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 교향곡 전곡 [4 for 2]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작곡, Eugeny Svetl / 아울로스(Aulos Media)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스베뜰라노프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은 투박해 보이는 표지와 어울리게 투박하면서 덜 세공된 음악을 들려준다. 빈필이나 베를린 필의 아름다운 앙상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USSR 심포니의 '꽝꽝' 거리는 이 음색과 음향에서 다소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듯 하다. 스베뜰라노프가 사회주의 체제 내 소련의 대표적 지휘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과격한 음색이 소련이라는 국가가 요구하는 색깔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음악을 음악자체로 보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염두에 두고 듣는 것이 또다른 재미를 준다고 할 때 차이코프스키의 여섯개의 교향곡이 모두 들어있는 이 앨범은 차이코프스키를 읽는 조금은 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보통 4,5,6번 교향곡에 비해 소외 당했던 1,2,3번 교향곡은 훗날 동성애와 우울증 등으로 재빨리 삶을 마감하였던 이 선율의 천재에게 일어날 비극적 일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초기 교향곡들에게서 드러나는 멜랑꼴리의 감정과 후기 교향곡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밝은 정서들의 결합은 오히려 차이코프스키가 지닌 감정적 불안정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교향곡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지만 오히려 이때의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쉬운 작곡 방식이였을 듯 하다. 그리고 밝은 정서가 함뿍 드러나는 1번 교향곡의 중간 악장에서는 이 멜랑꼴리의 화신에게도 햇살 가득한 날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 아닌 음표로 이야기 해준다.

 소위 범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개의 교향곡은 후기의 세개 교향곡을 남기기 위한 습작 수준이 아닌 감정의 변증법적 발전을 위한 도입부와 전개부로 볼 수 있다. 극단의 우울함으로 치닫는 후기 교향곡의 선율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장을 한웅큼 할퀴는 교향곡의 향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밤잠 못이루게 했을지를 고려해 본다면야 내면에 침잠한 감정을 휘젓는 그의 선율이 어떠한 형태로든 음악의 지고지순한 형태에 근접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의 본질에 가까운 연주는 아마 그 미세한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과격하면서도 언제 끊어질지 모를 갸날픔을 동시에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베뜰라노프의 연주는 갸날프기 보다는 무조건 앞으로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관성을 극복하지 못한 질주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므라빈스키가 보여주는 과격함 보다야 덜 하지만 이 연주는 조금은 더 투박하면서 덜 세련된 연주로 천재 작곡가의 밝음과 어둠의 변증법을 과격하게 형성하고 있다.

 어떤 곡이 세상에 나온 뒤 부터는 그곡은 작곡가의 것이 아니라 연주가 내지는 청중의 것이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해석할 적에도 조울증의 조증에 초점을 맞추느냐 우울증의 울증에 초점을 맞추느냐 또한 연주자의 몫이다. 다만 그 작곡가가 남긴 전 교향곡을 연주해본 지휘자와 악단이라면 작곡가의 입장에서도 그 곡을 해석할 수 있는 생각거리가 충분히 많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USSR 교향악단과 스베뜰라토프의 연주는 세공의 정밀함을 떠나 청중과 작곡가의 감정선을 유장하면서 거칠게 연결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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