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후배 하나와 잠시 바람 쐬고 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연꽃이 가득한 못이 있는데,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가보니, 이미 연꽃은 절정을 지나 제법 많이 져버린 뒤였다.

아마 한창 때의 그 무엇, 가까이 있는 좋은 것들을 그렇게 무심히 놓치며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가벼운 후회가  지나갔다. 마음이 없기 때문인지, 내 밖으로 나를 내보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인지......

 

 

 

 

 

 

 

 

 

 

 

 

꽃은 지고 푸르고 넓다란 연잎이 수면을 덮고 있는 못 위로 삽상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 사이로 간간이 하늘을 가르며 비행기가 날아갔다. 고요하게 정지된 듯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 쇤베르크의 음악처럼 난해한 불협화음을 연주하는 가운데, 연못 주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사이다 한 잔에 파전을 곁들여 먹었다. 맞은편 나무의자에서는 중년의 사내들이 심드렁하게 화투를 치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는 어느 길목의 심심한 풍경 한 점.

몇 해 전 이맘때에도 그 후배와 그 연못을 찾았던 기억이, 오늘 그곳에 가자  연잎 위로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가듯 자연스레 떠올랐다. 후배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절연한 상태로 지내왔다. 내가 잘난척하는 걸 더 이상 보기 힘들었던 거야, 라고 말하자, 후배는 슬쩍 표현을 바꾼다. 선배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 세상에는 많고 많아. 선배,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특별한 사람 아니야.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선배가 스스로 오만하다고 여기는 그 태도는, 사실 선배의 내면이 공허하기 때문일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순순히 수긍한다. 맞아. 공허하기 때문이야. 견디고 있는 거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까. 나는 내 식으로 견디는 수밖에. 헌데 그 방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 피곤하게 느껴지나 봐...... 이런 말을 주고 받는, 그도, 나도 몇 해 전보다 각이 많이 깎이고 부드러워진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은 있어도 몸이 움직여 주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나이 든다는 걸 실감하게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광주 국제 영화제에 가고 싶다, 다음 주 하루 시간 내서 다녀올 거다, 언제? 정작 가야지 가는 거지, 요즘은 이렇게 마음으로만 기웃거리다가 그냥 눌러앉아 버리기 일쑤이니까, 그러게 의욕과 행동이 서로 아귀가 잘 맞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 같아, 요즘 같아서는 이러다 몸에 곰팡이 피는 거 아닐까 싶다니까, 그래서 나이 들어서 뒤늦게 연애에 빠져들거나 늦바람 나는 사람들 요즘 생각하면 참 에너지가 많은 거다 싶어, 그거 분명 열정이고 굉장한 에너지잖아, 마음도, 몸도 다 열고 어쨌든 내 걸 남과 나누려는 적극적인 기운...... 앞일은 모르는 거지만, 아아, 그런 에너지는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후배와 헤어져 집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이상한 갈증에 휩싸여 진한 커피 한잔을 끓여 마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어떤 식으로 이용당했는지, 내 삶이 얼마나 낭비되었는지 들어 볼래?"

세일로가 말했다.

"내가 지구 시간으로 거의 50만 년 동안 지녀 온 메시지가 뭔지 알고 싶어? 내가 앞으로 1800만 년 동안 더 지니고 있어야 할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점 하나야."

"단 하나의 점. 트릴화마도르 말로 점 하나의 의미는...... '안녕하세요'라구."

 

-- 커트 보네거트, <타이탄의 사이렌들> 중에서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4-09-0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인가요, 그림인가요?

에레혼 2004-09-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이에요. Michael Kenna의 "Fourteen Trees Marbach, 1999"란 작품입니다.
유어블루님, 오늘 서재 나들이 하는 날이신가 봐요, 자주 들러 주시니 반갑네요.

urblue 2004-09-0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오늘 아침에 시아일합운빈현님 서재에서 마르께스의 글을 보고는 바로 이리 달려와서 대강 쭉 훑어보고 재빨리 즐찾했답니다. 이런 좋은 서재를 운영하시는데, 올리시는 글들 재빨리 봐야죠. ^^ 앞의 것들은 천천히 읽겠습니다.
 

1. 사전에서 '사전'이란 말을 찾아본다.

