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32번 / 클레멘티 : 피아노 소나타 Op.12 No.1 / 쇼팽 : 피아노 소나타 2번 외
쇼팽 (Frederic Chopin) 외 작곡, 미켈란젤리 (Arturo Benedetti / BBC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찬란한 문체는 핏발서린 어둠의 자식이다. 어느 부분 하나 버릴 것 없는 완벽한 언어의 상차림은 고요한 어둠을 먹고 빛난다. 가슴에 서린 둔중한 타건이 빗발치는 동요를 못 견뎌 할 때 불안은 증폭되고 심장의 주인은 어둠이 된다. 어둠의 색깔에 바름이 어딨고 그름이 어딨겠냐만은 침전하는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는 어둠보다 더 짙은 그늘이다. 미칠 듯한 광폭함이 어둠을 먹고, 또 뱉고 들이켜 씹어 으스러질 때도 어둠의 소리는 참선하는 스님의 묵상보다 더 깊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흐트러진 심장도 다 공포의 자식. 무너질 듯 부서지는 그 검은 손길에 가슴이 맵다. 끝없는 변주는 심장의 흩어 버리고 눈먼 자들의 시간에도 밤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깨워 준다. 누가 이리 무정한 음색을 심장에 짓누르듯 소리내기에 덥디 더운 여름밤에 달빛하나 먹고자란 무언가(無言歌). 말없이 그대 가슴 퍼나르는 색색의 표지는 무지갯빛 아름다움. 밤을 먹고 자란 시든 어깨가 느슨한 울림에 기대어 기지개를 켜다. 점점이 증대되는 어둠은 이제 빛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 기침 소리, 곡소리, 니 맘 빼앗는 소리 다 빛을 좇아 달린다. 지루한 듯 달리는 빛으로의 여정은 가슴속 생채기를 보담으며 어루만진다. 그리고선 같은 길을 오간다. 어둠의 그림자가 빛에 자리를 내줄 적에 심장은 헐떡이며 뜀박질을 준비한다. 지나친 펌프질도 이젠 마취된 내 영혼 마냥 잠시 비루해지고.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서방질하다 소박맞은 한(恨)많은 청상과부댁의 치열한 생존 본능만큼 아름답다. 여울지고 여울진 아름다움이 이제 잿빛 어둠을 쫓아버리고 무자비한 폭발을 준비한다. 죽지 않을 만큼 살아온 생애가 귓가를 울리며 이제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간다. 경쾌한 나의 발걸음. 터진 심장은 공중에 산화하고 느려지는 두 손은 탭댄스를 추듯 리드미컬한 반주를 한다. 귀에 서린 그대들의 참소. 나의 옹졸함. 다 그냥 내던지라는 준엄한 음성. 그리고선 잠시 쉰다. 페르마타(Fermata). 아름다운 느림. 늘임. 영롱한 음색. 귓가에 알알이 박히는 보석. 끝이 없어 보이는 낮은 목소리. 밝게 빛나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요정들의 귓말 들. 푸르미와 푸르메. 아무 의미 없는 형태소의 나열. 이제 새로운 세상이 덜 아프게 귓불을 추스린다. 명상의 공간. 트릴이 있다. 트릴. 트릴. 정적을 깨는 그대 그 지엄한 말씀. 오롯이 새겨들었다 한들 순간은 찰나. 영겁으로 전환하는 찰나의 그 깨질 듯한 여림이 점점 밀도 있는 무게를 띈다. ................................................................................ 터질듯 안 터지는 누런색 타건. 금빛도 이보다 더 육감적이며 현실적이지 않으리라. 용서하라는 빛의 소리. 앞서 다뤘던 어둠이 초라해질 정도의 꾸준한 나무람. 한 계단씩 치고 오르는 서정의 빈 공간이 여백보다 더 튼실한 중량을 자랑하며. 귀를 간질이는 그대 음성. 그리곤 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8-07-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켈란젤리는 음색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기억해야 하는 연주자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영롱한 터치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신이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덕분에 듣는 귀는 참 호사가 아닐 수 없구요..

