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 60 [1960년대 DG 관현악 녹음집- 82CD/320p 해설지 포함] - 1960년대 전성기 녹음, 오리지널 LP 재현! 카라얀 2
모차르트 (Leopold Mozart) 외 작곡, 카라얀 (Herbert Von Karaj / DG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이걸 누가 사나요.. 70년대 또는 80년대 연주가 더 좋은게 많아 보이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DG 111주년 기념반 2 [56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번스타인 (Leonard / DG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예전엔 이런 박스 세트가 나오면 우선 구매하고 봤다. 예전엔 구하기 힘들었던 음반을 싼 맛에 구입할 수 있단 사실이 매력적이었기에.  

요즘은 박스 세트를 잘 구매하지 않는다. 웬만한 곡은 음반으로 가지고 있는 탓도 있지만 같은 곡을 다른 연주로 듣는다는 것에 대한 갈망이 떨어진 탓도 있다. 하나의 곡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꽤나 집중해서 열번은 넘게 들어야 한다. 헌데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집중하다보면 곡보단 연주에 집중하게 되면서 음악 감상이 하나의 스펙쌓기마냥 강박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좋지 않다.  

지난 10년간 클래식을 들으면서 곡을 이해하려기 보단 '내가 이 곡 안다'는 젠체를 하기 위해 곡을 외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젠 보이기 위한 음악듣기가 아닌 치유를 위한 음악듣기에 집중해야 겠다.   

이번 박스 세트도 10개 정도의 음반은 겹치고 나머지 곡들도 다른 연주로 소장하고 있다. 비제의 카르맨 정도가 없다. 아직 푸치니도 양껏 듣지 못했기에 아직 다른 오페라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무리다.

혹 곡을 감상하기 보단 배우기 위해선 이런 박스세트가 좋을 듯. 하지만 어느정도 음악을 들었다면 개 당 값은 더 나가더라도 개별 음반을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모차르트, 쇼팽, 바흐,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말러, 리스트, 라벨, 푸치니, 슈만, 시벨리우스, 비발디.. 이들의 이름만을 듣고 작곡가당 10여 곡 이상의 선율이 머리에 떠오른다면 이러한 패키지 음반은 값나가는 장식품일지 모른다. 몇배의 돈을 들이더라도 나만의 56CD를 구비한다면 좀 더 그럴듯한 가을이 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9-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만이예요. 바밤바님. 잘 지내시지요?
말씀을 들으니 제가 얘기한 부분과 정반대의 부분이 느껴집니다.

곰곰 생각해봐요. 덕에 다른 생각들도 많이 하게 되네요.


바밤바 2010-09-26 21:0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오랜만이에요. 밥벌이로 마음이 무뎌지다보니 글쓰는 일도 왠지 번거로웠던 근자였습니다. 바람결님 서재에 가끔 들르곤 했는데 드나드는 이가 갈수록 늘어나 보기 좋아더랬습니다.

가을이네요. 햇살 가득한 날 되시옵소서. ㅎ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잔혹한 시대를 겪고 나면 사람들은 각성하기 마련이다. 각성의 모양새는 이 세상에 뛰고 있는 심장의 개수만큼 다양하다.

각성 후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조금 더 푼푼하면서 겸손한 삶을 살려는 이가 있을 테다. 비루한 삶을 돌파하기 위해 제 성장 동기를 강화하여 나르시시즘에 탐닉하는 이도 있을 테다. 잔약한 신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파시즘은 결국 후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동조하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차 대전의 잔혹함은 2차 대전만큼 역겹지 않았고 반성을 하기엔 울분도 지나치게 많았다. 아울러 이전 전쟁이 덜 잔인했기에 이후 전쟁은 더욱 잔혹해졌다. 

2차 대전이후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돌아봐야만 했다.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의 역겨움을 겪고 나서도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건 삶을 ‘영위’가 아닌 ‘견딤’의 형태로 가져가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1차 대전의 결과 각개약진이라는 삶의 모토가 강화되었고 결국 차별과 반목을 낳아 더 큰 황폐화를 낳았다. 2차 대전의 결과 세계는 아우름이란 가치에 집중하고 현재의 삶이 다소 풍성해졌으니 지옥이 낳은 아이러니다.

2차 대전의 역설은 그 후의 세상사를 돌아봐도 알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쓸 수 없다고 했으나 다양한 문사들에 의해 더 섬세해진 언어와 감각이 결합된 글이 태어나며 세상을 풍요롭게 했다. 영화는 영상이란 매체로 삶의 어두움과 밝음을 일상처럼 잘 담아냈고 음악은 제3세계 음악의 약진으로 다채로운 형태를 보이며 아름다운 앙상블을 보여줬다.

