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씨가 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은 조선 정조 시대를 전후해서 한국사회가
어둠의 시대로 들어가는 초엽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정약용 일가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조의 죽음은 신세대가 몰락하고 구세대가 다시 살아나는 반동의 시작이었다.
개방과 다양성의 문은 닫히고 다시 폐쇄와 획일의 시대가 도래하는 시작이었다. ...
노론 벽파는 24년에 걸친 정조의 치세를 그의 시신이 땅속에서 채 식기도 전에
모두 뒤엎으려 하고 있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서 보내
드립니다.

1. 이별할 때의 회포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어느 날 네 어머니를 모시고 마제로 돌아
가려느냐? 모름지기 곧 돌아가서 숨을 죽이고 엎드려 조용히 지내야 한다.
나는 귀양길에 오른 뒤로 몸과 기운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그믐날은 죽산에서 잤고,
초하룻날은 가흥에서 묵었다. 이제 막 어버이 묘소에서 한바탕 울고 간다. 귀양길이나마
어버이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게 해 주시니 어디로 간들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겠느냐.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너희 어머니 낯빛이 몹시 편안치 못했다. 음식 대접과 약시중에 마음쓰거라. 이만 줄인다.
<두 아들에게 부친다. 3월 2일>

2. 정약용이 장기현에 도착한 날은 3월 9일 이었다. 새재를 넘고 문경을 지나 도착한
유배지였다. 약전 역시 거친 파도에 시달리며 신지도에 여장을 풀었다. 장기는 숙종 1년
(1675) 노론 영수 송시열(1607-1689)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노론 영수가 유배되었던
이곳이 130여 년 후에는 남인 정객의 유배지가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장기에서 "당화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이 일은 참으로 통곡할 일일세...
1천 동이 술을 빚고, 1만 마리 소을 잡아/ 옛 악습 혁신하자고 함께 맹서해, 화평과
북을 기원할 건가"라고 당파 싸움이 그치고 평화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원했다.

3. 그렇게 현실은 그들의 뜻과는 달리 흘러갔다. 그런 현실이 정약용을 18년 동안
귀양지에 가두어 놓고, 그의 형 정약전을 16년 만에 유배지에서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죽지 않았다. 그 죽음의 나날을 정약용은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 작은 형 약종은 지상을 버리고 천상에 자신의 성을 쌓았지만
정약용은 끝내 이 지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4. 정약전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이 이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상사회에 대한
희구로 승화시켰다면, 약전은 거친 어부들과 물고기, 그리고 해초와 소나무에서
피안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이복형 약현은 정약용이 <선백씨 진사공묘지명>에 쓴 대로
'물의 가운데 들어가지 않고 가문을 보호하고 집안의 제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시대에 맞서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침잠하기도 하면서 파란의 세월을
견뎌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후세인들의 길이 되었다.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5. 아래의 내용은 조정에선 이미 귀양을 푸는 것을 결정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몇 사람이
작당해서 정약용의 귀경을 방해하기에 아들 약연이 아버지에게 구명 편지를
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세상 인심이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누구인들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생사관이 분명한 다산의 편지를 읽노라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살아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이 땅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역사에 그 평가를 넘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을
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다산을 생각하게 된다. 죽고 사는 문제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다.

필천(홍의호)와 나는 본래 조금도 원한이 없었는데, 갑인년(1794) 이래 까닭 없이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 씌우더니 을묘년(1795) 봄 그가 잘못 시기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이야기했으므로 지난 날의 입씨름 같은 것은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다 씻어 버렸다.
신유년(1801년: 다신이 귀양간 때) 이후 한 글자의 편지라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면
그가 먼저 한장 보내지 않고 오히려 내가 편지하지 않는다고 허물하니 이는 기세당당한
위세로 나를 지렁이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너는 누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와야 하는지는
한마디도 밝히지 않고 있으니 너 또한 부귀영화에 현혹되어 그런 것이냐? 그가 나를
폐족이라 여겨 먼저 편지를 보내지 않기에 내가 머리를 쳐들고 대항하는 것인데, 내가
먼저 동정을 애걸하는 편지를 쓰다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내가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진실로 큰일이다. 그러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작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론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할 때도 있다. ...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천명만 기다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했다. 그런데도 내가 돌아갈 수 없다면
이 또한 운명일 뿐이다.

<학연에게 답한다(1816년 5월 3일)>

6. 우리 사회는 지금 천명을 받아들이는 세상인가? 아니면 다산의 사상을 불 속에
쳐넣고 태워 버리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정약용이 도를 펼칠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서용경, 이기경, 홍낙안 등이 득세하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다산이 꿈꾸었던
그런 나라를 향해서 각 있는가? 오늘 정약용이 이런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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