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전 회장의 자서전에 뽑은 글입니다. 그의 삶을
관류하였던 지혜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대산 신용호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
이요, 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 앞에 실천해 보인 과정이었다고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첩첩산중이라지만 그것도 인간의 의지 앞에서는 별것 아니라는
의미에서였다.

#2. 세상에 거저와 비밀은 없다.
그는 불로소득이 자산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확고했다. 거저 생기면 공짜와 요행만
바라게 되고 그러다 보면 노력 없이 쉽게 얻으려든다. 잘 얻어지지 않으면 남을 속이거나
음해하게 되고 세상을 원망하고 무기력해지며 염세하기에 이른다.


#3. 물이 흘러야 고기가 산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만약 내 스스로를 높은 곳에 놓아 두면 지식의
물은 결코 역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
대산은 사람에게 힘이 있어야 살고 힘이 있으려면 알아야 하고 알려면 낮은 자세로
지식 앞에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이 알아 축적해 두는 것은 물을 막아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그 물로 벼를 기르고 고기를 기르는 창조력을 봉쇄하는
것이니 축적하나마라라고 했다.


#4.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
타임 셰어링, 즉 시간할당이라는 인생설계가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하루 시간의
5퍼센트는 내일을 위해 쓴다는 내용이다. 그 내일은 작정하기에 따라 내년도 되고 삼년
후, 십년 후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석 달 후도 있고 봄에 시작하여 가을까지가
될 수도 있다. 한시적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에 할당된 시간을
쓴다는 뜻이다.

'티끌 모아 태산' 이라 했듯이 매일 보는 신문에서 필요한 지식정보를 한건씩만 오려
스크랩을 하면 십년 후에는 박사학위논문 서너 개 쓸 만한 지식이 축적될 것이다. 곧
전력투구할 필요 없이 일을 시작하면 5퍼센트의 적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투자해야 하는데
그럴 때만이 씨앗이 발아하고 가지가 뻗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대산의
체험적 교훈이다.

#5. 소를 타고 가라.
대산은 임직원에게 마음의 소 한 마리씩을 주고 다음과 같은 소 타는 지혜를 부연했다.

나그네 하나가 지게에 짐을 지고 길을 가다가 빈 길마를 메고 가는 소를 만났다.
한참 나란히 가던 나그네는 기왕 같이 가는 길인데 싶어 등짐을 소의 빈 길마에 얹었다.
그러고 다시 나란히 걷다 보니 기왕 가는 길이면 그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에 올라타 한참 가던 나그네는 기왕지사 조금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두 발 뒤꿈치로 소의 아랫배를 쳐댔고 소걸음은 빨라졌다.

사람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나그네는 더욱 빨리 달리고 싶어 채찍질을 해댔다. 놀란 소는
마냥 뛰었고 나그네와 길마에 실은 짐은 내동댕이 쳐졌다. 낙상한 나그네는 팔다리가
부러지고 짐은 모조리 파손되어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인생행보는 그저 소 같아야 한다는 예기였다.


#6. 높이 보고 멀리 보고 넓게 보고 깊이 보자
대산은 타조와 독수리에 빗대어 지도자형 인간을 이야기하곤 했다. 타조는 지상에서
가장 잘 달리는 새라며 실무에 유능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는데, 제 앞에 벼랑이 있어
추락할 위험이 있는지를 모르며 옆을 안 보고 달리는 데다가 뒤돌아보지도 않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독수리는 높이 떠 조감하므로 시야가 넓어 멀리까지
보고 뒤를 보아 앞으로 가는 길이 뚜렷한 사람이다. 다만 독수리형 인간은 땅으로부터
떠 있어서 실무적이지 못하다는 흠이 있다.

둘다 장단점이 있으나 대산은 지도자형으로 독수리형을 요구했다.
매사에 한 치 눈 앞만 보지 말고 높이 보고 멀리 보고 넓게 보고 깊이 보라는 생각에서
였다. ...
남 하는 대로 사는 평균인간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이 정착사회이다. 그래서
색다르면 소외를 받는 것이 한국사회였다. 남이 놀 때 같이 놀지 않고 일을 하거나.
남이 잘 때 같이 자지 않으며 글을 읽거나 남이 일할 때 같이 일하지 않고 보다 빨리
일하면 따돌림을 받는다.

