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짧다. 노루 꼬리처럼 짧다, 라는 말을 떠올린다. 어느새...... 그 짧은 햇살의 끝무렵에 Y와 풀밭 공원 앞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차를 마신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타 온 종이컵 커피. 커피는 금세 미지근해지고 들큰했다. 바람이 커피보다 더 진하고 감미로웠다. 이번 추석은 예년보다 유독 덥지 않았어? 그러게 말이야. 더운 기운이 가시자마자 바람이 이렇게 선득해지다니. 가을이 점점 짧아져 가는 모양이야. 좋은 것들은 왜 그리 빠르게 사라져 가는 걸까.


가을 햇살이 이쁘다고, 이 바람이 아깝다고 느끼는 건 내가 나이 들었음을 고스란히 비쳐주는 서글픈 거울이다. 햇살 좋은 날 길가에 나와 꾸벅꾸벅 졸거나 초점 잃은 눈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들의 심경을 알 것 같다. 그들은 빠르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아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생한 시간들, 이 좋은 햇빛, 살아 있다는 것, 한번 가면 그뿐 되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들, 그것들을 향한 몽롱한 상실감.


빠르게 해가 저물어 간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리내 웃거나 장난을 친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나무 밑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보기 좋게 그을리고 마른 근육을 지닌 사내 하나가 강변을 따라 달린다. 종이컵 안에 몇 모금 남아 있던 커피는 진작에 식어 버렸다. 또 하루가, 한 줌의 가을 햇살이 흘러가 버렸다.

 

슈베르트 - 첼로와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물고기 2004-10-05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님도 늦게 주무시는군요. 글에서 언뜻 밟힌 Y라는 이니셜 때문에 엉거주춤 나무의자에 앉아 느리게 퍼지는 햇살을 즐기는 상상을 합니다. 바람도 좋고 풀밭 주위의 사람들 풍경도 보기에 좋군요. 편히 주무세요, 부디.

에레혼 2004-10-05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부디..... 그대도.......

hanicare 2004-10-0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숲속을 한참 걸어갔지요. 그 끝에 철로 엮은 레이스같은 거대한 아르데코풍의 대문을 지나 물살이 급한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다리는 좁은 외나무다리. 나는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져 버렸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려던 순간 꿈을 깼어요. 어릴 때 꾼 꿈인데 그 색조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 사진의 색감이었습니다.

에레혼 2004-10-0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오래된 꿈속의 그 숲길을 제가 거닐었더랬지요
바로 그 나무 곁을요......

2004-10-06 0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0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렇게만 살면 또 지루해할지 몰라요, 착하고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그 '완벽함'으로 우리를 숨막히게 할지도...... 아주 잠깐씩 마주치는 이런 순간들이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지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도......
근데, 왜 오늘은 귀엣말로만 얘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