천천히 글을 따라 읽으니 마치 곡의 전개가 눈에 보이는 듯 싶습니다.^^

바밤바 2008-07-30 04:18   좋아요 0 | URL
ㅎ 전날 잠이 안와서 음악을 들으며 쓴 글이라서 그런가 보네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한번도 읽어 보진 않았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이 유명하듯 저도 그냥 음악을 듣고 생각나는데로 글을 적어 봤습니다. 근데 날이 진짜 덥네요.. 자야 되는데.. ㅠㅠ
 
[수입] 쇼팽 : 전주곡, 피아노 소나타 2번
DG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몇 시간 뒤면 시험이다. 그래도 나는 쇼팽을 듣는다. 가장 야하고 은밀한 시간이다. 아르헤르치 연주다. 쇼팽 전주곡이다. 별다른 감상이 필요 없다. 가장 사적인 시간을 향유하기 위해 볼륨을 최대한 높인다. 타인의 귓가에 내가 느낀 울림을 주진 못하겠지만 푸른 밤하늘이라도 들으라고 소리를 키운다. 내일 시험은 자못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방임하며 해탈하며 살려고 했지만 조급한 마음은 주인의 명령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내일은 시험이다. 그래도 나는 쇼팽을 듣는다. 반복이다. 전주곡은 반복이다. 평균율이다. 야한 평균율이다.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다 벗어던진 관능의 음악이다. 고전 음악을 듣고 수음을 하냐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영적 쾌감과 동물적 쾌감의 경계가 별게 아니라는 말이 였을까. 쇼팽을 듣고 오르가즘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비릿한 밤꽃향내 보다 더 육감적인 살 떨림의 향연이 펼쳐진다. 내일 시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이 향연 앞에 잠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성공이라는 이 땅에 태어난 지극히 자명한 이유를 추구해야 함에도 나의 마음은 언제나 부유한다. 그리고선 쇼팽을 듣는다. 이기적이다. 내 육체와 내가 향유하는 재화가 다 남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거늘, 속된 이 마음은 죄책감 하나 없이 영혼을 살찌우는데 급급하다. 바흐에게서 미켈란젤로가 느껴진다면 쇼팽에게선 클림트가 느껴진다. 몽환적이면서 야하다. 옛날, 성 깊숙이 숨겨진 처녀가 있었다. 제우스는 그녀를 탐했다. 그리고선 그녀 몸속으로 들어갔다. 제우스의 정액을 받아들일 때 그녀의 얼굴이 쾌락으로 얼룩졌다. 이 장면을 클림트는 금빛 찬란한 매혹으로 표현한다. 쇼팽의 연주에도 이러한 금빛 찬란한 쾌락이 있다. 가랑이를 벌리고서 오롯이 받아들여도 좋을 진한 관능미가 있다. 들라클루아가 그린 쇼팽의 얼굴이 생각난다. ‘장송’이란 소설에서도 언급한 이 초상화는 너무 딱딱하다. 쇼팽은 천상 여인네의 것이다. 물랑루즈에 기거했던 로트렉처럼 쇼팽의 아름다움은 천박한 지상의 것이다. 시험이 더더욱 얼마 남지 않았다며 요동치는 심장과 달리 신경은 점점 느슨해진다. 음악으로 세상을 매혹시켰던 단명한 천재의 음률이 잠시 눈을 붙이라며 내 눈두덩을 감싸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생 - [할인행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수잔 플리트우드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세상은 화마에 휩싸인다. 북한이 쳐들어 온 것이다. 하늘은 저녁놀 마냥 붉디 붉다. 핏빛이라기엔 검붉은 색감이, 아마 포화가 남기고 간 그을음이 혼재되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화마가 휩쓸고 간 죽음의 색깔이 뭉크의 그림보다 더 심오한 절규를 쏟아낸다. ‘하늘만은 함께 있지 않았냐’ 는 시구도 이젠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하늘이 나를 더욱 짓누르기에.

  내 인생은 당신들 마냥 치열하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전쟁으로 모든 꿈이 수포가 될 이시기에 나의 유유자적한 생애는 일말의 안식을 선사한다. 그렇게 느리게 살라고 역설했던 내 철학이 보상을 받는다. 이 아수라를 벗어나기 위한 정신의 도피가 이런 저열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고는 웃는다. 저열하지만 꽤나 효과 있는 정신적 안정제다. 물론 비겁한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이런 몽롱한 위안으로 지탱하고 있는 내 눈에 군용차들이 보인다. 징집영장을 가져왔다며 아래층부터 젊은 것들은 몽땅 다 잡아간다. 순간 심장이 터질 듯하다. 국가라는 체제에 대한 불신 가득했던 생애가 다시금 국가의 훈육을 받아야 하다니. 내가 있는 곳으로 군인들이 올라온다. 하늘은 검붉다 못해 시커멓다. 하늘보다 내 가슴이 더 타들어 간다. 군사 문화를 경멸하며 집단의 폭력에 분노하던 연약한 지식인은 모든 게 다 꿈이 였으면 한다. 바닷가에서 생에 대한 의지 하나만으로 펄떡이던 횟감용 물고기 마냥 내 가슴은 비루한 뜀박질을 그치지 않는다.