지나친 혁신으로 제 지위를 위태롭게 한 분야도 있다. 클래식은 ‘존케이지’ 나 ‘쇤베르크’ 등이 혁신을 시도했으나 그저 제 잘남을 드러내기 위한 과한 레토릭으로 점철되어 대중과 멀어졌다. 미술은 원근법이나 고유의 색채를 무시하는 등 점점 작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름의 복잡계를 이뤄가며 사회와 멀어져갔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무거움은 가벼움으로 진중함은 발랄함으로 전이되어 개인은 이전시대보다 덜 잔혹하고 풍요로운 현실을 누리며 대중문화를 향유하게 된다.

전쟁의 상처가 다소간 아물었을 70,80년대엔 다국적 기업이 강세를 띄며 개인 간의 경쟁은 격화됐고 삶의 여유는 차츰 무뎌져 갔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이 유행하는 현 시대에 벨에포크(La belle époque)는 이제 와 닿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하지만 기존의 벨에포크와는 다른 사회적 담론이 너울대며 세상은 그 이전보다 분명히 살만한 것이 되었다.

서경식은 글을 통해 충분히 아프고 고민한 이가 던져줄 수 있는 문장을 드러낸다. 육체가 욱신거리는 듯한 자지레한 고민의 선홍빛은 빛 뒤에 항상 그림자가 자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담담하게 진술하는 시대의 잔혹함이 그림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추상화를 그려낸다. 고흐를 알기 위해, 오토 딕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만큼 던적스러움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글로 들려준다. 그러기 위해 이전 시대를 자꾸 일깨우며 적당한 풍요와 지나친 긴장에 휩싸인 이들의 영혼을 꾸짖는다.

책을 읽으며 충족된 자신의 지적허영을 만족스러워하고 잗다란 고통을 느꼈다 기뻐하며 제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는 이는 얼마나 비루한가. 펠릭스 누스바움의 그림이 그려진 겉면표지마냥 책을 통해 삶을 읽어내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다들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을 살자고 애쓰는 시기에 현재의 고뇌는 얇지만 나름의 색깔과 두터움을 보여준다. 다만 책 한권으로 그 모든 투터움을 아우르기엔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서경식의 책을 읽고 허무함을 느꼈다면 그건 삶의 바닥을 추체험 했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이러한 삶의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고 또 사라졌지만 허무는 이겨내기 보다는 그저 덤덤히 받아들이는 거다. 그 허무를 받아들여야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다만 삶의 고통을 먹고 자라는 예술가들에게 그러한 허무는 독(毒)일 테다. 달콤한 독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아웃케이스 없음
테리 길리암 감독, 릴리 콜 외 출연 / 프리지엠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요즘 사람들은 상상력이 없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혹 상상할 시간이 있더라도 상상물을 문자화된 형태로 나타내야 하는 세간의 조급성은 상상의 결과물을 빈약하게 만든다. 이렇듯 기나긴 꿈속에선 찬란해질 상상이 급박한 현실을 만나면 바닥에 주저앉는다. 처연하다. 가난한 상상마저 사치가 돼 버린 시절이 야속하다.

 상상력 부족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문제다. 무엇보다 한국은 상상력을 말살하는 강한 위계질서와 압축된 노동을 축으로 한 큰 덩치를 자랑한다. 그 묵직함이 이젠 둔중함으로 비친다. 이에 기업이 위기를 느꼈나 보다. 포스코는 ‘상상창의캠프’를 운영하며 직원들의 사적인 공상시간마저 회사에 오롯이 바치라 한다. 또 다른 기업은 제가 속한 울타리는 놔두고선 ‘애플’을 배우자며 상상력 증진에 나섰다. 이렇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상상력이 근사함과 이어질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급조된 상상예찬은 그 토대가 빈약한 탓이다. 제 살 파먹기일 뿐이다. 가엾다.

 영화 속 파르나서스 박사는 타인의 상상을 자주 엿본다. 마술을 통해 상상을 구체화시키고 개인의 욕망을 오롯이 드러낸다. 각자는 충실히 욕망을 좇고 파르나서스 박사는 자신의 욕망을 추종할 뿐이다. 그 좇는 과정이 유치해 보이는 그래픽을 따라 화면에 너울댄다. 화려한 그림 덕에 심심하지는 않다.

 상상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유리 거울처럼 돼 있는 은색종이 사이를 지나 발을 들이면 된다. 그 곳은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지만 완전히 부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 저기서 흐르는 시간만큼 여기의 시간도 흐르기 때문이다. 갇힌 만큼 흐르는 시간은 상상 속 공간의 모호함을 잘 보여준다. 상상은 말 그대로 은색종이 한 장 차이다. 상상을 꿈꾸기는 쉽지만 상상에 발들이기 위해선 종이 한 장을 건널 만큼의 용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눈여겨 볼 대상은 히스레저다. 죽기 전 마지막 연기다. 조니뎁과 콜린파렐, 쥬드로 같은 멋진 배우들이 그가 떠난 공간을 메웠다. 덕분에 시나리오도 수정됐다고 한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이따금 질척대는 건 히스레저의 부재 때문이다. 영화는 상상을 이야기하지만 근사한 상상만으로 누군가의 빈자리를 빈틈없이 메우긴 힘들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꿈이 다소 빈약한 까닭은 최첨단 그래픽도 채울 수 없는 히스레저의 빈자리 때문이다.

