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전에서 '사전'이란 말을 찾아본다.
사전(辭典) [명사]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발음·뜻·용법·어원 등을 해설한 책. 사서(辭書). 사림(辭林). 어전(語典).
나는 사전 들춰보기를 좋아한다. 내게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책 속의 한 장면이 있다. 어느 소설인지, 지금은 그 제목도, 지은이도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에서 묘사된 그 주인공의 습관적인 행태-- 혼자 쓸쓸하고 심심할 때마다 국어사전(그에게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이므로 프랑스어 사전)을 펼쳐 첫 항목 'A'부터 읽어 나가는 장면...... 그때부터였을까. 심심하거나, 모든 일이 심드렁하거나, 혹은 쓸쓸함이 느껴질 때, 무언가가 읽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활자를 읽지 않을 수도 없을 때, 사전을 들춰보는 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아주 좋은 방법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사전 읽기는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때때로, 자주, 제목은 지워져 버린 그 소설의 남자처럼 국어사전의 '가' 항목부터 찬찬히 읽어 나간다. 그 읽음은 어찌 보면 눈으로 지각한다기보다는 몸으로 감각하는 쪽에 가까운 행위이다. 천천히 만지고 더듬고 음미하는 '애무'에 가까운 읽기.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애무의 본질은 뭘 찾는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것은 자꾸 숨은 무엇과 함께 노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어떤 섬세한 뉘앙스, 숨결, 은밀한 몸짓,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쳐 버리기 쉬운 의미와 존재들이 있다. 저마다의 빛깔과 질감을 지닌 '말들의 풍경'이 있다.
2.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내게 또 하나의 '사랑 사전'이다.
'사랑'이란 것, 그 마음의(오롯이 마음만의 것일까?) 작용과 과정에 대해 그 갈피 갈피를 세세히 다시 들여다보게 해 주는 아름답고 섬세한 말의 숲. 말들의 풍경.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한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에 대한 지극한 글읽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괴테의 텍스트에 대한 책읽기가 아닌 바르트 고유의 창작이자 글쓰기이다. 모두 80개의 단상으로 구성된 이 글의 첫머리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글은 '말하고 얘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일종의 구조적 초상화인 것이다.
부재자, "근사한!", 다루기 힘든 것, 단말마의 고통, 사랑을 사랑하는 것, 고행자, 파국, "지상의 모든 쾌락",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이해하고 싶다", 그 사람의 육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이다", 소설/드라마, "나는 미치광이다",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 사랑의 외설스러움, 왜!, "별은 빛나건만", 자살의 상념, 그대로, 절제된 도취...... 이 단상들의 제목들을 옮겨 봐도, '사랑하는 사람'의 그 생생하고 아픈 언어를 느낄 수 있다.
바르트는 '소설/드라마'라는 제목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라마 drama 사랑하는 사람은 연애소설을 스스로는 쓸 수는 없다. 다만 아주 오래된 문학 형식만이 그가 자세히 얘기하지 않고 낭송 조로 읊조리는 이 사건을 수용할 수 있다.
...... 사랑의 삶의 사건이란 너무도 하찮은 것이어서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글쓰기로 옮겨질 수 없다. 씌어지면서 자신의 진부함을 드러내는 것을 쓰다보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무의미한 사건은 거대한 울림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내 울림의 일기(내 상처의, 기쁨·해석·이유·충동의): 누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사람만이 내 소설을 쓸 수 있으리.
그 사람만이 내 소설을 쓸 수 있으리.......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어쩌면 이 두 문장만으로 '사랑'의 모든 것이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사랑 사전'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빠져든다. 나도 누군가의 '그 사람'인, 그 사람이었을, 또는 그 사람일 터이므로...... 나만이 쓸 수 있는 너에 관한, 결국은 나에 관한 사랑의 말들을 더듬어 보고 싶은 것이다.
3. 그래서, 나는 나의 '사랑 사전'을 만들기로 한다.
제멋대로의, 전부이기도 하고 전무이기도 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질병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한, 유의어와 반의어는 있지만 동의어는 없는 그런 사전을.......
4. 이 사전의 갈피 갈피에 더 많은 말들이 섞여들고 추가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하여 '사전'이라는 말뜻 그대로 사랑에 관한 말의 책, 사랑의 말의 숲을 이루게 되기를......
이 사전의 갈피가 늘어남과 함께 앞으로는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황동규, <일기>)이란 구절에 공감하기보다는 고통과 희열이 뒤섞인 부풀어오른 사랑의 상처를 더 많이 체험하고 싶다. 그렇게 아프게,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