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스침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이 여행지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다 슈퍼에서 레몬이 수북 쌓인 것을 볼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5년여 전 관광객인 나에게 자신의 텃밭 정원에서 레몬을 따 건네준 이탈리아 할아버지이다.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날 때 커피 아닌 다른 것을 마시고 싶을 때면 나는 종종 레몬에이드나 레몬차를 선택하곤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난 여행에서 보았던 레몬나무와 레몬할아버지가 떠올라 폰의 사진함을 뒤적이곤 했다. 사진 속 레몬나무와 할아버지를 뵈면 그곳 친쾌테레(Cinqueterre) 앞바다의 파도가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그 바다는 파도가 유독 거칠다고 당시 가이드는 말했다. 그 옛날 포에니 전쟁에서 구사일생 이기고 돌아오던 병사들이 정작 친쾌테레 앞바다의 파도 앞에서 무너졌다고. 파도가 너무 거세어서 고향땅을 눈앞에 뻔히 보며 죽어갔다고.
 
우리들이 바라보았던 그날도 바다는 흐렸고 파도가 거세었다. 슬픈 얘기에 그 옛날 병사들을 생각하다가도 이내 현실로 돌아와 우리들은 저마다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에 나는 보다 위쪽의 언덕마을로 올라갔다.
 
 


   


 

풀들이 싱그럽게 뻗어 나온 돌담 벽 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에서 슈퍼나 사진에서가 아닌 실제 레몬나무에 달린 레몬을 처음 보았다. 사르르 한기가 돌던 1월 중순의 겨울이었는데 레몬은 춥지도 않은지 그 바닷가 언덕에서 노랗게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나는 너무 신기하여 레몬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다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그때 인기척이 났고 문을 나서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소를 띠며 낮은 담장 너머로 인사를 하였다.
 
"본 조르노~."
"본 조르노~."
"소노 꼬레아나."(한국 사람입니다.)
"수드?"(남쪽?)
"씨!"(네!)
 
할아버지는 '아~'하시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레몬나무를 가리키며 리모네(limone,레몬)가 예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하나 줄까?'하는 느낌의 말씀을 하며 따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얼른 '그라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당시 90은 족히 넘어 보이던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레몬나무에 가더니 레몬을 하나 땄다. 다시 몇 걸음 더 천천히 걸어 철문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에게 레몬을 주셨다. 나무에서 금방 따서 그런지 레몬은 아주 단단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힘겨운 걸음이 죄송해서 몇 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돌아섰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 귀한 레몬을 한국에 가져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농산물은 검역에 걸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가지고 온다는 생각은 이내 접었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 '어디, 눈 딱 감고 비타민C를 다량으로 한번 섭취해볼까.'하며 레몬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레몬이 너무 딱딱하여 도무지 이로 깨물어지지 않았다. 뭔가 뾰쪽한 것이 있어 뚫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었고 사과처럼 두 쪽을 내려고 힘을 써 봐도 까딱도 안했다.
 
그래서 며칠을 가지고 다니며 감상을 하고 향기를 맡다가 최종적으로는 호텔방 전화기 옆에 티슈하나 깔고 고이 올려두고 나왔다. 나름 그것은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그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레몬하나는 그 후 내 마음 속에서 별것이 되었고 이따금씩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그럴 때면 레몬나무와 바다는 지금도 변함이 없겠지만 할아버지는 그 후로 안녕하신지 그 안부가 궁금해지곤 한다. 부디 레몬나무와 함께 보다 오래사시기를 비는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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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토지>,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몇 질을 읽으며 책읽기의 기쁨에 빠진 언니는 독서하다 보니 독서와 관련한 한 가지 답답함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토지>를 읽고도 눈물이 나고 <아리랑>을 읽고도 눈물이 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잘 표현할 수가 없어. 말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렵다. 이렇게 저렇게 내 느낌을 줄줄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답답하다, 체한 것처럼."

