씩 자꾸 생각이 났다.

 

말인즉슨 맞는 말이잖아? 그리고 곱씹을수록 냉동인간이라는 말은 내 가톨릭에 대한 고집불통에 닿아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세례의 길로 이끌어주신 수녀님은 한 번씩 만날 때마다 말하였다.

 

글라라 아직도 성당 안 나가나? 이제 갈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매번 똑같은 말을 하였다.


지금은 아니고 이다음에 언젠가는 갈수도 있겠죠. 수녀님 성당 못나가서 죄송해요. 대신 늘 보다 선한 마음으로 살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다 블랙야크 100대명산도전의 일환으로 경남 화왕산에 갔을 때였다. 하산 길에 광주에서 오신 두 수녀님을 만났다. 둘째언니와 내가 쉬고 있는 벤치 앞을 두 수녀님이 지나치려했다. 나는 성당은 다니지 않으면서도 길에서든 어디에서든 수녀님들을 보면 반가웠다.

 

수녀님 의자에 잠시 쉬었다 가세요.~”

그럴까요?”

 

그 수녀님들은 너무도 쉽게 나의 제안을 받았고 옆의 다른 의자에 않았다.

 

나는 수녀님들을 뵈니 갑자기 신부님과의 일화가 생각난다면서 예의 그 냉동인간 얘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그중 한분 수녀님이 말씀하였다.

 

그럼 제가 다시 기도 해드릴게요.”

 

그래서 얼떨결에 화왕산 하산 길 어느 벤치에서 이름도 모르는 전라도 광주에서 오셨다는 수녀님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았다. 글쎄 한 10분쯤 수녀님은 주님 글라라를 위하여....하시고...하시고... 하시옵소서 아멘하면서 기도를 해주셨다.

 

광주 수녀님의 기도도 냉동인간 때처럼 내 마음에 믿음의 느낌으로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않았지만, 처음 본 수녀님이 산행지에서 나의 일화를 듣고 선뜻 기도를 해 주시겠다는 마음 자체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런데 그 두 번의 기도는 나의 산티아고 행을 앞당겼다. 심리적으로 왠지 지금 산티아고를 가도 될 것 같았다. 가도 아무 일 없이 모든 일이 잘 돌아갈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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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별이 된 엄마

 

97이라는 숫자를 마지막으로 세며 나의 엄마는 2년 전 4월의 마지막 날, 멀고먼 또 다른 세계의 별이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어언 19년 만의 일이었다. 200480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자식들의 소원은, 혹은, 농담은 엄마가 아버지 없이 1년이라도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려 19년을 엄마는 더 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혼의 세계 따윈 있다 해도 믿고 싶지 않고 오로지 내 오관으로 생각하고 보며 이 세계를 인식하고 싶었다.

 

그런데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엄마가 돌아가니 뜬금없이 영혼의 세계 같은 보이지 것들에 관심이 가졌다. 더 이상 저작이 안 되어 밥을 끊고 21일 정도 두유와 미음과 물로 서서히 양을 줄여가다, 티 없이 맑고 따뜻하고 고요하던 4월의 마지막 날 오후, 엄마는 다른 차원으로 떠났다. 따뜻한 오후의 봄날 그 말할 수 없이 평화롭던 오후의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복이 엄마를 위해 마련한 깜짝 선물 같았다.

 

엄마는 아픈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기 마지막 일주일전까지도 엄마는 좌로 취침, 우로 취침을 스스로 했다. 그리고 복기해보니 돌아가기 며칠 전에는 크게 하품을 여러 번 했는데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세상걱정 없어 보였다. 친척 어르신은 엄마가 자리보전하며 시간을 오래 끌 것 같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였다.

 

저렇게 세상 걱정 없어 보이고 아프다 신음소리도 없는데 어떻게 빨리 가시겠나. 오래 시들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엄마와의 이별을 지금 당장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안도와 함께 한편으로는 엄마가 고생을 하며 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 우리엄마는 다를 것이다.’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엄마가 생의 마지막을 햇살 좋은 봄날의 거실에 고요히 누워서 자신의 인생 파노라마를 다 돌려보고 멋지게 갈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바람이고 내 상상이고 현실은 엄마의 상태가 장기화 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큰오빠와 큰방에서 상의하였다. 평생 효자로서 지극했던 큰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엄마의 마지막만이라도 손을 보태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얘기하다 엄마기저귀도 갈고 물과 미음도 드리려고 거실의 엄마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엄마를 안았는데 뭔가 살짝 이상했다.

