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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즈바아긴체프 감독, 블라디미르 가린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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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비가 없는 자식들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왔다. 돌아온

 아버지는 강압적이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본다. 첫째 아이는 그런 아버지의 방식을 동경하고 기꺼이

 따르지만 둘째 아이는 그런 아버지의 방식이 못마땅 하다.

 아버지에 대한 존재 부정은 물론이고 끝없는 반항으로 그닥 

 잔잔하진 않지만 나름 평화로운 수면에 돌팔매질을 가한다.

 이러한 돌팔매질은 오이디푸스적 부친 살해가 완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스스로를 향한다. 그제야 첫째는 아버지가 되고 둘째는

 첫째가 된다. 아버지의 방식으로 시신을 옮기는 첫째의 모습과

 수장당하는 아버지의 시신에 대고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는 둘째의 모습이 이러한 설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영화는 성서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7일 동안의 

 이야기가 영화의 전체 줄거리 인데 이 짧은 기간동안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상처받고 또 성장한다.

 둘째의 이름이 성서에 나오는 이반이라는 것도 구약을 읽은 이들에겐 

 영화를 읽을 구름판을 제공한다. 

 이 영화의 해석에 대한 분분한 의견 속에 내가 본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추구했던 러시아 영화의 아름다움이

 이 작품을 통해 한층 더 진일보하여 나타난 것이다. 

 영화로 시를 쓴다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이 수많은 알레고리와 알 수 없는 상징으로 인해 

 관객을 다소 어지럽게 하였다면 이 감독은 서사속에 상징을 넣어

 관객의 이해를 비교적 명료하게 한다. 표의문자와 비슷한 작품으로

 관객에게 영화를 읽게 하였던 몇십년 전의 거장의 작품이

 소통 불가능한 지점을 향한 치열한 구도 정신을 보였다면

 표음문자를 이용한 이 감독의 대중 친화력은 평론가와 식자들의

 전유물인 러시아 영화에게 소통의 장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별점은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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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카라얀 마스터 레코딩 [탄생 100주년 기념 10 For 2.5 특별가 한정 앨범]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외 노래 / DG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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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얀 사후 100주년 기념 음반이 나왔다. 수많은 음악가들의 곡을 나름 훌륭히 해석한 시대의 마에스트로의 음반이 이렇게 염가반으로 나왔다는 건 음악을 즐기던 구세대에겐 그리 탐탁지 않을 저가 공세의 향연이고 음악을 즐길 신참자에겐 흐뭇한 염가 음반이다.

수록곡들을 살펴보면 카라얀의 절대 명반이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카라얀이 베토벤에 천착하여 합창 교향곡, 특히 60년대 음반이 꽤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을 때 이 음반에 포함된 영웅 교향곡과 4번 교향곡은 어떨지 기대가 되는 음반이다. 선율의 아름다움을 극강으로 뽑아내는 이 지휘자의 연주는 사뭇 사람을 설레이게 하는 주술이 있다. 

그리고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로스트로 포비치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주제에 의한 변주곡인이다. 리히테르와 오이스트라흐 VS 카라얀 로스트로포비치의 분할을 보여주었던 삼중 협주곡에서의 그 천상의 불협화음을 기억한다면 이 둘의 콤비가 들려줄 음악이 꽤나 견실하고 아름다울 것이란 예상은 가능하다. 모 음반지에서 선정한 명반에도 들었던 앨범이므로 꽤나 유용하다고 보겠다. 리히테르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은 카라얀과 리히테르의 주도권 싸움으로 유명하다. 리히테르의 회고록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카라얀의 템포 설정을 마음에 안들어 했고 그래서 이 불꽃튀는 두 거장의 싸움은 새로운 매력을 준다.

스트라우스의 영웅의 탄생과 같은 경우는 며칠전에 디지 오리지날 시리즈에서 사서 들어본 바로는 꽤나 괜찮은 연주다. 카라얀 연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가하지만 그만큼 클래식의 대중화에 힘쓴 사람이 드물고 현악을 다루는데에 있어서는 일류의 솜씨를 자랑한 그의 실력을 보았을 때 이 거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는 약간의 질시도 담겨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기대되는 음반은 모차르트의 레퀴엠 녹음이다. 카라얀이 모차르트에 있어서는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정설이 있기 때문에 과연 그 정설이 맞을 까 하는 의문과 함꼐 이 곡을 감상할 수 있을 듯 하다. 그 외에 안네 소피 무터와 함꼐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비교적 최근 녹음으로 최근까지 탑 프라이스로 팔린 앨범이므로 사둘만 하다. 카라얀의 적자로 한창 주목받았을 시기의 무터의 녹음은 이미 거장이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과 어떤 차이를 줄지 궁금하다.