"아 그래, 그렇지? 그런데 책을 자꾸 읽다 보면 저절로 그 감상을 표현하는 것도 늘지 싶다.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을 잘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막막함이야. 일단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 자체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데이~ㅎㅎ"

언니에게 천자문을 추천

나는 언니의 '표현이 어렵다'는 말에 꽂혀 어떻게 하면 표현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천자문이 번쩍 떠올랐다.


"언니 어휘력도 어휘력이지만 겸사겸사 일단 천자문을 배워보는 게 어떨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에는 대부분 한자가 있고 그 한자가 이렇게 저렇게 생겼다는 걸 알면 재미있지 않을까. 중·고등 검정고시 같은 걸 도전해 볼 수도 있지만 이미 독서의 감을 알았으니 차라리 언니의 경우는 한자 공부를 겸하는 게 더 좋을 듯해."

"그래?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끈기 하나는 있거든. 회사 다닐 때도 늘 지각 한 번 안 했다. 그래도 한자라니.... 한자 써본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

"사실 나도 천자문 다 몰라. 천자, 아니 500자도 모르지 싶다. 나는 천자문 배워보려고 시도하다가 늘 중도에 그만 두었는데 언니는 되지 싶다. 혹시 아나? 언니가 하는 걸 보면 나도 후끈 달아오를지?ㅎㅎ 한번 도전해볼래? 요샌 뭐든 유튜브에 다 있어. 꼭 천자문이 아니더라도 한자라고 생긴 것을 공책에 쓰다 보면 뭔가 배움의 기쁨이란 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는 생각난 김에 스마트폰을 열고 천자문을 검색했다. 유튜브 세상에는 천자문쯤이야 매일 꾸준히 한다면 몇 달 만에 뚝딱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듯한, 상세한 안내들이 즐비했다. 언니에게 천자문 독송과 풀이 및 획순을 가르쳐주는 채널 하나를 알려주었다.

언니에게 권하면서 나도 견물생심 호기심이 당겼다. 이번에야말로 나도 천자문을 뗄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30~40대엔 한자보다 다른 외국어들이 당겼다. 늘 작심 며칠 혹은 몇 달로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을 홀로 배웠는데 지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결혼 초기 30대를 지날 때는 유교문화가 주는 압박이 싫어 공자님도 싫어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성년을 넘기고 여러모로 해방되니 다시 고전적인 유산들이 좋아졌다. 나도 죽기 전에 사서삼경 원문으로 한번 읽어보자. 읽지 못하면 쓰기라도 한번 해보자 하는 갈망이 일었다. <열하일기>며 <북학의> 혹은 퇴계며 다산의 책들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그러나 아직 어디까지나 마음만이다).

언니에게 천자문을 권하고 한 일주일쯤 후였나. 언니는 한자를 쓴 공책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나 한자 공부 시작했다!"
"와아~ 벌써?"


사진 속에는 언니가 꾹꾹 눌러쓴 한자들이 빼곡했다. 언니의 독서 입문 뚝심을 보았기에 한자 공부 또한 꾸준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힘들었던 삶도 이제는 추억

언니는 나이 오십 초반에 이불 누비는 일을 배웠다. '오십'을 확실히 기억하는 이유는 어느 명절엔가 친정에서 만났을 때 언니가 신세 한탄을 하면서 읊조렸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오십에 이불 기술이 무슨 말이고? 나이 오십에 먹고 살려고 기술을 배워야 되는 신세라니..."
"언니 배운다고 다 되나? 미용사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미싱도 그 분야에 소질이 있어야 되는 거 아이가?"
"일단 해봐야지 뭐. 내가 엄마 바느질 솜씨 닮았으면 될 것도 같다."