 

엄마! 엄마! 물이라도 좀 듭시다.”

 

엄마의 목을 감싼 손으로 고개를 바로 해보는데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벌려보았다. 한 번도 경험이 없지만 책에서 읽은 것에 의하면 돌아가기 전에 혀가 말려들어간다고 하던데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가 싶었다. 엄마의 혀는 검붉게 굳어있었다. 서둘러 큰방의 큰오빠를 불렀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자 평생 엄마 옆의 또 다른 효자였던 청각장애인 둘째 오빠도 엄마 곁으로 다가왔다.

 

엄마의 귀밑이며 턱밑, 그리고 코끝에서 엄마의 숨결을 느껴 보려 해도 이미 우리 자식들의 감각이 혼미해져 엄마가 아직 이승을 헤매고 있는지 이미 저승을 떠났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우리는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끼며 119를 불렀다. 119는 두서없는 우리의 얘기를 듣더니 자신들이 갈 때까지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하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큰오빠와 번갈아가며 심장마사지를 하는 가운데 119 구급대가 왔다. 그들은 산소포화도 등을 말하며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았음을 확인해 주었고 심장이 멈춘 경우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올 때처럼 갈 때도 서둘러 떠났다. 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니 경찰차가 도착하였고 경찰차가 떠나자 다음 순서의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렸다.

 

산골동네에 한 시간 여 만에 서로 다른 마크의 차량이 세대나 도착하고 동네사람들의 묵묵한 시선 받으며 엄마는 그렇게 또 다른 차원으로의 단장을 떠났다. 장례식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삶과 죽음의 존재방식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 듯 명쾌하게 3일 만에 엄마를 고향선산 아버지 옆에 푸른 잔디로 감싸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야 모두들 싫어했기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면 엄마는 다르지 않는가. 엄마가 돌아갔다는 것은 온 우주가 무너지는 것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자식들인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엄마가 돌아가도 세상은 이변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은 가야 하는 길 엄마가 아프다는 신음 한마디 없이 돌아가서 너무 감사했다. 큰언니는 말하였다.

 

어쩌면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아야!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을 수 있는공?”

언니 나도 그게 너무 신기하다. 엄마에게 아름다운 마지막 보여 달라, 엄마는 할 수 있다, 흔들릴 때마다 관세음보살 알겠제? 하면서 염주도 사주고 했지만 그리고 살짝 기대도 했지만 엄마가 이렇게 고요하게 갈 줄이야.”

 

그러게 말이다. 엄마 정말 여문 사람이었데이. 마지막 까지 정신 줄 안 놓고 고고하게 갔네.”

나도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 새삼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처럼. 삶의 마지막을 엄마처럼 맞이할 수 있다면... 맞이할 수 있을까.”

 

살아서하는 작별인사

 

무엇보다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도 자식들 모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돌아가기 보름 전에 그 말로만 듣던 생전장례식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들, , 사위, 며느리, 조카, 손자, 손녀, 친척 등 모두 엄마를 보러왔다. 엄마가 거실에 누워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들은 유쾌하게 떠들며 점심을 먹었다. 엄마의 자손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모여 유쾌하게 식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저마다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용돈도 드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역시 이름난 효자였던 사촌 오빠는 엄마 옆에 오래 앉아 엄마의 손을 쓰다듬으며 농담도 하고 그랬다.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생전 장례식을 영화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족에겐 그날이 생전 장례식이었다.

 

진짜 장례식에서, 23녀 자식들은 살짝 눈물만 비칠 뿐 슬피 울지 않았다. 유독 올케언니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례식장 도착하자마자 버선발로 엎어지듯 엎드려 슬피 울었는데 진심이 느껴졌기에 고마웠다. 그리고 뒤늦게 쉰 넘어 생의 어느 질곡에서 중국 어느 높은 산에서 신비체험을 하고 돌아와 스님이 된 올케언니의 동생 D스님이 법성게와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구성지게 읊으며 불교식 추모를 해주어 무척 감사했다. 엄마는 살아생전 절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절에 가깝다고 하였다. 스님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며칠 전부터 돌아가신 사장어른(나의 아버지)과 엄마의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가려고 정성스런 모습으로 거실에 빙 둘러 앉아있는 모습이 보여서 며칠 있으면 기별이 올 줄 알았어요.”

