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숨어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송찬호
이곳에 숨어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 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 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말의 폐는 푸르다
송찬호
숲은 나무 바깥에 있는 나무의 폐
공기는 푸르다 그 공기에 푸르게
다쳐가는 나무들 숨을 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공기에 다쳐갔던가
우리는 아직 숨쉬기 바깥에 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는 숨쉬기 직전의 단 한번의 공기들
이봐 자네의 숨쉬기는 어땠나, 한줌의 재였나, 연기였나?
공중에 퉁겨오르는 다친 나무 뿌리를
다시 땅에 밟아넣는다 머리를 쳐드는
포로들을 구덩이에 밀어 처박듯이
다친 개들이 아직도 울부짖고 있다
우리가 개가 아니라면
어찌 저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우리가 쓰는 지금 이 말도
이미 오래 전 개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을까
개들이 물어뜯던 말,
사육된 말
카티아 카르데날, 나의 길에(En Mi Ca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