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새해가 시작되었다. 참 더딘 임인년 인가했더니 지나고 보니 또 눈 깜짝 할 사이에 스쳐지나간 것처럼 휑하다. 늘 가는 해는 아쉽고 오는 해는 반갑다. 아쉬움과 반가움의 유한 반복 속에 우리 삶이 스쳐 지나간다. 월급만이 통장을 잠시 스쳤다 지나가는 게 아니라 세월마저 잠시 스쳤다하면
1년이고 어어 하다보면 3년 5년이다.
지난해봄 초등학교 동창인 산골소녀 4명이 경주에서 몇 년 만엔가 다시 뭉쳤는데 햇수를 세어보니 5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5년 전 중학생이었던 둘째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당시 고교생을 벗어난 아이들은 어느새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심지어 결혼도 하였다.
초로의 소녀들은 정말 세월 빠르다를 반복하다 우리이제 자주 좀 보자 말들은 무성했으나 다시 만날 쯤이면 어느새 또 5년이 지나있을 것이다. 무상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월이 무상하다.
어저깨는 또 수녀님이 된 후배 지인에게 새해 안부 차 통화를 하면서 마지막 연락이 언제였는지 확인하려 문자를 찾아보니 2018년이었다. 그 후로 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둘 다 경탄을 했다.
“마음은 엊그제 같은데 얼추 30년을 향해가고 그사이 3번의 통화가 전부라면 앞으로 3번더 통화하려면 팔순을 넘겠어요.ㅎㅎ”
“정말 마음도 목소리도 그대로인데 30년이라니요.”
지키지 못할 공약이 될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새해이니 일단 올해는 기필코 만남을 성사하입시더~ 서로 다짐을 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계묘년 새해다. 더 이상 계획 따윈 세우지 않아야지 했다. 세워봐야 실천이 일천하니 세우는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 만났던 둘째언니의 변신을 생각하니 다시 감동이 밀려와 실천을 하든 안하든 일단 목표는 세워봐야지 다짐했다.
69세, 일흔을 코앞에 두고 독서의 재미에 빠진언니
지난해(2022년) 연말 둘째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그동안 책 많이 읽었데이~”
“어머나! 정말?”
반색을 하며 얼마나 누구의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박경리 <토지> 21권, 조정래 <아리랑> 12권, <한강> 10권, 최명희 <혼 불>7권, 그리고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 1,2권과 또 한권짜리들 여러 권 읽었다. 그리고 외손자들 집에 있는 위인전기 전집 다 읽었다. 재밌더라~”
“와아~~ 언니 대단하다. 읽으니까 되더나?”
“응. 어째 읽다보니 되더라.”
실은 언니는 2021년 67세의 가을, 겨울 독서란 걸 다시 시도하였다. 그 몇 해 전부터는 지금은 초등생이 된 외손자들을 돌봐주러 갈 때마다 유치원생 손자들과 같이 동화책을 함께 읽는다 하였다. 읽으니 외손자들이 느끼는 것처럼 똑같이 재미있어 신기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것이 마중물이 된 것 같았다. 요 몇 년 코로나가 좀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좋아하던 산도 자주 못가고 방콕을 하다 보니 언니는 삶이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함께 사는 아들이 ‘엄마 살았던 시대를 서술했으니 읽으면 재미있을’ 거라며 자신이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여러 책 중 한권을 내밀었다.
언니는 자신의 아이들이 한창자랄 때 나의 권유로 책읽기를 시도해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두어쪽 넘어가지 못하고 잠이 쏟아져 읽지 못하겠노라 고백했었다.
“나는 주말마다 산에 다니며 노는 게 좋지 책은 잠이 와서 못 읽겠더라. 그냥 쑥 캐고 나물 뜯고 또 등산가는 게 제일 재미있다. 책은 아니다.”