그렇게 언니는 이불 누비는 기술을 계속 배워 나갔다. 어느 명절에 만나면 '어려워 죽겠다.' 또 어느 날 만나면 '내 인제 기술 많이 늘었데이~' 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한 3년 지났을 때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나 이제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다. 무슨 이불이든 갖다주면 입맛대로 박아낼 수 있다."
"무엇이 제일 어렵노?"
"침대 커버 한 번에 매끈하게 좌르르 박아 내는 게 어려웠다. 침대 커버는 이불처럼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잖아? 그 네 모서리 깔끔하게 박아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이제는 그것도 문제없어."     
"언니 대단하다. 확실히 엄마 손끝이 언니에게 유전되었네~"


언니는 그렇게 배운 기술을 65세 무렵까지 잘 써먹었다. 이불 누비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언니의 아이들이 직장을 잡기 전이었고 형부마저 별 도움을 주지 못할 시기였다. 혼자 벌어서 세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서인지 지금은 자식들도 안정을 찾았고 무엇보다 형부와는 뒤늦게 잉꼬부부가 되었다. 일이 힘들어도 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언니는 주말마다 등산 가는 것을 즐겼다. 등산은 언니가 65세쯤 어깨에 무리가 와서 일을 놓을 때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해준 인생의 취미였다.

부지런하고 평생 일을 하던 사람들은 쉬고 싶네 하다가도 막상 일을 놓으면 심심해서라도 다시 일을 찾게 되는데 언니는 백수생활을 일인 듯 열심히 하였다. 무엇보다 산을 좋아했기에 혼자서도 가고 여럿이도 가며 즐겁게 지냈다. 언젠가 '이산 저산 다 가 봐도 팔공산이 제일이다'고 해서 물어보았다.

"언니 팔공산 일 년에 몇 번 가노?"
"글쎄, 일 년에 한 40번은 넘지 싶다.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 일 년이면 52번이잖아? 못 갈 때도 있지만 처음 놀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자주 갔거든."


그랬던 언니가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등산을 많이 못 가고 자중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 미처 소비하지 못했던 응축된 열정이 곱게 풀려 독서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한자 공부마저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 배움에 빠져드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지 싶다. 갈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와 육체적 쇠락 속에서 소외된 마음으로 말년을 보내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인 것 같다. 낮아진 체력으로 오롯이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인생에 대한 회고와 사색, 독서 그리고 공부가 제일인 거 같다. 공부하며 늙어간다면 노년은 다시금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자문은 사자성어가 250구, 합이 천자이다. 250구의 사자성어들이 다 각각 저마다 하나의 문장을 이루기에 글씨 공부이면서 동시에 독서의 느낌도 있다. 나도 언니 덕에 이참에 천자문을 떼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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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새해가 시작되었다. 참 더딘 임인년 인가했더니 지나고 보니 또 눈 깜짝 할 사이에 스쳐지나간 것처럼 휑하다. 늘 가는 해는 아쉽고 오는 해는 반갑다. 아쉬움과 반가움의 유한 반복 속에 우리 삶이 스쳐 지나간다. 월급만이 통장을 잠시 스쳤다 지나가는 게 아니라 세월마저 잠시 스쳤다하면 

1년이고 어어 하다보면 35년이다.

 

지난해봄 초등학교 동창인 산골소녀 4명이 경주에서 몇 년 만엔가 다시 뭉쳤는데 햇수를 세어보니 5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5년 전 중학생이었던 둘째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당시 고교생을 벗어난 아이들은 어느새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심지어 결혼도 하였다.

 

초로의 소녀들은 정말 세월 빠르다를 반복하다 우리이제 자주 좀 보자 말들은 무성했으나 다시 만날 쯤이면 어느새 또 5년이 지나있을 것이다. 무상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월이 무상하다.

 

어저깨는 또 수녀님이 된 후배 지인에게 새해 안부 차 통화를 하면서 마지막 연락이 언제였는지 확인하려 문자를 찾아보니 2018년이었다. 그 후로 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둘 다 경탄을 했다.


마음은 엊그제 같은데 얼추 30년을 향해가고 그사이 3번의 통화가 전부라면 앞으로 3번더 통화하려면 팔순을 넘겠어요.ㅎㅎ

정말 마음도 목소리도 그대로인데 30년이라니요.”