 

아아, 아버지를 비롯하여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간다는 말이 너무도 위로가 되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코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하던 소원이 19년이나 연장된 것은 다 아버지의 배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자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엄마가 불쌍해서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엄마가 돌아가니 아버지를 미워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내가 평생 외면함으로서 슬펐을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고 19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결론은 엄마가 돌아감으로서 나는 진실로 고아가 되었고 그리고 또 자유인이 되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어디 일주일쯤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면 혹시 내 없는 사이 엄마가 돌아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임종을 못 보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때문에 친정에 가면 늘 마지막인 듯 고마움의 말을 했지만 진짜 마지막과 마지막일지 모르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늘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 큰오빠에게 할 말을 잊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또한 감사했다. 마당에서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리는 순간 아차! 깜빡할 뻔 했던 말을 오빠에게 하였다.

 

오라버니, 오랫동안 엄마를 효심으로 모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제

오라버니는 대 자유를 얻었으니 이 세상 모든 행복 다 누리며 사시길 빕니다. 엄마가 원하는 것 또한 오라버니의 행복과 기쁨일 것입니다.”

 

여행도 독립이 필요해

 

그렇게 큰오빠의 삶이 좀 더 신나고 행복하게 달라지길 바라며 나의 삶 또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달라지고 싶었다. 마음으로 품었던 것들도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말로만 읊조렸던 세계 자유여행, 정말 큰 마음먹고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 호수, 몽골 내륙, 차마고도, 실크로드, 네팔, 이집트, 사하라사막, 우유니 소금호수, 파타고니아 그리고 패키지가 아닌 단독으로 서유럽 동유럽 도시들을 일주일씩 체류 해 보기 등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미국, 캐나다, 남미와 아프리카, 호주, 터키, 그리스, 북유럽, 동남아... 아 세계는 어찌 이리 넓은가. 이 유쾌한 숙제들을 나는 과연 다 할 수 있을까. 그동안 1년에 2~35~10일 사이의 짧은 패키지여행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괜찮았으나 여행도 독립이 필요했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 스스로 해야 하듯이 나도 여행 독립이 필요 했다.

 

그런데 일본이나 대만이라면 모를까, 나의 간담으로는 단독으로 비행기타고 멀리 날아가는 것은 엄두가 안 났다. 시절친구를 만나 같이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타협을 하였다. ‘지금은 아직 60세 전이니 패키지에 의지하고 60세 넘으면 그땐 정말 용기를 내어보자.’

 

60이 지나면 한두 달 집을 비운다한들 남편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 용기 없어 못하는 여행 독립을 가족들 눈치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었다. 60전에도 못내는 용기, 60 지난다고 낼 수 있을까. 살짝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그렇게 미루며 시간을 벌어 우선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앞으로 4~5년 남았으니 그동안 용기를 장착할 수 있으리라. , 나는 할 수 있다. 여행 독립의 그 첫 발걸음은 그 어디 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떼고 싶었다. 가고는 싶으나 아직 엄두가 안 나는 그 길을 나는 과연 60세가 되면 떠날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일이란 때론 뜻하지 않게 급물살을 타기도 하는바 그 엄두가 안나 던 산티아고 순례를 60세 전에 하게 되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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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스침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이 여행지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다 슈퍼에서 레몬이 수북 쌓인 것을 볼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5년여 전 관광객인 나에게 자신의 텃밭 정원에서 레몬을 따 건네준 이탈리아 할아버지이다.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날 때 커피 아닌 다른 것을 마시고 싶을 때면 나는 종종 레몬에이드나 레몬차를 선택하곤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난 여행에서 보았던 레몬나무와 레몬할아버지가 떠올라 폰의 사진함을 뒤적이곤 했다. 사진 속 레몬나무와 할아버지를 뵈면 그곳 친쾌테레(Cinqueterre) 앞바다의 파도가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그 바다는 파도가 유독 거칠다고 당시 가이드는 말했다. 그 옛날 포에니 전쟁에서 구사일생 이기고 돌아오던 병사들이 정작 친쾌테레 앞바다의 파도 앞에서 무너졌다고. 파도가 너무 거세어서 고향땅을 눈앞에 뻔히 보며 죽어갔다고.
 
우리들이 바라보았던 그날도 바다는 흐렸고 파도가 거세었다. 슬픈 얘기에 그 옛날 병사들을 생각하다가도 이내 현실로 돌아와 우리들은 저마다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에 나는 보다 위쪽의 언덕마을로 올라갔다.
 
