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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t, Caution (색, 계 / 色, 戒) - O.S.T. (Alexandre Desplat)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노래, 알렉산더 디플레 (Alexandre / 유니버설(Universal)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색. 계의 전체적인 조명은 어둡다. 이안 감독은 주인공들의 어두운 운명과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조명 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러한 어두움 속에서 이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꾸준한 비판이다. 이안 감독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사회 구조에 대한 냉소와 약자에 대한 따스한 관심을 고려해 보았을 때 국가를 위한 명목으로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전체주의에 대한 이안의 관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연극을 하던 대학생들의 치기어린 결심과 맹목적 국가주의에 대한 수동적인 참여로 나타나는 사상적 어설픔은 이미 운명이 정해놓은 파국의 씨앗을 잉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내 애절한 삶을 이어 나가던 탕웨이야 말로 그 파국의 씨앗이 발아하여 사무치게 스러져간 대표적 인물이다. 국가주의가 휘두르는 칼날에 상처받을 여성의 운명에 대해서는 영화 초반에 암시되어 있다. 탕웨이와 그녀의 친구가 연극부 주장에게서 가입 권유를 당했을 때 탕웨이의 친구는 '인형의 집'과 같은 연극이라면 가입 의사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연극부 주장은 부르주아적 연극은 망국의 시대에 사치라며 그녀의 사상적 허영을 비웃는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입센의 희곡으로 유명한 인형의 집이란 연극이 내재한 페미니즘 사상이다. 인형의 집으로 비유되는 갑갑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자아실현을 이루는 현대적 여성상을 제시한 작품을 부르주아적 지적 허영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관점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우선 국가 우선주의의 명분하에서 사라져 갈 여성들의 슬픈 운명에 대하여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못한채 당연한 희생량으로 치부하는 남성 위주의 독립투사들의 시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 우위적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뒤엉켜버릴 그녀의 삶과 수동적 가해자로 자리잡을 그 선배의 앞날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그들은 양조위 암살 작전을 위해서 탕웨이를 양조위의 정부로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은 성공적인 거사를 위해 희생되는 여성의 순결이다. 탕웨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순결을 희생시켜 대사를 도모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지만 첫경험이 있은 다음날의 동료들의 눈빛은 안쓰러움과 민망함으로 점철된다. 이것은 모파상의 단편 소설 '비계 덩어리'에서도 비판한 인간의 이중 심리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거사는 실패하고 탕웨이만이 이 치기어린 거사의 희생량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이후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일제의 끄나풀에 대한 우발적이면서도 합동제의와 비슷한 살인이 일어난다. 이장면에서 이안은 현장에 있었던 남자 동료들이 최소한 한두번 이상 칼로 그 끄나풀의 몸에 응징을 가하게 한다. 이것은 탕웨이가 잃은 순결에 대하여 남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죄의식을 발로이자 모두가 살인이란 원죄를 공유하게 만들어 그 이후의 그들의 삶을 확정 짓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살인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아마츄어적 행동과 살인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파생된 공포로 흐려진 눈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에서 다시금 맹목적이고 치기어린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상하이로 배경이 넘어간 이후에도 이안은 국가주의에 대한 차가운 비판을 가한다. 탕웨이가 첩자로 잠입하기로 합의를 본 후 아버지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를 태워버리는 저항군 간부의 행위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하여 가족이란 하부구조를 무시하는 독립투사들의 강박적 순결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은 차 후 탕웨이를 비호해주던 연극회 선배에 대한 독립군 간부의 반박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 장면에서 간부는 자신의 가족 또한 처형 되었기 때문에 탕웨이가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가족의 상실이 구국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독립운동의 맹목성을 노정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받는 고통또한 정당화 하는 것은 독립군이 타도하려는 일제의 전체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군국주의식 방식이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명목으로 나타난 수많은 민족주의적 열사들의 행동의 순수성에 의심을 품게 만들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망가졌으므로 타인의 삶이 어느정도 훼손되는 것은 별 것 아니라는 관점은 많이 잃을수록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되는 사회구조의 이상 심리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화제가 되었던 정사신에서 이안은 그들이 지닌 불안감을 다양한 체위와 숨막히는 시선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페니스가 삽입이 되었다 아니다 하는 논쟁이 일어날 정도로 격렬한 정사신이 화제가 된 것은 대중의 관음증이 인터넷이라는 밀실이 아닌 극장이라는 광장에서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다. 대중과 공유하는 관음증적 쾌감을 위해 이 영화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탕웨이가 주색잡기에 능한 자신의 동료와 반강제적인 정사씬에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양조위가 탕웨이에게 보여준 다이아몬드 반지의 화려함에 경탄을 터뜨렸을 것이다. 인식의 저급성을 떠나 각 개인의 취향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웃음과 경탄은 시종일관 영화 관람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였다. 특히 연습을 목적으로 한 첫 정사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자 이안의 안쓰러운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장면 이였기 때문이다. 웃지 못할 비극의 씨앗의 시발점에서 쉽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영화를 치열하게 보지 않았던 자들이 극장안의 그 무게감을 참지 못해 터뜨린 자아의 표출이였을 것이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탕웨이의 선배는 불현듯 사랑고백을 한다. 손아귀를 벗어난 여인을 위한 애타는 손짓이 안쓰러움에서 왔는지 아니면 순결을 상실했던 비계 덩어리의 성숙함이 풍기는 섹시함에서 왔는지 그것도 아니면 시대를 위하여 잠시 잠가두었던 개인적 감정이 일시적으로 삐져 나온 결과인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다. 누굴 위한 희생인지도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도 모를 지난하면서도 숨가쁜 여정은 탕웨이의 방에서 눈물짓는 양조위를 비추며 끝난다. 이안은 영화가 갖춘 미덕중 하나인 조그마한 환상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안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이스 스톰에서 보여주었던 그 서늘함이 조금 더 진하고 묵직한 그림으로 색.계에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