그외에 바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나 드뷔시 라벨 등 다소 현대음악과 가까운 음악가들의 곡도 포함 시킨걸로 보면 카라얀의 음악 해석이 주는 다양성과 범용성을 함께 느끼지 않을 까 한다. 카라얀의 대표적인 녹음은 이 외에도 부지기수 인데 조금은 고만고만한 음반들이 선택돼서 아쉬움을 준다. 알프스 교향곡이나 80년대의 드뷔시의 바다 연주와 같이 고가의 초 명연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안타깝다. 그래도 이 음반에서 가장 기대할 것은 시기별로 변화하는 거장의 음악적 자세를 다른 곡들로 파악할 수 있는 해석의 가변성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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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t, Caution (색, 계 / 色, 戒) - O.S.T. (Alexandre Desplat)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노래, 알렉산더 디플레 (Alexandre / 유니버설(Universal)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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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의 전체적인 조명은 어둡다. 이안 감독은 주인공들의 어두운 운명과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조명 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러한 어두움 속에서 이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꾸준한 비판이다. 이안 감독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사회 구조에 대한 냉소와 약자에 대한 따스한 관심을 고려해 보았을 때 국가를 위한 명목으로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전체주의에 대한 이안의 관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연극을 하던 대학생들의 치기어린 결심과 맹목적 국가주의에 대한 수동적인 참여로 나타나는 사상적 어설픔은 이미 운명이 정해놓은 파국의 씨앗을 잉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내 애절한 삶을 이어 나가던 탕웨이야 말로 그 파국의 씨앗이 발아하여 사무치게 스러져간 대표적 인물이다. 국가주의가 휘두르는 칼날에 상처받을 여성의 운명에 대해서는 영화 초반에 암시되어 있다. 탕웨이와 그녀의 친구가 연극부 주장에게서 가입 권유를 당했을 때 탕웨이의 친구는 '인형의 집'과 같은 연극이라면 가입 의사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연극부 주장은 부르주아적 연극은 망국의 시대에 사치라며 그녀의 사상적 허영을 비웃는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입센의 희곡으로 유명한 인형의 집이란 연극이 내재한 페미니즘 사상이다. 인형의 집으로 비유되는 갑갑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자아실현을 이루는 현대적 여성상을 제시한 작품을 부르주아적 지적 허영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관점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우선 국가 우선주의의 명분하에서 사라져 갈 여성들의 슬픈 운명에 대하여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못한채 당연한 희생량으로 치부하는 남성 위주의 독립투사들의 시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 우위적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뒤엉켜버릴 그녀의 삶과 수동적 가해자로 자리잡을 그 선배의 앞날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그들은 양조위 암살 작전을 위해서 탕웨이를 양조위의 정부로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은 성공적인 거사를 위해 희생되는 여성의 순결이다. 탕웨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순결을 희생시켜 대사를 도모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지만 첫경험이 있은 다음날의 동료들의 눈빛은 안쓰러움과 민망함으로 점철된다. 이것은 모파상의 단편 소설 '비계 덩어리'에서도 비판한 인간의 이중 심리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거사는 실패하고 탕웨이만이 이 치기어린 거사의 희생량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이후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일제의 끄나풀에 대한 우발적이면서도 합동제의와 비슷한 살인이 일어난다. 이장면에서 이안은 현장에 있었던 남자 동료들이 최소한 한두번 이상 칼로 그 끄나풀의 몸에 응징을 가하게 한다. 이것은 탕웨이가 잃은 순결에 대하여 남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죄의식을 발로이자 모두가 살인이란 원죄를 공유하게 만들어 그 이후의 그들의 삶을 확정 짓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살인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아마츄어적 행동과 살인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파생된 공포로 흐려진 눈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에서 다시금 맹목적이고 치기어린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상하이로 배경이 넘어간 이후에도 이안은 국가주의에 대한 차가운 비판을 가한다. 탕웨이가 첩자로 잠입하기로 합의를 본 후 아버지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를 태워버리는 저항군 간부의 행위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하여 가족이란 하부구조를 무시하는 독립투사들의 강박적 순결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은 차 후 탕웨이를 비호해주던 연극회 선배에 대한 독립군 간부의 반박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 장면에서 간부는 자신의 가족 또한 처형 되었기 때문에 탕웨이가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가족의 상실이 구국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독립운동의 맹목성을 노정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받는 고통또한 정당화 하는 것은 독립군이 타도하려는 일제의 전체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군국주의식 방식이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명목으로 나타난 수많은 민족주의적 열사들의 행동의 순수성에 의심을 품게 만들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망가졌으므로 타인의 삶이 어느정도 훼손되는 것은 별 것 아니라는 관점은 많이 잃을수록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되는 사회구조의 이상 심리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화제가 되었던 정사신에서 이안은 그들이 지닌 불안감을 다양한 체위와 숨막히는 시선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페니스가 삽입이 되었다 아니다 하는 논쟁이 일어날 정도로 격렬한 정사신이 화제가 된 것은 대중의 관음증이 인터넷이라는 밀실이 아닌 극장이라는 광장에서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다. 대중과 공유하는 관음증적 쾌감을 위해 이 영화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탕웨이가 주색잡기에 능한 자신의 동료와 반강제적인 정사씬에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양조위가 탕웨이에게 보여준 다이아몬드 반지의 화려함에 경탄을 터뜨렸을 것이다. 인식의 저급성을 떠나 각 개인의 취향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웃음과 경탄은 시종일관 영화 관람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였다. 특히 연습을 목적으로 한 첫 정사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자 이안의 안쓰러운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장면 이였기 때문이다. 웃지 못할 비극의 씨앗의 시발점에서 쉽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영화를 치열하게 보지 않았던 자들이 극장안의 그 무게감을 참지 못해 터뜨린 자아의 표출이였을 것이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탕웨이의 선배는 불현듯 사랑고백을 한다. 손아귀를 벗어난 여인을 위한 애타는 손짓이 안쓰러움에서 왔는지 아니면 순결을 상실했던 비계 덩어리의 성숙함이 풍기는 섹시함에서 왔는지 그것도 아니면 시대를 위하여 잠시 잠가두었던 개인적 감정이 일시적으로 삐져 나온 결과인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다. 누굴 위한 희생인지도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도 모를 지난하면서도 숨가쁜 여정은 탕웨이의 방에서 눈물짓는 양조위를 비추며 끝난다. 이안은 영화가 갖춘 미덕중 하나인 조그마한 환상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안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이스 스톰에서 보여주었던 그 서늘함이 조금 더 진하고 묵직한 그림으로 색.계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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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슈베르트 : 교향곡 8번 '미완성' & 멘델스존 : 교향곡 4번 '이탈리안'
DG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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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의 그림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 독일의 대문호 괴테를 그린 것이다.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의 부제인 '이탈리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자켓 디자이너의 묘안이 돋보인다.