사전(辭典) [명사]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발음·뜻·용법·어원 등을 해설한 책. 사서(辭書). 사림(辭林). 어전(語典).
 
나는 사전 들춰보기를 좋아한다. 내게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책 속의 한 장면이 있다. 어느 소설인지, 지금은 그 제목도, 지은이도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에서 묘사된 그 주인공의 습관적인 행태-- 혼자 쓸쓸하고 심심할 때마다 국어사전(그에게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이므로 프랑스어 사전)을 펼쳐 첫 항목 'A'부터 읽어 나가는 장면...... 그때부터였을까.  심심하거나, 모든 일이 심드렁하거나, 혹은 쓸쓸함이 느껴질 때, 무언가가 읽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활자를 읽지 않을 수도 없을 때, 사전을 들춰보는 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아주 좋은 방법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사전 읽기는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때때로, 자주, 제목은 지워져 버린 그 소설의  남자처럼 국어사전의 '가' 항목부터 찬찬히 읽어 나간다. 그 읽음은 어찌 보면 눈으로 지각한다기보다는 몸으로 감각하는 쪽에 가까운 행위이다. 천천히 만지고 더듬고 음미하는 '애무'에 가까운 읽기.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애무의 본질은 뭘 찾는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것은 자꾸 숨은 무엇과 함께 노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어떤 섬세한 뉘앙스, 숨결, 은밀한 몸짓,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쳐 버리기 쉬운 의미와 존재들이 있다. 저마다의 빛깔과 질감을 지닌 '말들의 풍경'이 있다.


2.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내게 또 하나의 '사랑 사전'이다.

'사랑'이란 것, 그 마음의(오롯이 마음만의 것일까?) 작용과 과정에 대해 그 갈피 갈피를 세세히 다시 들여다보게 해 주는 아름답고 섬세한 말의 숲. 말들의 풍경.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한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에 대한 지극한 글읽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괴테의 텍스트에 대한 책읽기가 아닌 바르트 고유의 창작이자 글쓰기이다. 모두 80개의 단상으로 구성된 이 글의 첫머리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글은 '말하고 얘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일종의 구조적 초상화인 것이다.
부재자, "근사한!", 다루기 힘든 것, 단말마의 고통, 사랑을 사랑하는 것, 고행자, 파국, "지상의 모든 쾌락",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이해하고 싶다", 그 사람의 육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이다", 소설/드라마, "나는 미치광이다",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 사랑의 외설스러움, 왜!, "별은 빛나건만", 자살의 상념, 그대로, 절제된 도취...... 이 단상들의 제목들을 옮겨 봐도, '사랑하는 사람'의 그 생생하고 아픈 언어를 느낄 수 있다.
바르트는 '소설/드라마'라는 제목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라마 drama  사랑하는 사람은 연애소설을 스스로는 쓸 수는 없다. 다만 아주 오래된 문학 형식만이 그가 자세히 얘기하지 않고 낭송 조로 읊조리는 이 사건을 수용할 수 있다.

...... 사랑의 삶의 사건이란 너무도 하찮은 것이어서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글쓰기로 옮겨질 수 없다. 씌어지면서 자신의 진부함을 드러내는 것을 쓰다보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무의미한 사건은 거대한 울림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내 울림의 일기(내 상처의, 기쁨·해석·이유·충동의): 누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사람만이 내 소설을 쓸 수 있으리.

그 사람만이 내 소설을 쓸 수 있으리.......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어쩌면 이 두 문장만으로 '사랑'의 모든 것이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사랑 사전'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빠져든다. 나도 누군가의 '그 사람'인, 그 사람이었을, 또는 그 사람일 터이므로...... 나만이 쓸 수 있는 너에 관한, 결국은 나에 관한 사랑의 말들을 더듬어 보고 싶은 것이다.

 

3. 그래서, 나는 나의 '사랑 사전'을 만들기로 한다.

제멋대로의, 전부이기도 하고 전무이기도 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질병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한, 유의어와 반의어는 있지만 동의어는 없는 그런 사전을.......



4. 이 사전의 갈피 갈피에 더 많은 말들이 섞여들고 추가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하여 '사전'이라는 말뜻 그대로 사랑에 관한 말의 책, 사랑의 말의 숲을 이루게 되기를......


