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예세닌. 러시아의 '농촌 시인'이라고 알려진 그는 어느 날 이런 시를 썼습니다.



어머니의 편지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믄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말(馬)도 없단다.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네 처한테는
실 잣는 일이나 시키고,
너는 아들답게,
우리의 노년을 돌보지 않았겠느냐.” 
................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답장에서
털어놓으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정말로 '답장'이란 시를 썼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내 늙은 어머니, 
사시던 대로 그냥 사세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구요,
하지만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이 세상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어머니는 눈꼽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어머니!
눈보라 속에서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지요?
굴뚝에선 웅웅대는 소리가
그렇게 불평하듯 늘어지는데.
몸을 뉘려 하면,
보이는 건 침대가 아니라
좁은 관이고,
꼭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같을 테지요.

....
내가 사랑하는
그 봄을 
나는 위대한 혁명이라
부르지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거예요.
그 하나만을
기다리며 불러대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증스러움이란!
레닌의 태양으로도
여태 덥혀지지 않는,
우리의 이 차가운 지구 말이에요!
바로 그래서
시인의 아픈 가슴을 안고
추태를 부리기로 나선 거예요.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하면서 말이예요.

....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시라구요.
죽음이라니요?!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외양간에서 끌어내야 하는
소는 아니잖아요,
말이나
당나귀도 아니구 말이에요.

때가 오면,
지구에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오면,
내 발로 나가겠어요,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목도리를 사드리지요,
아버지께는 
말씀하신 바지도 사드리구요.

        
  
예세닌, 「답장」




저도 가끔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삶에게!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시라구요.

... 때가 오면, 지구에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오면, 내 발로 나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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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목도리도 사드리고, 아버지 바지도......
'다믄 얼마라도..."하는 어머니의 편지도 마음에 아프게 와닿습니다.

로드무비 2004-09-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시 와서 추천하고 퍼가요.(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네요.)
답장에 쓰인 사진도 좋아요.^^

플레져 2004-09-1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한텐 돈을 안주나보다... 돈과 문학은 멀리 떨어뜨려놓아야 마땅한 것 같은 씁쓸한 풍경이네요. 추천하고 퍼갈게요. 너무 좋습니다...흑흑...

hanicare 2004-09-1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한국의 어머니들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지는군요.왜 씁쓸한 웃음이 나올까요. 자식이 꽤나 싸가지없이 말하는 것도 여기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

에레혼 2004-09-1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머리카락은 괜찮으세요?^^
"다믄 얼마라도..." 정말 절절하지요, 어머니가 가릴 것 없이 저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때 가슴이 철렁 무겁게 내려앉지요.

플레져님, 저도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흑흑,까지는 아니어도 스물스물 눈물이 차오르는 듯합니다, 예세닌과 그 어머니, 멀지 않은 바로 우리들의 풍경이라서......

하니케어님은 눈물 대신 씁쓸한 웃음을 지으시는군요... 싸가지가 좀 없나요, 아들내미가? 그래도 저는 저 정도의 싸가지가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