  그 뜀박질이 어느 정점에 이르렀나 보다. 스르르 눈이 뜨인다. 다행이다. 꿈이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은 헐떡인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였기에 아직도 핏발선 헌병의 고함소리가 후두부를 강타한다. 나도 모르게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랬기 때문일까. 어쩌면 꿈속에서의 나의 간절한 소망에 하늘이 보답하사, 몽환에서 나를 해방시켜 줬으리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이 생각난다. 나도 영화 속 주인공 마냥 간절히 원했기에 모든 것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왔을지 모른다. 세계 3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이전 상태로 회귀할 수 있기를 하늘에 기도한다. 전쟁이 발생하기 전 날의 고요한 아침 햇살을 그리며. 그리고선 누군가의 계시에 이끌려 집안일을 돌보던 여자와 동침한다.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방안이라 믿으며.

  그리고 다시 눈을 뜬다. 그는 이 모든 아수라장이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을 목도한다. 이제 신에게 바치기로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차례다. 우선 그는 집을 불태운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자명한 명제가 불길로 시현된다. 그리고선 미친 듯이 뛰어 다닌다. 예수 마냥 자신을 바쳐 세상을 구원한 이 현자를 가족들은 미치광이 취급한다. 물질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재화를 이유 없이 소멸시키는 행위는 범죄일 따름이다.

  이 때, 주인공의 아들은 눈을 뜬다. 아이는 사고로 눈을 잃었지만 아버지의 희생 덕분인지 시력을 찾았다. 그와 함께 죽은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죽은 나무에도 3년 동안 물을 주면 살아난다는 전설이 기적처럼 실현된다. 너무나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영화 초기의 나레이션이 명징한 형태로 현시된다.

  어쩌면 나도 꿈속에서 이 모든 걸 다 돌릴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을지 모른다. 지극히 이기적인 나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너무나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 드렸을지도. 영화를 봤을 땐 특유의 미장센과 롱테이크 촬영 기법이 지루했다. 하지만 그 여백 가득한 생각의 전달 과정이 꿈에 나타날 만큼 깊은 울림을 남겼나 보다. 장자가 이야기한 호접몽의 형태로. 칸 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했다는 명작의 깊이가 무의식 속에 아로새겨졌나 보다. 영화계의 시인으로 불리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름이 딜레탕트를 꿈꾸던 청춘에게 명장으로 각인된다.

  햇살 가득한 풍경이 이렇게 살가울지 몰랐다. 무엇을 희생하기는 커녕 나태한 삶을 긍정하는 천연덕스러운 방어기제와 작별해야겠다. 아직도 그 검붉은 하늘이 머릿속을 맴돈다.  두려웠고 무서웠기에 어떤 전쟁 속 참화의 고통보다 더 맨살에 와 닿았다. 꿈에서 나는 희생한 것도 없이 이 찬란한 햇살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간절한 것도 없고 치열한 반성도 없는 한량의 맘에 숭고한 ‘희생’의 아름다움이 깊이 새겨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8-06-2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꾹꾹 눌러담은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봉인된 시간' 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는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kingdavid 2008-07-09 16:53   좋아요 0 | URL
이곳에서도 님을 만나네요.. 님의 발자취..ㅋㅋㅋ

바밤바 2008-06-2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보면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되게 지루하죠. 공간과 공간 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여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감동과 지루함이란 두가지 다른 결과를 낳게 하지요.^^

비로그인 2008-07-29 11:56   좋아요 0 | URL
네..

그 인물 시선의 처리하며 아주 짧은 시간에나 깨닫게 되는 찰나의 모습을 담아내는 모습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도 몇 몇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데요.