대산은 이 정착사회의 행동양태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딴 나라에
앞서지 못하고 항상 뒤 처지는 이유도 정착사회의 평균인간지향임을 예로 들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이 개인이나 기업이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첩경이라 강조했다.

-이규태, <평전 대산 신용호>,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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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씨가 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은 조선 정조 시대를 전후해서 한국사회가
어둠의 시대로 들어가는 초엽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정약용 일가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조의 죽음은 신세대가 몰락하고 구세대가 다시 살아나는 반동의 시작이었다.
개방과 다양성의 문은 닫히고 다시 폐쇄와 획일의 시대가 도래하는 시작이었다. ...
노론 벽파는 24년에 걸친 정조의 치세를 그의 시신이 땅속에서 채 식기도 전에
모두 뒤엎으려 하고 있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서 보내
드립니다.

1. 이별할 때의 회포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어느 날 네 어머니를 모시고 마제로 돌아
가려느냐? 모름지기 곧 돌아가서 숨을 죽이고 엎드려 조용히 지내야 한다.
나는 귀양길에 오른 뒤로 몸과 기운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그믐날은 죽산에서 잤고,
초하룻날은 가흥에서 묵었다. 이제 막 어버이 묘소에서 한바탕 울고 간다. 귀양길이나마
어버이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게 해 주시니 어디로 간들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겠느냐.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너희 어머니 낯빛이 몹시 편안치 못했다. 음식 대접과 약시중에 마음쓰거라. 이만 줄인다.
<두 아들에게 부친다. 3월 2일>

2. 정약용이 장기현에 도착한 날은 3월 9일 이었다. 새재를 넘고 문경을 지나 도착한
유배지였다. 약전 역시 거친 파도에 시달리며 신지도에 여장을 풀었다. 장기는 숙종 1년
(1675) 노론 영수 송시열(1607-1689)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노론 영수가 유배되었던
이곳이 130여 년 후에는 남인 정객의 유배지가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장기에서 "당화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이 일은 참으로 통곡할 일일세...
1천 동이 술을 빚고, 1만 마리 소을 잡아/ 옛 악습 혁신하자고 함께 맹서해, 화평과
북을 기원할 건가"라고 당파 싸움이 그치고 평화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원했다.

3. 그렇게 현실은 그들의 뜻과는 달리 흘러갔다. 그런 현실이 정약용을 18년 동안
귀양지에 가두어 놓고, 그의 형 정약전을 16년 만에 유배지에서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죽지 않았다. 그 죽음의 나날을 정약용은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 작은 형 약종은 지상을 버리고 천상에 자신의 성을 쌓았지만
정약용은 끝내 이 지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4. 정약전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이 이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상사회에 대한
희구로 승화시켰다면, 약전은 거친 어부들과 물고기, 그리고 해초와 소나무에서
피안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이복형 약현은 정약용이 <선백씨 진사공묘지명>에 쓴 대로
'물의 가운데 들어가지 않고 가문을 보호하고 집안의 제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시대에 맞서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침잠하기도 하면서 파란의 세월을
견뎌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후세인들의 길이 되었다.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5. 아래의 내용은 조정에선 이미 귀양을 푸는 것을 결정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몇 사람이
작당해서 정약용의 귀경을 방해하기에 아들 약연이 아버지에게 구명 편지를
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세상 인심이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누구인들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생사관이 분명한 다산의 편지를 읽노라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살아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이 땅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역사에 그 평가를 넘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을
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다산을 생각하게 된다. 죽고 사는 문제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다.

필천(홍의호)와 나는 본래 조금도 원한이 없었는데, 갑인년(1794) 이래 까닭 없이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 씌우더니 을묘년(1795) 봄 그가 잘못 시기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이야기했으므로 지난 날의 입씨름 같은 것은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다 씻어 버렸다.
신유년(1801년: 다신이 귀양간 때) 이후 한 글자의 편지라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면
그가 먼저 한장 보내지 않고 오히려 내가 편지하지 않는다고 허물하니 이는 기세당당한
위세로 나를 지렁이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너는 누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와야 하는지는
한마디도 밝히지 않고 있으니 너 또한 부귀영화에 현혹되어 그런 것이냐? 그가 나를
폐족이라 여겨 먼저 편지를 보내지 않기에 내가 머리를 쳐들고 대항하는 것인데, 내가
먼저 동정을 애걸하는 편지를 쓰다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내가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진실로 큰일이다. 그러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작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론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할 때도 있다. ...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천명만 기다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했다. 그런데도 내가 돌아갈 수 없다면
이 또한 운명일 뿐이다.