그러면 나는 알았다 하면서도 잊을만하면 한번 씩 언니 독서하고 싶은 생각 아직 없나 하면서 물었다. 그럴 때 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였고 권독하던 나조차도 나이 들어가니 마음만 있었지 독서보다는 스마트폰이며 노는 일에 빠져 살았다.
그랬는데 외손자 사랑이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된 것일까. 어린이 동화로 책읽기 준비운동이 된 언니는 아들이 내민 성인용 책에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면 잠이 오는지 어디 한번 읽어봐?’
그렇게 책을 펼쳐 50쪽을 읽었다고 하였다. 헉, 내가 책을 졸지 않고 50쪽을? 언니 입장에서 그것은 인생 최초의 경험이자 너무도 많이 읽은 것이었다. 어린이 동화랑은 쪽수도 다르고 글자 수도 달랐다. 그런데 세상에나 50쪽을? 언니는 자신이 글자가 빽빽한 책을 50쪽이나 읽었다는 것에 놀라 일단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50여쪽씩 추가하다 보니 어느새 한권을 다 읽었다.
‘어머 내가 책 한권을 다 읽었나????!!!!’ 그것은 언니인생 일대 전대미문의 대단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바로 자신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자신감에 불을 지폈다. ‘내가 책을? 하느님 맙소사!’ 희열에 들 뜬 언니는 또 다시 한권 두 권 도전하였다.
2022년 1월 언니나이 68세의 시작, 포항 구룡포 바닷가에서 자매간 1박 여행을 할 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언니가 무슨 책을 읽었고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다. 까먹었다. 내용은 좀 슬프고 그랬는데....”
“언니 앞으로 책을 읽으면 제목이랑 저자를 꼭 기억해서 말해줘. 그래야 내가 궁금할 때 사볼 수도 있잖아?”
“알았어”
“외웠다가도 잊어버릴 수 있으니 노트에다 제목과 저자를 적어놓아. 간단한 소감을 적으면 더 좋겠지. 그러나 부담스러우면 저자와 제목만이라도 적어둬.”
시간이 흘러, 2022년 5월 어버이날 친정에서 만난 언니는 다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그 후로 책 많이 읽었다. 10권도 더 읽었다.~”
“그래? 와아! 언니 대단하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목이나 지은이를 말해봐.”
그때 언니는 5~6권의 책제목과 저자 이름을 말하며 나머지는 모르겠다 하였다.
(아뿔싸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이시 점 그때 언니가 말했던 책과 저자의 이름을 정작 내가 하나도 기억 못하겠다. ㅜㅜ 현기영 이름만 간신히 기억난다. 기록은 내가 해야 될 상황이다.)
언니가 말한 책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하소설 읽어보라 권했던 것은 기억난다.
“언니 이병주의 <지리산>은 언니도 가본 지리산이 배경이니 한번 읽어봐. 일단 긴 대하소설 여러 권짜리 읽고 나면 한권짜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 시도해봐. 박경리의 <토지>도 같은 경상도 말이니 더 귀에 쏙쏙 들어 올 거야. 일단 7권짜리 <지리산> 도전해봐. 다른 건 그 다음에 생각하고. 7권 다 못 읽더라도 일단 1,2권이라도 진도 나가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니가 그렇게 빨리 그 많은 책을 완독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조카도 언니의 독서에 가속도가 붙는 것에 놀랐고 엄마 대단하다며 진심으로 감탄하였다고. 언니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해서 초등학교 입학도 간신히 했고 한동안은 할아버지 눈 피해서 다녔다고 하였다.
언니는 자신의 인생에 책 같은 것 없다로 일관했는데 일흔을 앞두고 인생 반려로 독서를 선택했다. 언니 자신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언니 미래에 대해 무한 상상을 하고 낙관한다. 그리고 언니를 생각하면 나도 저절로 힘이나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시도해봐야지 다짐한다. 작심삼일도 여러 번 하다보면 작심 100일이 되지 않을까. 계묘년 새해가 어느 해 보다 신비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