 

지키지 못할 공약이 될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새해이니 일단 올해는 기필코 만남을 성사하입시더~ 서로 다짐을 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계묘년 새해다. 더 이상 계획 따윈 세우지 않아야지 했다. 세워봐야 실천이 일천하니 세우는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 만났던 둘째언니의 변신을 생각하니 다시 감동이 밀려와 실천을 하든 안하든 일단 목표는 세워봐야지 다짐했다.

 

69, 일흔을 코앞에 두고 독서의 재미에 빠진언니

 

지난해(2022) 연말 둘째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그동안 책 많이 읽었데이~”

어머나! 정말?”

반색을 하며 얼마나 누구의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박경리 <토지> 21, 조정래 <아리랑> 12, <한강> 10, 최명희 <혼 불>7, 그리고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 1,2권과 또 한권짜리들 여러 권 읽었다. 그리고 외손자들 집에 있는 위인전기 전집 다 읽었다. 재밌더라~”

와아~~ 언니 대단하다. 읽으니까 되더나?”

. 어째 읽다보니 되더라.”

 

실은 언니는 202167세의 가을, 겨울 독서란 걸 다시 시도하였다. 그 몇 해 전부터는 지금은 초등생이 된 외손자들을 돌봐주러 갈 때마다 유치원생 손자들과 같이 동화책을 함께 읽는다 하였다. 읽으니 외손자들이 느끼는 것처럼 똑같이 재미있어 신기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것이 마중물이 된 것 같았다. 요 몇 년 코로나가 좀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좋아하던 산도 자주 못가고 방콕을 하다 보니 언니는 삶이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함께 사는 아들이 엄마 살았던 시대를 서술했으니 읽으면 재미있을거라며 자신이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여러 책 중 한권을 내밀었다.

 

언니는 자신의 아이들이 한창자랄 때 나의 권유로 책읽기를 시도해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두어쪽 넘어가지 못하고 잠이 쏟아져 읽지 못하겠노라 고백했었다.


나는 주말마다 산에 다니며 노는 게 좋지 책은 잠이 와서 못 읽겠더라. 그냥 쑥 캐고 나물 뜯고 또 등산가는 게 제일 재미있다. 책은 아니다.”

 

그러면 나는 알았다 하면서도 잊을만하면 한번 씩 언니 독서하고 싶은 생각 아직 없나 하면서 물었다. 그럴 때 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였고 권독하던 나조차도 나이 들어가니 마음만 있었지 독서보다는 스마트폰이며 노는 일에 빠져 살았다.

 

그랬는데 외손자 사랑이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된 것일까. 어린이 동화로 책읽기 준비운동이 된 언니는 아들이 내민 성인용 책에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면 잠이 오는지 어디 한번 읽어봐?’

 

그렇게 책을 펼쳐 50쪽을 읽었다고 하였다. , 내가 책을 졸지 않고 50쪽을? 언니 입장에서 그것은 인생 최초의 경험이자 너무도 많이 읽은 것이었다. 어린이 동화랑은 쪽수도 다르고 글자 수도 달랐다. 그런데 세상에나 50쪽을? 언니는 자신이 글자가 빽빽한 책을 50쪽이나 읽었다는 것에 놀라 일단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50여쪽씩 추가하다 보니 어느새 한권을 다 읽었다.

 

어머 내가 책 한권을 다 읽었나????!!!!’ 그것은 언니인생 일대 전대미문의 대단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바로 자신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자신감에 불을 지폈다. ‘내가 책을? 하느님 맙소사!’ 희열에 들 뜬 언니는 또 다시 한권 두 권 도전하였다.

 

20221월 언니나이 68세의 시작, 포항 구룡포 바닷가에서 자매간 1박 여행을 할 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언니가 무슨 책을 읽었고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다. 까먹었다. 내용은 좀 슬프고 그랬는데....”

