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붉은 거울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詩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中

 

이지(Izzy)/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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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좋아요. 아마 새로운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봐요. 난 그들에게 나의 한많은 일생을 이야기했지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 하고 싶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것들까지를 다 이야기했어요."

"나는 너무 특별한 사람들이 싫어요. 그들도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하면 되잖아요. 불행에 처해 있다고 해서 특별나게 굴어도 된다는 법은 없는 거 같아요."

"더는 진실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고 느끼게 되는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해. 그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고 바로 그 경계 지점에서 말이야. 그러나 나는 이 경계선을 확장시키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해. 침묵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보다는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며 가능한 한 표현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어쩌면 말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말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 주는 어떤 다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말해 버리는 것만큼이나 우리를 홀가분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다른 것."

"나는 내 삶에 관해서 뭐든지 말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느껴지거든요. 여기 있는 동시에 저기도 있는 것 같고, 우리가 현재 있는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도 같고....."

 

        --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르키니아의 작은 말들> 중에서

 


 

 

 

 

 

 

 

 

 

 

 

 

 

 

 

 

 

 

Pino Bagorda, Window

Shangri Las - Past, Present An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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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0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과 그림의 절묘한 앙상블입니다.
열리고 닫힌 저 수많은 문이라니!
추천 안할 수가 없네요.
전 말을 잘 안해요. 수다는 떨지만...그거 아시죠?^^

로드무비 2004-10-04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도 마찬가지......

urblue 2004-10-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마음에 듭니다.

에레혼 2004-10-0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다만 좀 떠는^^ 말없는 로드무비님, 좋다니 좋습니다!

유아블루님, 님의 공감에 뒤늦게 사진 캡션 달았어요......

2004-10-07 0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07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꼭꼭 숨으세요, 머리카락 보일라.....^^*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 영화 <파리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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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04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불행을 안은 한 사람을 지켜보는 눈들이라니... 이 영화 은근히 사람 부아터지게 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요...

에레혼 2004-10-05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전 사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장면을 분위기로만 파악할 뿐....
어젯밤, 문득 "울게 하소서"란 저 노래가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옮겨다 놓은 거예요.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 년 후를 생각하네

-- 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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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04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쿠 하나씩 올려주시는 거 참 잘 읽고 있어요. 괜찮은 하이쿠 책 하나 추천해주세요. 물론 거기는 님이 정성껏 선정하시는 그림은 없을 테지만... ^^

에레혼 2004-10-04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이 구석의 자리를 좋아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전 그저 이 간결한, 정형적 음률에 맞춘 몇 글자에 한 마음들이 들어있는 하이쿠를 좋아해서 몇 편 수첩에 옮겨 적어놓았을 뿐, 하이쿠에 대해 그리 아는 게 많지 않아요.
제가 갖고 있는 책은, 하이쿠를 가장 일반적으로 알리는 데 도움을 준 류시화의 <한 줄도 너무 길다>와 김정례 씨가 엮은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기행>인데, 뒤의 책은 알라딘에 절판이라고 나오네요....... 김정례 씨 책이 하이쿠의 전문가다운 세밀함과 애정과 깊이를 갖고 있어서 하이쿠와 마츠오 바쇼를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던데.......

전 그저 그 날의 어떤 감정과 심상을 따라 하이쿠 한 수를 고르고 거기에 맞는 사진을 찾아보는 걸로, 짧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일 뿐.......

내가없는 이 안 2004-10-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서점 보관함에 넣어두었어요. 바다출판사 맞지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
 

 

Before Sunset (2004)

What if you had a second chance with the one that got away?

 

Plot Summary for Before Sunset

It's nine years after Jesse and Celine first met; now, they encounter one another on the French leg of Jesse's book tour. Jesse, a writer from the US and Celine, a French working for an environment protection organisation, have aquainted nine years ago on the train from Budapest to Vienna and meet again when Jesse arrives in Paris for a reading of his new book. As they have only a few hours until his plane leaves, they stroll through Paris, talking about their experiences, views and whether they still love each other, although Jesse is already married with a kid.

