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명동에서 커피를 마실 때였다. 한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Are you Japanese, or Korean?"
난 당연히 한국인이라 말하며 그분의 질문에 답하였다. 기실 심상한 일이다. 헌데 이 질문에선 묘한 배려가 나타난다. 이러한 배려는 한 나라를 평가하는 우리의 무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기실 할아버지가 내게 Chinese라고 물었다면 기분이 나빴을 테다. 일본은 세련된 이미지고 중국은 낙후된 이미지라는 세간의 인식 때문일 테다. 이런 인식의 부당함을 알고 그 잗다란 폭력을 이겨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저 ‘중국인’으로 불리지 않은 데 대한 안도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을 통해 본인의 무의식 내지는 호오(好惡)를 드러내곤 한다. 그런 무의식은 감추려 할수록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용의주도하지 않는 이상 그런 무의식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러한 표출은 가끔 긴장의 땔감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선배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2차로 옮기는 과정은 꽤나 지난했다. 옆에 있던 선배에게 다소 동선이 길다는 말을 했다. 말 그대로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헌데 선배는 내게 말조심 하라고 했다. 동선이 길다는 말은 너네가 동선을 잘못 짰다는 나무람이 섞인 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기실 그런 나무람이 들어가 있긴 했다. 다만 선배와 길을 걷다 버성긴 분위기를 참지 못해 ‘사실’을 넌지시 기술했을 따름이었다. 약자이다 보니 그런 에두르는 말로 마음을 눅이려 했거늘 그는 말로 말을 무참하게 만들었다. 말조심은 내 것이 아니 오로지 그의 것이었다.
기실 이런 무의식을 간파하는 것은 영특하기 보단 자지레한 폭력과 닿아 있다. 숨기고 싶은 타인의 무의식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존재증명을 하는 일은 주위사람을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말이 조성한 긴장을 너른 마음으로 감싸 안는 게 정녕 영특한 법이다.
말조심은 지나치다고 할 만큼 신경을 쓸 부분이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항변할 수 있으나, 말이란 화자의 발화의도보다 청자의 받아들임이 더 중요한 법이다. 내 말로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면 그 아픔만은 명징한 것이고 내가 전달하려던 의도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아주지 않은 채, 기껏 몇몇의 형태소에 천착하여 말을 왜곡한다 말하는 이는 실로 미욱할 따름이다. 그대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그대의 말은 공기에 울림으로써 실존한다. 제 처신을 잘해야 하는 이유다.
언어가 지닌 계층의식을 이야기하려다 말이 엇나갔다. 그대의 불민함을 지적하기 보단 내 언어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게 옳을 듯하여 글이 이리 맺어진다. 말에 대한 배려와 언어에 대한 고민은 항상 나를 깨어있게 하지만 또 피곤케 한다. 글로 생각을 오롯이 드러내는 건 내 언어 또한 자지레한 폭력에 둔감해질지 모름을 저어해서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대를 말로써 욕보이는 이가 있다면 마음을 슬며시 닫을 일이다. 사랑은 보이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볼 수 없기에 더욱 민감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