<학연에게 답한다(1816년 5월 3일)>

6. 우리 사회는 지금 천명을 받아들이는 세상인가? 아니면 다산의 사상을 불 속에
쳐넣고 태워 버리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정약용이 도를 펼칠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서용경, 이기경, 홍낙안 등이 득세하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다산이 꿈꾸었던
그런 나라를 향해서 각 있는가? 오늘 정약용이 이런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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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의 사고 & 서양인의 사고>

1. 그리스인들은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고,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논쟁을 중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철학은 개별 사물 자체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 개별 사물의 내부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인들은 인간을 '사회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 조화란
도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었고, 유교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화목'을 의미했다.

2. 1930년대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딕과 제인'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딕이 뛰는 것을 보아라. 딕이 노는 것을 보아라.
딕이 뛰면서 노는 것을 보아라."
한 독립된 개체로서 개인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들은 서양의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똑같이 한 남자 아이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형이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구나. 형은 어리 동생을 사랑해.
그리고 동생도 형을 사랑한단다."

이 문장들은 독립된 개인의 개별 행위가 아닌 개인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어린이들이 처음 접하는 교과서에 이미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3.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동서양의 차이를 '저맥락(low context)사회와
'고맥락(high context)' 사회의 구분을 통해 설명하였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4. 보다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보다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사회적 존재 방식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결정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동양인들은 개인의 힘보다는 외부의 힘을 중시하는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사회에 살기 때문에 '외부 환경'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반면에 서양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보다 분석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환경보다는 '사물' 자체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5. 어떤 의미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인들은 작은 부분보다는 큰 그림을 보기 때문에 사물과 전체 맥락을 연결시켜
자각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전체 맥락에서 특정 부분을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낯설어 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사물에 초점을 두고 주변 맥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편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를 것이다.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변인들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원인으로 보지만, 서양인들은
사물 자체의 속성으로만 설명하려 든다.


6. 문명 세계의 양극단인 동양과 서양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논리학의
지위에 있다. 논리학은 서양 문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그 전통의
끈이 끊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철학자 앵거스 그레이엄)

중국인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지나치게 이성적으로만 사고하는 것을 거부하며... 또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는 것도 거부한다. (철학자 류슈센)

중국 고전 교육의 목표는 분별력 있는 인간의 양성에 있었다. 중국 문화에서 교양인이란
건전한 상식과 중용의 도, 그리고 절제를 겸비한 사람이며 지나친 추상적 이론과 논리적
극단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문예비평가 린위탕)

논리적 일관성을 무기로 논쟁하는 것은 불쾌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미숙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인류학자 노부히로 나가시마)
*출처: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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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하는 사람들의 10가지 비결>

장수하는 사람들은...

1. 공격적이지 않다.
이전에는 공격적인 적도 있었으나 오래전
부터 평온한 성향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장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공격적
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람을 압도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2. 항상 아주 간소한 음식을 먹으며 패스트푸드는 거의 먹지 않는다.

3. 극히 소수만이 채식주의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은 늘 '야채'를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
육류에 포함된 철분은 다른 음식물에 들어 있는 철분과 비교해서 몸에 들어가 즉시 쓰일
수 있으며 곧바로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준다. 그러나 다른 음식물에서는 철분을 뽑아 내 체내에
흡수하기가 쉽지 않다. 육류를 먹지 않는다면 매우 조심해야 한다. 빈혈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피로감과 우울증의 원인이 되거나, 완전단백질의 결핍으로 온갖
종류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4. 대부분 평생 아침을 챙겨 먹었다.
5. 언제나 상당히 활동적이었다.
6. 폭식을 하지 않는다.
7. 알코올중독자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그들 대부분이 절대 금주주의자도 아니다.
8. 유전적 특질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고령까지 사시지 않았더라도, 본인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자신의 위험 요인들을
관리하려는 의식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9. 보통 평생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그들이 규칙적인 일과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는 결코 없다.
10. 다른 사람들, 즉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척, 자녀, 어쩌면 애완동물과 조화를
이루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살아간다.

-잭 니클라우스 & 존 티켈, <골프와 나의 인생> 가운데서 존 티켈 씨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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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3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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