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원작(오늘의 세계문학 28 "태초의 밤", 중앙일보)

키스 고든 감독

 

나는 아직도(이만큼 나를 살아 봤으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명랑한 사람인지 우울한 사람인지, 세상과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지 비관적인지, 나의 가장 큰 장점과 결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란 사람이 관념론과 유물론, 보수와 진보, 몽상가와 활동가, 이오니아식과 도리아식,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원심력과 구심력... 그런 이분법의 다리들 사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어느 것 하나 나 자신에 대해 망설임 없이 명쾌하게 단정지어 얘기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사소한 한두 가지의 인상과 편견을 가질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에 대해서만 '선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 그와 같은 이치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 것,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며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삶'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온전하게 내 의지에 따른 생각과 행동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때가 종종 있는 탓에 '잘 살기'란 마음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단순 명쾌하지 못하고 생각이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고 소심한 사람은 늘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습성대로 다른 이의 진실에 대해서도 종종 물음표를 품은 채 바라보곤 한다.

그 생각이, 그 말이, 그 선택이 그의 진실일까. 그는 자신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가 자신의 진실이라고 믿는 것 가운데 혹시 '대외용'과 '대외비'가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현재 모습이나 본질과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 또는 자기가 연출한 이미지 사이에서 헷갈리거나 자기 자신도 속아넘어가는 경우는 없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끝까지 '위선'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위선도 또 하나의 진실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진실과 거짓 게임에 얼마나 들어맞는 법칙일까.
 


키스 고든 감독이 연출하고,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와 거칠거칠한 질감을 지닌 배우 닉 놀테 '하워드 W 켐벨 2세' 역을 연기하고 있는 영화 <마더 나이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살고 있던 한 미국인 작가의 기묘한 인생 역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헌데 내게는 이 영화가 표면에 드러난 것처럼 전쟁 상황에서의 뒤틀린 운명과 인간 비극을 그린 것이기보다는 인간의 진실과 가면의 문제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전쟁 당시 나치의 선전성에서 대 연합군 방송을 맡아 극악한 반(反) 유대인 선전으로 악명을 떨친 하워드 캠벨. 그러나, 실은 그의 그런 활동은 미국 정보국의 은밀한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스파이 활동이었지만, 세상은 나치 아래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한 그의 발언과 행동을 그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낙인찍는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 말하고 행동한 대로, 보여진 대로..... 그의 진실은 그렇게 역사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진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전범 재판을 받기에 이른 캠벨. 그는 자신의 기묘하게 꼬인 생애를 돌아보며 경계가 불분명한 진실과 거짓, 참 얼굴과 가면, 선과 악의 문제를 규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깊숙이 바라보면 볼수록 두 개념의 경계선은 점점 더 모호하고 알 수 없게 될 뿐이다.


영화 <마더 나이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열렬한 매니아 독자군을 갖고 있는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Mother Night"라는 표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말 가운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밤, 즉 암흑은 빛보다 오래된 태초에서부터 존재하던 만물의, 우주의 모체라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예언한 것처럼, 이 세계에서 '빛'은 사라지고 다시 태초의 '밤'이 지배하게 된 것일까? <마더 나이트>는 인간의 부조리함과 고독을 절절하게 그려 나가면서, 그 고독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어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에서는 그대로 담아내기가 어려워서 건너뛰었겠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마더 나이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 첫 구절이 <마더 나이트>가 말하고 싶은 전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쓴 이야기들 중에 이 작품만은 내가 그 교훈으로 삼고 있다. 별로 대단한 교훈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그 교훈을 내가 안다 뿐이지-- 즉, 우리의 가면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면에 대해서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남자든 여자든 간에,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사람, 자기 자신에게 '착한 내 자신, 진짜 나, 천국에서 만들어진 나는 내 내부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하면서 악을 행한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런 어떤 인물에게 바쳤으면 한다."

커트 보네거트가 교훈으로 삼고 있는 그 생각처럼 나는 지금도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내 진짜 얼굴은 어떤 것일까. '진짜 나'는 나만이 아는 내 내부 깊숙이 감추어져 있고, 그래서 내가 아는 나 자신과 세상에 보여지는 나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간극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리하여 나의 진실이 왜곡 없이 그대로 세상에 보여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아닐까.

 

[검색해 보니, 현재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구할 수 없다. <고양이 요람>이나 <갈라파고스> 등의 다른 책에서 저자에 관한 설명을 옮겨 왔다.]

 

저자소개
커트 보네거트 (Kurt Vonnegut Jr.) - 1922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코넬대학, 카네기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수학하고 1965년부터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연합군 폭격에 의한 드레스덴의 파멸을 목격하기도 했다. 100여편의 단편과 <갈라파고스>, <제5도살장>, <타임 퀘이크>등의 장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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