러시아의 영화전통속에서 피어난, 시간을 참 잘 다룬 영화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이콥스키 : 교향곡 전곡 [4 for 2]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작곡, Eugeny Svetl / 아울로스(Aulos Media)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스베뜰라노프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은 투박해 보이는 표지와 어울리게 투박하면서 덜 세공된 음악을 들려준다. 빈필이나 베를린 필의 아름다운 앙상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USSR 심포니의 '꽝꽝' 거리는 이 음색과 음향에서 다소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듯 하다. 스베뜰라노프가 사회주의 체제 내 소련의 대표적 지휘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과격한 음색이 소련이라는 국가가 요구하는 색깔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음악을 음악자체로 보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염두에 두고 듣는 것이 또다른 재미를 준다고 할 때 차이코프스키의 여섯개의 교향곡이 모두 들어있는 이 앨범은 차이코프스키를 읽는 조금은 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보통 4,5,6번 교향곡에 비해 소외 당했던 1,2,3번 교향곡은 훗날 동성애와 우울증 등으로 재빨리 삶을 마감하였던 이 선율의 천재에게 일어날 비극적 일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초기 교향곡들에게서 드러나는 멜랑꼴리의 감정과 후기 교향곡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밝은 정서들의 결합은 오히려 차이코프스키가 지닌 감정적 불안정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교향곡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지만 오히려 이때의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쉬운 작곡 방식이였을 듯 하다. 그리고 밝은 정서가 함뿍 드러나는 1번 교향곡의 중간 악장에서는 이 멜랑꼴리의 화신에게도 햇살 가득한 날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 아닌 음표로 이야기 해준다.

 소위 범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개의 교향곡은 후기의 세개 교향곡을 남기기 위한 습작 수준이 아닌 감정의 변증법적 발전을 위한 도입부와 전개부로 볼 수 있다. 극단의 우울함으로 치닫는 후기 교향곡의 선율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장을 한웅큼 할퀴는 교향곡의 향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밤잠 못이루게 했을지를 고려해 본다면야 내면에 침잠한 감정을 휘젓는 그의 선율이 어떠한 형태로든 음악의 지고지순한 형태에 근접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의 본질에 가까운 연주는 아마 그 미세한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과격하면서도 언제 끊어질지 모를 갸날픔을 동시에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베뜰라노프의 연주는 갸날프기 보다는 무조건 앞으로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관성을 극복하지 못한 질주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므라빈스키가 보여주는 과격함 보다야 덜 하지만 이 연주는 조금은 더 투박하면서 덜 세련된 연주로 천재 작곡가의 밝음과 어둠의 변증법을 과격하게 형성하고 있다.

 어떤 곡이 세상에 나온 뒤 부터는 그곡은 작곡가의 것이 아니라 연주가 내지는 청중의 것이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해석할 적에도 조울증의 조증에 초점을 맞추느냐 우울증의 울증에 초점을 맞추느냐 또한 연주자의 몫이다. 다만 그 작곡가가 남긴 전 교향곡을 연주해본 지휘자와 악단이라면 작곡가의 입장에서도 그 곡을 해석할 수 있는 생각거리가 충분히 많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USSR 교향악단과 스베뜰라토프의 연주는 세공의 정밀함을 떠나 청중과 작곡가의 감정선을 유장하면서 거칠게 연결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쇼팽 : 피아노 소나타, 연습곡
Decca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언제나 무난한 연주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는다. 과도한 감정 이입이나

조금은 작위적으로 들릴 수 있는 해석을 배제하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보인다. 지나치게

딱딱하지만은 않은 약간은 서정적인 색채를 띄는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엄격하기 보다는

대부분 사람들이 무던히 좋게 보고 또 듣게 될 연주이다. 그가 쇼팽 콩쿠르에서 하라셰비치에

밀려 2위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이런 무던함의 결과일 듯 싶다.

 데카 레이블에서 나온 이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와 연습곡 모음집 또한 기존의 아쉬케나지가

들려주는 연주와 별로 다르지 않다. 포고렐리치나 아르헤르치 같은 파격은 별로 없으며

소담스럽고 조금은 서정적인 연주가 귓가를 즐겁게 한다. 어려운 기교를 요하는 연습곡에서

조차 무던히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이 연주자에게 개성이 강하지 않다거나 너무 범생이

같다는 식의 비판은 클래식을 너무 자주 접한 사람들이 음악에 가지고 있는 매너리즘의 표출이

아닐까 한다. 어려운 곡도 쉽게 들려주는 그 무기교의 기교가 아쉬케나지에게는 있다. 모두가

자신만의 피아노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에 아쉬케나지 또한 이런 무던함과 소탈한 연주로

자기만의 건반을 가질 수 있었다.

 빌헤름 켐프의 슈베르트 소나타나 베토벤 소나타를 들으면 독일계 피아니스트의 거장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기교에 있어서는 안드라스 쉬프나 폴리니에 비해

모자라지만 그 기교를 뛰어넘는 초탈한 거장의 손누름이 있다는 것이다. 은근히 저평가

받는다고 보이는 아쉬케나지의 연주 또한 이미 불혹의 나이에 이러한 경지를 터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절이 다 속도를 좇고 개성을 욕망할 때 소담스런 타건으로 작곡가들의 곡을

해석하는 아쉬케나지야 말로 '인생의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하에

불멸의 이름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