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숨어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송찬호

 

 

이곳에 숨어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 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 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말의 폐는 푸르다

송찬호

 

 

숲은 나무 바깥에 있는 나무의 폐

공기는 푸르다 그 공기에 푸르게

다쳐가는 나무들 숨을 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공기에 다쳐갔던가

 

우리는 아직 숨쉬기 바깥에 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는 숨쉬기 직전의 단 한번의 공기들

이봐 자네의 숨쉬기는 어땠나, 한줌의 재였나, 연기였나?

공중에 퉁겨오르는 다친 나무 뿌리를

다시 땅에 밟아넣는다 머리를 쳐드는

포로들을 구덩이에 밀어 처박듯이

 

다친 개들이 아직도 울부짖고 있다

우리가 개가 아니라면

어찌 저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우리가 쓰는 지금 이 말도

이미 오래 전 개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을까

개들이 물어뜯던 말,

사육된 말


 

카티아 카르데날, 나의 길에(En Mi C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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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10-2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아찔합니다.

에레혼 2004-10-23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詩我一合雲貧賢님, 오늘[어제!] 저 시가 제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에 감정이입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감정 이입은 때로 무책임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
이즈음 저녁마다 저 노래를 하염없이 듣고 있습니다. 니카라과 태생의 가수라고 하는데, 그 애조 띤 음성과 가락이 우리 정서에 잘 맞지요?

귓속말님..... 기다리고 있어요! 이 설렘이 좋아요. 가슴속의 작고 여린 촛불 같은....... 그대도 부담 대신에 즐거운 설렘만 느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쩐지 미안해지려고 하네요.

숨은아이님, 층층 계단 오를 때 걸음 조심하세요!^^



hanicare 2004-10-23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인 줄 알았습니다.

2004-10-2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시 같군요..흐흐흐

에레혼 2004-10-2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이 이미 먼저 썼을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