언니 앞으로 책을 읽으면 제목이랑 저자를 꼭 기억해서 말해줘. 그래야 내가 궁금할 때 사볼 수도 있잖아?”

알았어

외웠다가도 잊어버릴 수 있으니 노트에다 제목과 저자를 적어놓아. 간단한 소감을 적으면 더 좋겠지. 그러나 부담스러우면 저자와 제목만이라도 적어둬.”

 

시간이 흘러, 20225월 어버이날 친정에서 만난 언니는 다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그 후로 책 많이 읽었다. 10권도 더 읽었다.~”

그래? 와아! 언니 대단하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목이나 지은이를 말해봐.”


그때 언니는 5~6권의 책제목과 저자 이름을 말하며 나머지는 모르겠다 하였다.

(아뿔싸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이시 점 그때 언니가 말했던 책과 저자의 이름을 정작 내가 하나도 기억 못하겠다. ㅜㅜ 현기영 이름만 간신히 기억난다. 기록은 내가 해야 될 상황이다.)

언니가 말한 책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하소설 읽어보라 권했던 것은 기억난다.

 

언니 이병주의 <지리산>은 언니도 가본 지리산이 배경이니 한번 읽어봐. 일단 긴 대하소설 여러 권짜리 읽고 나면 한권짜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 시도해봐. 박경리의 <토지>도 같은 경상도 말이니 더 귀에 쏙쏙 들어 올 거야. 일단 7권짜리 <지리산> 도전해봐. 다른 건 그 다음에 생각하고. 7권 다 못 읽더라도 일단 1,2권이라도 진도 나가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니가 그렇게 빨리 그 많은 책을 완독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조카도 언니의 독서에 가속도가 붙는 것에 놀랐고 엄마 대단하다며 진심으로 감탄하였다고. 언니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해서 초등학교 입학도 간신히 했고 한동안은 할아버지 눈 피해서 다녔다고 하였다.

 

언니는 자신의 인생에 책 같은 것 없다로 일관했는데 일흔을 앞두고 인생 반려로 독서를 선택했다. 언니 자신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언니 미래에 대해 무한 상상을 하고 낙관한다. 그리고 언니를 생각하면 나도 저절로 힘이나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시도해봐야지 다짐한다. 작심삼일도 여러 번 하다보면 작심 100일이 되지 않을까. 계묘년 새해가 어느 해 보다 신비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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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0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물이 시작되는 봄이다. 예전부터 나는 유독 봄이라는 계절에서 두근거림을 주체할수 없었다. 올해 봄 또한 예외일 수 없다.3월의 마지막, 동촌 아양교 주변 산책로를 걷자니 강변 양쪽으로 끝도없이 도열해 있는 벚나무들의 자태에 탄성이 절로 났다.

벚꽃의 은은한 향기와 수양버들의 수줍은 새잎, 그리고 살랑이는 따뜻한 바람이 내 마음의 빗장을 열개했다. 봄이 온줄도 모르고 땅만 보고 걸었던 내 무감했던 날들을 부드럽게 꾸짖고 있었다.


 


 

어찌 계절은 나이가 들수록 더 새롭게 느껴지는가. 벚꽃잎도 지난해의 그것보다 훨씬 풍성해진것 같았다. 사람만이 갈수록 볼 품 없어진다. 자연이라는 뭇 생명들은 망설임도 아쉬움도 없이 마구 내달리면서도 늙지 않는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때면 잠시 늙는것 같다가도 이내 봄 옷을 갈아입고 인간들의 가슴에 불을 댕긴다. 다시 돌아올 기약이 있기에 미련없이 그때그때 퇴장하리라.

잠시 함께 공부한 인연들과 시험을 치르고 해방 된 기분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십리 꽃길을 정원으로 두고있는 강변둔치의 한 작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아양교 강변의 풀들과 꽃들로 매번 다른 카페 풍경을 연출하여, 오는 손님마다 놀라게하는 주인장은 이번 봄도 변함없이 동촌 강변의 봄을 카페안에 연출해 놓고 있었다.