 이탈리아 사람인 시노폴리의 지휘에 의한 연주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아도 아주 적절해 보인다. 몇년 전에 서거한 이 지중해의 매끈한 올리브유 같은 거장의 음악이 과학 기술의 세례를 받아 괴테의 작품보다 더 온전한 형태의 불멸이란 칭호를 지니게 되는 건 기록 예술의 정점인 문학의 지위가 예전만 못한 현세태의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앨범을 살펴 보면, 멘델스존이란 이름이 주는 풍요로운 이미지에 걸맞게 이 교향곡은 밝고 신선하며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시노폴리 또한 멘델스존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느꼈던 남국의 향취에 거의 동화된 듯한 푸르디 푸른 연주를 만들어 낸다. 이미지즘이 연상되는 회화주의적 음악이 그린 그림이 귓가를 통해 눈앞에 펼쳐지면 내 청각과 시각은 이태리 여행이라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이 앨범의 백미는 슈베르트 교향곡 7번 혹은 8번이라 불리우는 '미완성 교향곡'이다. 슈베르트의 작품 번호가 이렇게 난잡하게 된 것은 그의 숨겨진 교향곡이 있을 것이라는 후세인들의 추측에 의해 이 미완성 교향곡과 Great 교향곡을 한칸씩 뒤로 미룬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숨겨진 교향곡으로 추측되던 곡이 기존의 교향곡의 다른 필사본으로 밝혀 지면서 그의 작품 순서엔 혼동이 생긴다. 이러한 혼동은 2악장으로 구성된 이 미완성 교향곡의 불완정성과 맞물려 슈베르트에 대한 묘한 동정심을 유발한다. 살아 있을 적에도 그리 인정 받지 못하던 선율의 천재에게 사람들은 사후에도 이런 박정한 대우를 한다. 프랑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도 여자 주인공이 슈베르트를 외모 컴플렉스에 의한 열등감의 화신으로 규정지으며 또 다시 의도치 않은 박정함을 내보인다.

