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있었다. 몇 번 읽기 시작해도 도중에서 포기하고 만다. 매번 포기하는 장면이 다르다. 오십 쪽 정도 읽으면 졸음이 와서, 스타브로킨이 샴페인을 열 병 정도 벌컥벌컥 들이켜고, 목발을 짚고 무도회장에 나타나, 곡예를 한다든지 하는 식이 되어 버린다.

나는 그때 어떤 책이든지 겉과 속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에 대하여>에도, <성경>에도, <코란>에도, <법화경>에도. 단순히 표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독자는 책에 씌어 있는 글자밖에 읽지 않는다. 그것이 겉책. 그러나 비몽사몽 간에 읽으면, 행간에 숨은 문자나 영상, 음이 떠오른다. 이것이 속책. 속책은 꿈과 한데 섞이므로 영상 음향 시스템인 것이다. 그렇다, 작가는 독자의 꿈 속에서 자신이 쓴 겉책을 다시 쓰는 것이다. 속책의 독서가 시작되면, 겉책에 씌어 있는 것 따위는 모두 잊혀져 버린다. 어쩌면 나는 책을 통해서, 이미 죽은 작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는지도 모른다. 恐山의 무녀처럼.

-- 시마다 마사히코, <피안선생의 사랑>, 현송희 옮김, 민음사, 34 -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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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쩐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싶어졌다. 그것도 여직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았던 <악령>을...... 아마 가을이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세 권짜리 긴 소설을 읽고 싶어지는 건. 헌데 마음과는 달리 손은 엉뚱하게도 책장에서 <피안선생의 사랑>을 꺼내 든다. 어쩔 수 없다. 이미 꺼내 들었으니, 읽기 시작하는 수밖에.

일본인의 도덕 교과서처럼 돼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몸'으로 패러디했다는 이 책을 읽다 보니, 기묘한 우연처럼 <악령>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책'에 대한 이야기나 삽화에 거의 예외없이 밑줄을 긋는다. 단 맛을 좋아하는 아이가 쵸콜렛을 보면 어김없이 집어드는 것처럼 마음이 확 쏠리는 것이다. 공감 또는 새로운 발견. 그런 식으로 삐죽이 나온 또 다른 실을 따라 책의 인연이 이어지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시마다 마사히코가 말하는 '겉책'과 '속책'이라는 식의 구분과 명명법이 나름대로 재미있다.

* "이미 인간은 없어져 버렸어. 남은 것은 인간의 그림자뿐이야. 현실도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픽션만이 남았네. 나도 자네도, 일체가 진행중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난 픽션의, 불면 날아갈 듯한 등장 인물에 지나지 않아."

<피안선생의 사랑>은 피안선생의 이런 말로 시작된다.

'피안선생'이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그의 어법이 마음에 든다. 어깨에 힘을 빼고, 유희와 유머의 리듬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하는, 그러나 위악적인 것만은 아닌, '쿨한' 따뜻함과 휴머니티가 깔려 있는 어법. 인물들의 사고 방식이나 대화의 내용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닌데도 술술 읽힐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이란 인간이 인간이 만든 싸이클을 뛰쳐나오게끔 만드는 행위, 말하자면 괴물을 낳는 실험실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이 기준이, 이 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문학, 그런 소설......

언젠가 친구 Y는 내 글을 읽고 나서 "나이가 들면 소설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걸 확신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책을 즐겨 읽는 사람과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소설을 읽는 사람과 소설은 읽지 않는 사람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로서는 소설을 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궁금하다.  그들은 세계를, 이 현실을 무엇을 통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때로 견딜 수 있는 걸까.

 *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를 쓰면서 의식했던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같은 걸작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던가......이 책에는 자신이 러시아인의 기질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러시아어 전공의 대학생이 화자이다.  머지 않은 어느 날, 문득 어떤 마음에 이끌려 나도 <악령>의 책장을 펼치기 시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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