 


 

강변의 새소리는 마침 우리가 갔을때는 ' 토셀리의 세레나데'로 대신하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우아한 첼로들은 카페 한면 바닥에 여전하게 모로 누워 있었다. 카페 '야노쉬'에서 첼로 음악을 들으면 유난히 더 스며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저 누워있는 첼로들의 몸속을 한번 휘감고 나와서 그런것일까.

하여간 놀랍다. 봄도 봄의 카페음악도. 봄은 해마다 와도 매번 새롭다. 이 봄길은 걸어도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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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도 책이란 걸 한 권 낼 거라는 기시감은 항상 있었다. 시기를 모호하게 '언젠가'로 했기 때문에 다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늘 충분히 남은 듯했고 또 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히 인 적도 없었다. 언젠가 그런 마음이 생기겠지 언젠가는, 그럼 그때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런지 무언가 복선처럼 하나둘 책과 관련하여 나를 환기시켜주는 말들을 지난해부터 들었다. 10여 년 만에 만나게 된 옛 지인은 '그동안 책 한권 나왔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며 돌연 질문을 던져 사레가 들 뻔했다. 2~3년에 한 번씩 만나는 수녀님도 무슨 말 끝엔가 딴소리 하지 말고 글이나 써라 해서 일기를 안 쓴 지도 3년이 넘었는데 글이 웬 말이냐며 웃어 넘겼다.

어디 책을 낸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책을 낸다는 것은 내게 있어 '어마어마한' 태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큰 애 친구의 아버지인 전직 목사님도 책을 한 권 주며 '00어머님도 책을' 내보라는 게 아닌가.

결정적인 것은 올해 초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우연히 스친 다른 팀의 여행자가 나에게 "뭐하는 사람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백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 말을 뱉고 나니 왠지 실망시킨 거 같아 미안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속한 팀의 인솔자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하였다.

"이거, 직업윤리 상 고객님의 사적인 것을 물으면 안 되는데 궁금해서요. 혹시 교사에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아닌가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날 폼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인솔자는 한 번 더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그러면 작가예요?"
"점입가경이라더니, 웬 작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말이 나온 김에 제가 돌아가면 무슨 도술을 부려서라도 작가가 되든 뭐가 되든 되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작가'란 말을 농담인 듯 말했으나 스스로에게 한 나름의 복선이었다. 세세한 과정은 모르겠으나 돌아가면 책을 내리라. 왠지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하니 실행은 일사천리였다. 먼저 책을 낸 분에게 몇 가지 알토란같은 조언을 얻고 나대로 좀 찾아보다 한 지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지인은 마침 잘됐다며 나에게 딱 맞는 출판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더니 나의 출판이 그랬다. 지난 50년 인생이 오로지 책으로 열매 맺으려고 달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번갯불에 구워먹을 콩은 <오마이뉴스>에 쓴 내 기사였다.
  

 교정중인 원고
 교정중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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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배우다
 

나는 결심만 하면 되고 출판은 그저 원고만 가져다주면 출판사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책에 대한 전체적 구성과 목차 소제목 등 모든 것을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전체적 구성과 목차라니. 뭔가 틀을 잡고 계획하고 완벽해야 되는 일들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지는 나였다. 아마 5년 전이었다면 그게 하기 싫어 출판의 꿈을 도로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시 일이 되려고 그런지 못할 것도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며칠 이리저리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직관대로 각 장의 이름을 정하고 그 각 장에 들어갈 글들을 두 배 수로 뽑았다. 그것을 주제별로 며칠 읽고 또 읽으며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추구하고 선택하고자 하는 글들이 결국 내 인생관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관념 비틀어 보기', '영화처럼', '일상의 소소함', '책이 주는 행복1', '책이 주는 행복2'라는 다섯 개의 장을 만들었다.