이 사전의 갈피가 늘어남과 함께 앞으로는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황동규, <일기>)이란 구절에 공감하기보다는 고통과 희열이 뒤섞인 부풀어오른 사랑의 상처를 더 많이 체험하고 싶다. 그렇게 아프게,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살바도르 달리, 라파엘로식 머리 폭발(1951)

 

인간은 뉴런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본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자주 듣는 것을 새롭게 듣고,

항상 생각하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있었다. 몇 번 읽기 시작해도 도중에서 포기하고 만다. 매번 포기하는 장면이 다르다. 오십 쪽 정도 읽으면 졸음이 와서, 스타브로킨이 샴페인을 열 병 정도 벌컥벌컥 들이켜고, 목발을 짚고 무도회장에 나타나, 곡예를 한다든지 하는 식이 되어 버린다.

나는 그때 어떤 책이든지 겉과 속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에 대하여>에도, <성경>에도, <코란>에도, <법화경>에도. 단순히 표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독자는 책에 씌어 있는 글자밖에 읽지 않는다. 그것이 겉책. 그러나 비몽사몽 간에 읽으면, 행간에 숨은 문자나 영상, 음이 떠오른다. 이것이 속책. 속책은 꿈과 한데 섞이므로 영상 음향 시스템인 것이다. 그렇다, 작가는 독자의 꿈 속에서 자신이 쓴 겉책을 다시 쓰는 것이다. 속책의 독서가 시작되면, 겉책에 씌어 있는 것 따위는 모두 잊혀져 버린다. 어쩌면 나는 책을 통해서, 이미 죽은 작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는지도 모른다. 恐山의 무녀처럼.

-- 시마다 마사히코, <피안선생의 사랑>, 현송희 옮김, 민음사, 34 - 35쪽

 

-----------------------------------------------------------

 

*

오늘은 어쩐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싶어졌다. 그것도 여직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았던 <악령>을...... 아마 가을이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세 권짜리 긴 소설을 읽고 싶어지는 건. 헌데 마음과는 달리 손은 엉뚱하게도 책장에서 <피안선생의 사랑>을 꺼내 든다. 어쩔 수 없다. 이미 꺼내 들었으니, 읽기 시작하는 수밖에.

일본인의 도덕 교과서처럼 돼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몸'으로 패러디했다는 이 책을 읽다 보니, 기묘한 우연처럼 <악령>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책'에 대한 이야기나 삽화에 거의 예외없이 밑줄을 긋는다. 단 맛을 좋아하는 아이가 쵸콜렛을 보면 어김없이 집어드는 것처럼 마음이 확 쏠리는 것이다. 공감 또는 새로운 발견. 그런 식으로 삐죽이 나온 또 다른 실을 따라 책의 인연이 이어지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시마다 마사히코가 말하는 '겉책'과 '속책'이라는 식의 구분과 명명법이 나름대로 재미있다.

* "이미 인간은 없어져 버렸어. 남은 것은 인간의 그림자뿐이야. 현실도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픽션만이 남았네. 나도 자네도, 일체가 진행중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난 픽션의, 불면 날아갈 듯한 등장 인물에 지나지 않아."

<피안선생의 사랑>은 피안선생의 이런 말로 시작된다.

'피안선생'이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그의 어법이 마음에 든다. 어깨에 힘을 빼고, 유희와 유머의 리듬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하는, 그러나 위악적인 것만은 아닌, '쿨한' 따뜻함과 휴머니티가 깔려 있는 어법. 인물들의 사고 방식이나 대화의 내용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닌데도 술술 읽힐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이란 인간이 인간이 만든 싸이클을 뛰쳐나오게끔 만드는 행위, 말하자면 괴물을 낳는 실험실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이 기준이, 이 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문학, 그런 소설......

언젠가 친구 Y는 내 글을 읽고 나서 "나이가 들면 소설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걸 확신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책을 즐겨 읽는 사람과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소설을 읽는 사람과 소설은 읽지 않는 사람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로서는 소설을 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궁금하다.  그들은 세계를, 이 현실을 무엇을 통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때로 견딜 수 있는 걸까.

 *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를 쓰면서 의식했던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같은 걸작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던가......이 책에는 자신이 러시아인의 기질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러시아어 전공의 대학생이 화자이다.  머지 않은 어느 날, 문득 어떤 마음에 이끌려 나도 <악령>의 책장을 펼치기 시작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