 하지만 슈베르트가 들려 주는 미완성 교향곡의 둔중하면서도 조금은 우울한 울림은, 천상에 가 있는 슈베르트가 그런 일로 별로 괘의치 않을 듯한 느낌을 준다. 스스로와 세상의 합일 이라는 가치는 슈베르트 답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의 내면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찬 번뇌로 부터의 도피처만 있다면 속세의 언어들을 그저 하나의 불협화음으로 간주하며 다시금 뮤즈의 영감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그 다운 일이다.

 이런 슈베르트의 내면은 이 연주에서 아주 느리고 유장하며 허공과 같은 수많은 여백으로 표현된다. 다른 많은 연주들보다 느림의 미학의 절정에 이른 이 연주는 유쾌한 사람이였던 시노폴리 또한 슈베르트가 느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이되어 잠시나마 심장이 움츠려 들어 지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급서한 이 남국의 열정적 지휘자는 이미 이 연주를 통해 하늘의 부름을 한번 받았기에 그리 하늘을 원망치 않고 스튁스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한다.

 2악장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이 미완성 교향곡은 브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확실성 명제와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명제의 충돌은 이 두개의 악장의 양립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울리고 또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런 명제의 도출은 시노폴리의 지휘에서 오롯이 적출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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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2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곡으로 다른 음반에 대한 리뷰네요..'미완성'에 대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리뷰가 색다릅니다.
 
행복 - O.S.T.
조성우 작곡 / 유니버설(Universal)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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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이름은 행복하지 않다. 잔인한 거짓말이라는 그 행복이 
 
허진호의 손길에 닿아 실체없는 허상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 들이 처음 만났던 날의 어색함은 행복을 위한 전초이다.

 영화를 보고 난뒤 나누는 그들의 서먹한 대화는 사랑을 위한

 발걸음이고 긴 밤을 같이 지내며 떠날지 모르는 웃음을 걸고 다닐적

의 모습은 이미 사랑이다.

 행복원을 나오며 삶의 의지를 다지던 둘의 굳센 입술은 

 행복을 지키기 위한 아름다운 생존력의 발현이고

 궁상맞은 여자를 타박하던 남자의 높은 언성은 사랑을 위해선

 언어적 폭력도 마음의 표시라는 자기 합리화의 투박한 세공이다.

그 높은 언성에 대항하여 말조심하라는 갸냘픈 여인의 외침은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일시적으로 도시로의 회귀를 꿈꾸던 남자의 소망이 영구화 되려 할 때 행복을 향해 나아가던 아

다지오 악장의 변주곡은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3악장으로 전환을 꾀하는 낯선 전주곡이다.

 그리고선 둘의 이별이 기정 사실화 되었을때 그녀는 달린다.

이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달리고 달려서 내 생명과도 같은

그의 잔상을 내 목숨과 같이 작별하고 싶다는 뜀박질.

 그리곤 둘은 영원한 이별을 꿈꾸는 눈빛으로 재회하곤

다시금 남자는 행복원의 쓸쓸함으로 돌아온다.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아름다운 영화 제목들은

아름다운 영상과 배우와 그림을 만들었다.

외출.. 행복.. 다소 추상적인 단어들은 허상적인 이미지와

뿌연 수채화를 그려냈다.행복의 수채화는 윌리암 터너의 그림과 같은

색감적 무정형성의 아름다움 보다는 조악한 풍경의 무정형성으로 인한

옅은 농도의 그림. 황정민은 전작 '너는 내 운명'의 이미지 덕분에

임수정과의 호흡이 어색하다. 연기를 잘 한다고 능사는 아닐 터.

이것은 허진호가 애초에 그린 밑그림의 문제다. 곳곳에 풍겨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은 허진호 영화를 꿰뚫는 꾸준한 정서다.

죽음과 행복.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에서 느껴졌던

악마적 어두움이 임수정의 토악질에서 시작되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결국 행복이 없다는

클리셰한 주제만으로는 행복한 그림이 나올 수 없다.

행복하기 위해 뻔히 보이는 불행을 택하는 역설은 허진호 스럽지 않다.

 

추신:어느 지인이 이것이 톨스토이의 행복에서 연유한 작품이라 하였는데.. 뭇 자신 만만한 말투로 자신의 의견의 정당성을 피력했기에 그렇거니 했는데.. 아니였다. 자고로 사람이란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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