'고정관념 비틀어 보기'에는 말 그대로 고정관념을 비틀어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글들을 골랐다. 명품? 이태리 장인이 한 뜸 한 뜸? 그런데 꼭 이태리 장인이어야만 하나? 동대문 장인은 어떤가. 동대문 장인 것이라도 소중이 오래 쓰면 그게 명품 아닌가 하는 주장부터 제사 지내지 말고 추모 후원하고, 남자는 넥타이에서 해방시키고 여자는 킬 힐에서 해방되자(?).

뿐인가. 친정엄마와 시모에게는 김장해방을 주고 당사자인 딸과 며느리는 스스로 김장을 하여 이른바 김장독립을 하자고. 이러한 주장들을 선별하며 지금 세상에 던져도 말이 될지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책이 주는 행복 1'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후회 없는 삶이 될까에 대한 해답이 담긴 책들의 독서 감상을 실었다. 젊은 나이에 연거푸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명진 스님의 '죽음 보다 더한 스승은 없다'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책이 주는 행복2'는 세상이 좀 더 밝아지는데 공감을 줄 수 있는 책들과 개인적으로 매력 있다 생각한 책들을 골랐다. '영화처럼'은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된 영화와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상하게 주인공들에게 정이 갔던 영화들을 뽑았다.

'일상의 소소함'에서는 말 그대로 소소한 행복과 추억들을 실었다. 입국신고서에 쓴 주소 때문에 하마터면 입국을 거부당할 뻔 해 하늘이 노랬던 이야기, 나에게도 나름의 출생의 비밀이 있었는가 하면 결혼을 향한 집념의 스토리도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내면서 얻은 과외의 소득은 다름 아닌 교정을 하면서 문장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생겼다는 것이다. 출판사 대표는 일방적으로 고쳐주는 게 아니라 붉은 표시를 해주면서 표시된 부문을 나보고 다 손보라고 했다.

세상에나, 나는 내 문장에 그리 문제가 많은 줄 꿈에도 몰랐다. 문장에 비문은 물론이고 듣기 거북한 입말들과 과한 단어를 왜 그리 많이 사용했는지 '놀랠 노' 자였다. 이러면서도 모국어를 흠모한다 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교정을 할 때 마다 문장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화장을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책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교정자의 입장이 되어 오자를 발견하면 이것을 어쩐다? 잠시 고민하며 웃곤 한다.

삶의 절반 마무리를 책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상 세우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데 삶의 절반을 도는 시점에서야 겨우 용기를 내었다. 책을 내기 전에는 막연하게 그저 연못의 물이 넘쳐 흐를 때까지 기다리자 때가 되면 저절로 써지고 까짓 거 한 권이야 내겠지 했다. 그런데 책을 내고 보니 모든 것에는 연습의 과정이 필요하고 어설프고 불완전하더라도 연습을 해야 는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내지 않았으면 교정이란 걸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막연한 자가 검열엔 한계가 있었다. 건축가가 단층짜리 집을 여러 채 지어보고 빌라나 빌딩에 도전할 수 있듯 책 또한 일단 한 권 내봐야 다음을 내다 볼 수 있는 자신감과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우물이 안 넘쳐도 뭔가 조금은 무겁게 찰랑거린다면 일단 한번 저질러 보시라!

무엇보다 과정이 순조로웠기에 힘든 줄 몰랐다. 교정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오가던 그 길이 무척 즐거웠다. 출판을 결정하고 책이 만들어지던 올 봄의 내 마음은 음악으로 말하자면 쇼팽의 '에올리언 하프(연습곡 25-1번)'와 똑 같았다.

봄날의 햇살도 쇼팽의 피아노도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자기 도취에 빠졌다. 착각도 유분수이거늘 분수를 몰랐다. 분수를 모르고 음악을 들었고 햇살을 받으며 출판의 과정을 즐겼다.

어쨌든 삶의 절반을 나는 살아냈고 책으로 일단락을 마무리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낀다.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나의 적임을 상기하며 날마다 용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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