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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황봉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남아 있는 나날>
( 원작 가즈오 이시구로, 황봉득 옮김, 세종서적)
(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안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이 영화가 개봉되던 시절(1994년이다) 처음 봤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 귀족 가문의 한 충성스런 집사가 바보처럼 놓쳐 버린 옛 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라는 어렴풋한 윤곽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한 늙은 집사의 사랑 회고담'이라고 간단히 얘기하고 넘어가기에는 좀 마음에 걸릴 만큼 아주 섬세하고 내밀한 삶의 여러 국면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영화였다. 마치 무도회장에 차려입고 나온 귀부인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잡혀 있는 자잘한 주름들처럼 한 사람의 인생 갈피 갈피에 자국을 남기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자신의 평생을 바친 일의 세계, 그 사이를 헤집고 지나간 숨겨진 감정들,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 관계를 먹고 자라는 사랑과 오해와 연민과 그리움과 엇갈림들이 섬세한 날실과 씨줄로 직조돼 있는 영화 <남아 있는 나날>.
1958년,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는 영국의 서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충직한 영국인 집사로서 지금은 미국인 갑부 루이스 씨(크리스토퍼 리브)의 소유가 돼 버린 '달링턴 장원'에서 평생을 바쳐 일해 왔다. 여행을 하며 스티븐스는 1930년대 중대한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 그리고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을 위해 일해 왔던 지난날을 회고해 본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스티븐스는 주인 달링턴 경의 인품과 정치적인 신념을 믿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친 나치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스티븐스는 자신의 맹목적인 충직스러움과 투철한 직업 의식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스티븐스는 오래 전 달링턴가에서 하녀장으로 일하다 결혼으로 이곳을 떠난 켄튼(엠마 톰슨)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켄튼과 함께 지내며 꾸려 왔던 시간들, 그 시간의 갈피에 남아 있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자취들을 되짚어 보며.......
영화 속의 스티븐스란 인물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인간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을 한없이 단련시켜 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그 방식과 방향이 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쪽으로 자기를 끝없이 밀어부치는......
아주 흔하고도 거친 이분법으로 얘기하자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는데, 그 하나는 성공과 명예(바깥 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영혼의 고양(내면 세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스티븐스처럼 공적인 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책임과 권한, 거기에서 발휘되는 능력에서 존재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 만족감과 성취감을 계속 지키고 키워 나가려면,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흔들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거나 그 마음의 기류에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이런 사람에게 특히 '사랑' 같은 감정은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다. 그런 것에 감염돼서는 자기 분야의 최고 경지, 히말라야 등정만큼이나 어려운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기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일에 빈틈이 없고, 실수하는 법이 없고, 업무에 필요한 말 말고는 입을 여는 법도 없고 쓸데없이 웃지도 않는 스티븐스. 깔끔하게 차려입고 절도 있게 복도를 걸어 다니며 세심하게 집안을 둘러보는 그는 언제나 자기 방 창문 뒤에서, 또는 방문 뒤에 몸을 감추고 미스 켄튼을 바라본다. 미스 켄튼은, 어쩐지, 자꾸 스티븐스의 시선을 끈다. 유리창 또는 방문 뒤는, 그 정도의 거리와 차단은, 스티븐스가 목까지 단추를 꼭꼭 채우듯 견고하게 지켜 온 자기 삶을 흩뜨려 놓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바이러스의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니까.
이 두 사람의 억제된 은밀한 감정의 밀고 당기기가 가장 극적으로 그려진 대목. 스티븐스의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온 미스 켄튼이 혼자 쉬는 시간에 그가 읽고 있던 책에 강한 호기심을 나타낸다. 스티븐스는 무척 당황하고 긴장해서 책의 표지를 얼른 가린다. 집요하게 그 책을 빼앗아 보려는 켄튼. '당신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여자의 강렬한 욕구에 맞서서 '누구도 나만의 방에 들어올 수 없어'라며 자기 방문을 완강하게 지키려는 남자. 두 사람은 책 한 권을 놓고 '처음으로' 손이 맞부딪힌다. 육체의 가볍고도 강렬한 접촉은 꾹꾹 눌러놓은 감정의 수위를 위험하게 높이고 만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단련된 스티븐스의 자제력의 수문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스티븐스가 읽고 있던 책은, 켄튼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야한 장면이나 선정적 묘사도 없는 순수 연애 소설이었을 뿐. 스티븐스는 다시 자신의 책을 돌려받고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으며 켄튼 앞에서 자신의 방문을 안전하게 닫는다.
한 사람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그가 있던 자리에 펼쳐져 있는 책 한 권만큼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장면은 아주 매혹적이었다. 스티븐스라는 인물이 가질 만한 '사랑의 예감에 두려워하며 자기를 지키려는 안간힘'을 꼭 그에 적합한 정도로 기가 막히게 묘사해 냈는데, 특히 이 장면에서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앙상블은 절정의 묘를 보여준다. 안소니 홉킨스가 아닌 다른 얼굴의 스티븐스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이 영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그 표정에서, 몸의 움직임에서, 침묵에서,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오묘한 웃음에서 스티븐스란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자기를 가둬 두고 있는 이의 이중적인 자존감과 자애심과 내면 저 깊숙이에서 오래오래 끓고 있는 감정의 미열을......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이다. 영국의 부커 문학상을 받은 원작의 작가가 뜻밖에도 일본인인 것처럼, 영화를 만든 제작진도 인도 출신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미국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이다. (이 머천트- 아이보리 팀은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남아있는 나날> 등을 통해 영국 영화의 주요 장르인 '유산 영화(heritage film)' 전문 프로덕션으로 자리잡아 왔다.) 어찌 보면 영국인이 아니었기에 더 세밀하고 완벽하게 영국적인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영국적인 분위기를 묘사해 낸, 특히 영국의 유서 깊은 귀족 문화의 일면과 그 몰락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역시 적절한 거리(바깥과 안의 문제, 내부인과 외부인의 시각)는 나름대로의 힘이 된 것 같다.
"그의 충고 가운데는 지나치게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 것과, 좀더 진취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써 남아있는 나날들을 보다 즐겁게 지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자기 삶의 행로를 스스로 좌우하지 못했다고 회한에 빠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지 우리들은 참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작은 몫이나마 동참하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만일 그러한 공의의 추구에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설령 종국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행위 자체로써 긍지와 만족을 삼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원작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지나치게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남아 있는 나날'을 풍요롭게 보내라는 충고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이미 젊지 않은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미 우리가 살아 온 시간들, 우리 뜻과는 달리 흘러가 버린 나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우리는 꿈꾼다. 우리 인생의 남아 있는 날,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엇을 만나게 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꿈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