 


   


 

풀들이 싱그럽게 뻗어 나온 돌담 벽 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에서 슈퍼나 사진에서가 아닌 실제 레몬나무에 달린 레몬을 처음 보았다. 사르르 한기가 돌던 1월 중순의 겨울이었는데 레몬은 춥지도 않은지 그 바닷가 언덕에서 노랗게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나는 너무 신기하여 레몬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다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그때 인기척이 났고 문을 나서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소를 띠며 낮은 담장 너머로 인사를 하였다.
 
"본 조르노~."
"본 조르노~."
"소노 꼬레아나."(한국 사람입니다.)
"수드?"(남쪽?)
"씨!"(네!)
 
할아버지는 '아~'하시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레몬나무를 가리키며 리모네(limone,레몬)가 예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하나 줄까?'하는 느낌의 말씀을 하며 따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얼른 '그라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당시 90은 족히 넘어 보이던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레몬나무에 가더니 레몬을 하나 땄다. 다시 몇 걸음 더 천천히 걸어 철문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에게 레몬을 주셨다. 나무에서 금방 따서 그런지 레몬은 아주 단단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힘겨운 걸음이 죄송해서 몇 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돌아섰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 귀한 레몬을 한국에 가져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농산물은 검역에 걸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가지고 온다는 생각은 이내 접었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 '어디, 눈 딱 감고 비타민C를 다량으로 한번 섭취해볼까.'하며 레몬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레몬이 너무 딱딱하여 도무지 이로 깨물어지지 않았다. 뭔가 뾰쪽한 것이 있어 뚫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었고 사과처럼 두 쪽을 내려고 힘을 써 봐도 까딱도 안했다.
 
그래서 며칠을 가지고 다니며 감상을 하고 향기를 맡다가 최종적으로는 호텔방 전화기 옆에 티슈하나 깔고 고이 올려두고 나왔다. 나름 그것은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그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레몬하나는 그 후 내 마음 속에서 별것이 되었고 이따금씩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그럴 때면 레몬나무와 바다는 지금도 변함이 없겠지만 할아버지는 그 후로 안녕하신지 그 안부가 궁금해지곤 한다. 부디 레몬나무와 함께 보다 오래사시기를 비는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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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토지>,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몇 질을 읽으며 책읽기의 기쁨에 빠진 언니는 독서하다 보니 독서와 관련한 한 가지 답답함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토지>를 읽고도 눈물이 나고 <아리랑>을 읽고도 눈물이 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잘 표현할 수가 없어. 말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렵다. 이렇게 저렇게 내 느낌을 줄줄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답답하다, 체한 것처럼."

"아 그래, 그렇지? 그런데 책을 자꾸 읽다 보면 저절로 그 감상을 표현하는 것도 늘지 싶다.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을 잘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막막함이야. 일단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 자체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데이~ㅎㅎ"

언니에게 천자문을 추천

나는 언니의 '표현이 어렵다'는 말에 꽂혀 어떻게 하면 표현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천자문이 번쩍 떠올랐다.


"언니 어휘력도 어휘력이지만 겸사겸사 일단 천자문을 배워보는 게 어떨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에는 대부분 한자가 있고 그 한자가 이렇게 저렇게 생겼다는 걸 알면 재미있지 않을까. 중·고등 검정고시 같은 걸 도전해 볼 수도 있지만 이미 독서의 감을 알았으니 차라리 언니의 경우는 한자 공부를 겸하는 게 더 좋을 듯해."

"그래?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끈기 하나는 있거든. 회사 다닐 때도 늘 지각 한 번 안 했다. 그래도 한자라니.... 한자 써본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

"사실 나도 천자문 다 몰라. 천자, 아니 500자도 모르지 싶다. 나는 천자문 배워보려고 시도하다가 늘 중도에 그만 두었는데 언니는 되지 싶다. 혹시 아나? 언니가 하는 걸 보면 나도 후끈 달아오를지?ㅎㅎ 한번 도전해볼래? 요샌 뭐든 유튜브에 다 있어. 꼭 천자문이 아니더라도 한자라고 생긴 것을 공책에 쓰다 보면 뭔가 배움의 기쁨이란 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는 생각난 김에 스마트폰을 열고 천자문을 검색했다. 유튜브 세상에는 천자문쯤이야 매일 꾸준히 한다면 몇 달 만에 뚝딱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듯한, 상세한 안내들이 즐비했다. 언니에게 천자문 독송과 풀이 및 획순을 가르쳐주는 채널 하나를 알려주었다.