 



 

 

 

 

 

 

 

 

 

 

before snrise(1995)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그 후 9년

before sunset..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9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각본을 썼다고 한다.

이 영화가 궁금하다.

9년이 흐른 뒤 그들은, 우리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한때 내가 끄적였던 어떤 글의 한 대목...

  수와 해는 대학 1학년 때 학교 교지 편집부에서 처음 만났다. 
  그 해 교지 편집부원을 뽑는 시험에는, 세상의 시험이 거의 다 그렇듯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균형을 잡는 시소처럼, 기발하고 참신한 문제도 있었지만 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투적인 문제도 들어있었다. 가령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내 인생의 책'은 무엇인가 하는.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아이들에게 '인생의 책'이라는 질문은 어떤 울림으로, 어떤 기준을 마음속에서 불러냈던 걸까. 무심하게 건너가 버린 시절,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스무 살 무렵의 여자들에게...... 아직 살아 보지 못한 숱한 시간들에 대한 추상적인 목마름과 가능성만을 잔뜩 껴안고 있던 그 가난한 시절에 떠올릴 수 있는 '인생의 책'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남루한 것이었을까.
  그때 그 질문에 해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대답했었다.
  그때 그 스무 살의 여자들은 몰랐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순수한 새벽 속에 이미 최악의 폭풍이 내포돼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너무도 맑고 푸른 아침들이란 오후와 저녁의 날씨가 나쁠 징조라는 것을. 그 아침들은 뒤죽박죽이 될 화단과 막 꺾여져 버린 나뭇가지와 그 모든 진창들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몇 해가 지난 뒤, <비포어 선라이즈>라는 영화를 보면서 수는 문득 그 시절의 그 질문을 떠올렸었다.
  영화의 첫 장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 책을 읽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무슨 책인지 물어본다. 여자가 조용히 책표지를 보여준다. 조르쥬 바타이유의 <죽은 자>. "당신은요?" 이번엔 남자가 자신의 책을 내민다. 킨스키의 시집 <원하는 건 사랑뿐>.
  여행길에 가방 안에 넣어 가는 한 권의 책은 그 선택의 순간에 작용한 단순한 심인(心因)에 비해 훨씬 더 의미 심장한 것이 아닐까. 그 책이야말로 막 한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어떤 사람을 대변하는 '인생의 책'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즈음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앞에 앉은 사람에게 무슨 책을 꺼내 보여줄까. 문득 수의 머릿속에 하나의 제목이 물결치는 자막처럼 흔들거리며 지나갔다.


 


 

 

 

 

 

 

 

 

 

 

before sunset(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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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10-04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가 가장 기다리고 있는 영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다시 만난다는 이 영화...

내가없는 이 안 2004-10-04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전작의 뒤부터 이어나가는 뒤의 작품이 너무 얄밉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체로 누추해지거나 얇아진 모습을 보여주기가 쉬워서 말이죠. 비포 선셋이면... 낮동안의 여정이 제발 아름답게 원숙해진 모습으로 보여져야 할 텐데 싶어요...
그리고 아니 뭐 어린시절의 모습으로 그림을 바꾸셨다니 참... 농담이라도 어딘가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있을 듯한. 껄껄.

에레혼 2004-10-0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 가장 기다리고 있다는 그 말에서 님이 <비포어 선라이즈>의 어떤 대목에 감정이입됐었을까를 짐작해 봅니다. 그들의 9년과 님의 9년, 어떤 한 시절의 이전과 이후......

이 안님, 이 맛보기 영상에서도 그들은 확실히 기름기가 쪽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약간의 애잔함과 서글픔... 뭐 세월의 흐름에는 누구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미지와 실체의 겹쳐짐과 거리를 놓치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