언니에게 권하면서 나도 견물생심 호기심이 당겼다. 이번에야말로 나도 천자문을 뗄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30~40대엔 한자보다 다른 외국어들이 당겼다. 늘 작심 며칠 혹은 몇 달로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을 홀로 배웠는데 지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결혼 초기 30대를 지날 때는 유교문화가 주는 압박이 싫어 공자님도 싫어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성년을 넘기고 여러모로 해방되니 다시 고전적인 유산들이 좋아졌다. 나도 죽기 전에 사서삼경 원문으로 한번 읽어보자. 읽지 못하면 쓰기라도 한번 해보자 하는 갈망이 일었다. <열하일기>며 <북학의> 혹은 퇴계며 다산의 책들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그러나 아직 어디까지나 마음만이다).

언니에게 천자문을 권하고 한 일주일쯤 후였나. 언니는 한자를 쓴 공책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나 한자 공부 시작했다!"
"와아~ 벌써?"


사진 속에는 언니가 꾹꾹 눌러쓴 한자들이 빼곡했다. 언니의 독서 입문 뚝심을 보았기에 한자 공부 또한 꾸준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힘들었던 삶도 이제는 추억

언니는 나이 오십 초반에 이불 누비는 일을 배웠다. '오십'을 확실히 기억하는 이유는 어느 명절엔가 친정에서 만났을 때 언니가 신세 한탄을 하면서 읊조렸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오십에 이불 기술이 무슨 말이고? 나이 오십에 먹고 살려고 기술을 배워야 되는 신세라니..."
"언니 배운다고 다 되나? 미용사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미싱도 그 분야에 소질이 있어야 되는 거 아이가?"
"일단 해봐야지 뭐. 내가 엄마 바느질 솜씨 닮았으면 될 것도 같다."


그렇게 언니는 이불 누비는 기술을 계속 배워 나갔다. 어느 명절에 만나면 '어려워 죽겠다.' 또 어느 날 만나면 '내 인제 기술 많이 늘었데이~' 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한 3년 지났을 때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나 이제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다. 무슨 이불이든 갖다주면 입맛대로 박아낼 수 있다."
"무엇이 제일 어렵노?"
"침대 커버 한 번에 매끈하게 좌르르 박아 내는 게 어려웠다. 침대 커버는 이불처럼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잖아? 그 네 모서리 깔끔하게 박아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이제는 그것도 문제없어."     
"언니 대단하다. 확실히 엄마 손끝이 언니에게 유전되었네~"


언니는 그렇게 배운 기술을 65세 무렵까지 잘 써먹었다. 이불 누비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언니의 아이들이 직장을 잡기 전이었고 형부마저 별 도움을 주지 못할 시기였다. 혼자 벌어서 세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서인지 지금은 자식들도 안정을 찾았고 무엇보다 형부와는 뒤늦게 잉꼬부부가 되었다. 일이 힘들어도 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언니는 주말마다 등산 가는 것을 즐겼다. 등산은 언니가 65세쯤 어깨에 무리가 와서 일을 놓을 때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해준 인생의 취미였다.

부지런하고 평생 일을 하던 사람들은 쉬고 싶네 하다가도 막상 일을 놓으면 심심해서라도 다시 일을 찾게 되는데 언니는 백수생활을 일인 듯 열심히 하였다. 무엇보다 산을 좋아했기에 혼자서도 가고 여럿이도 가며 즐겁게 지냈다. 언젠가 '이산 저산 다 가 봐도 팔공산이 제일이다'고 해서 물어보았다.

"언니 팔공산 일 년에 몇 번 가노?"
"글쎄, 일 년에 한 40번은 넘지 싶다.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 일 년이면 52번이잖아? 못 갈 때도 있지만 처음 놀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자주 갔거든."


그랬던 언니가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등산을 많이 못 가고 자중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 미처 소비하지 못했던 응축된 열정이 곱게 풀려 독서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한자 공부마저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 배움에 빠져드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지 싶다. 갈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와 육체적 쇠락 속에서 소외된 마음으로 말년을 보내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인 것 같다. 낮아진 체력으로 오롯이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인생에 대한 회고와 사색, 독서 그리고 공부가 제일인 거 같다. 공부하며 늙어간다면 노년은 다시금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자문은 사자성어가 250구, 합이 천자이다. 250구의 사자성어들이 다 각각 저마다 하나의 문장을 이루기에 글씨 공부이면서 동시에 독서의 느낌도 있다. 나도 언니 덕에 이참에 천자문을 떼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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