 쉽게 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망의 대상이었을 소박한 가정을 비쳐주고선 이야기는 끝맺는다. 마음을 다습게 하는 마무리다. 허나 따스한 결말이란 감독의 상상력부족을 나타내는 방증일 테다. 얼마 전 씨네 21에서도 이 영화를 CG가 과다 사용되어 이야기를 흐린 대표적 사례로 꼽았었다. 상상력이 자본과 기술을 만나 허우적댔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상이 깃들 공간을 자본이 메우니 사람보단 기계 냄새가 너무 났었나 보다.

 상상극장의 문이 닫히고 다시 회사다. 간만에 상상할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시간을 다잡기에 버거운 근자다. 그 여유가 조금은 불안하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은 법이니 더욱더 벅찬 시간이 기다릴 테다.

 상상예찬 취소다. 힘든 일을 예측하는 데엔 상상력이 부족했으면 한다. 거친 현실도 무딘 상상력을 만나면 그리 힘든지 모르고 지나갈 테니. 이사야 벌린이 ‘여우와 고슴도치’에서 이야기한 고슴도치처럼 조금은 둔중한 상상력이 마음을 편하게 해줄 테다. 이렇듯 일상의 던적스러움을 견딜 때엔 부족한 상상력이 값지다. 각자가 상상력이 부족해지는 까닭은 이렇듯 천차만별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5-0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의 부재.. 저도 그렇게 되어가나 싶네요. 끙..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지욤 ^^

바밤바 2010-05-08 02:42   좋아요 0 | URL
여행 스케치의 행복한 상상이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암 러빙유~ 암 러빙유~ㅎ
 
솔라리스 - Solari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조차 언제나 고독하다. ‘내 마음 아실 이’는 언제나 그렇듯 먼 곳에 자리하거나 아예 닿지 못할 경우가 많다. 어떨 땐 내 마음 또한 헤아리기 어렵고 무엇이 나를 위한 삶인지 명쾌하지 않다.

 그럴 땐 추억에 묻히곤 한다. 누군가와도 공유하지 않는 그들 각자의 추억에 제 자신을 밀어 넣는 거다. 현실의 잗다란 고민도 미래의 끝없는 불안도 따스한 과거와 접하면 다 남의 이야기다. 다들 근사한 추억하나 만들려 애쓰는 까닭도 현실이 버거운 탓이다. 마음만 먹으면 소환할 수 있는 근사한 추억의 장에서 제 못남을 쉬이 잊으려 한다. 그러면 고독하지 않다. 제 자신과 대화하지만 누군가가 제 말을 받아주는 듯한 착각이 실재보다 또렷하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는 그런 영화다. 1972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만든 원작보다 사람 냄새나는 리메이크 작이다. 그만큼 헐겁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용이하다.

 영화 속 켈빈은 고독하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다. 아내의 자살이 제 탓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숨쉬기도 버겁다. 그런 부채의식이 현실을 짓누른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딘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다. 친구의 영상을 보고 우주선으로 향하는 것도 사명감보단 무딘 삶의 연장선이다. 제 할 일을 하듯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삶의 목적이 없는 자가 보여주는 일종의 체념이다. 제 할 일이란 이렇듯 던적스런 삶을 버티는 거다.

 미스터리한 우주선은 실로 적적하다. 갖가지 생각에 잠기기 좋을 만큼 충분히 여유로운 장소다. 그런 공간이 만들어낸 고적함 탓인지 우주선에서 죽은 아내 레아를 만난다. 꿈이 아니다. 레아는 시각으로도 촉각으로도 실재한다. 공유하는 기억의 결도 비슷하다. 아니, 켈빈과 같다. 레아의 기억이 켈빈의 추억에 오롯이 맞물려져 있는 탓이다. 켈빈은 혼란스러워 하지만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견디던 삶에 마침표가 찍히려 한다.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란 기분 좋은 기대에 빠진다.

 우주선에 동행한 승무원은 레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죽은 레아가 실재한다는 건 솔라리스가 만든 일종의 ‘괴물’이기에 가능하다는 거다. 죽어도 곧잘 살아나고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도 옆자리에 누워있는 레아다. 승무원의 말이 실재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건 켈빈도 알 고 있다. 결국 기억을 없애지 않으면 그녀는 항상 켈빈 옆에 자리한다. 그림자보다 더 질긴 기억이고 사랑이다. 기억을 버리면 덜 아플 수 있지만 그는 계속 아파하고 싶다. 아파야지만 실존하는 듯하다. 길티플레져 같은 아픔이다. 저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놓지 않는 이유다.

 영화는 이야기 끝머리에 기억의 주체마저 의심의 대상으로 남겨둔다. 영화 속 켈빈이 첫 장면에 등장한 켈빈인지 혹은 솔라리스가 만든 생물체인가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말했던 명제인 ‘코기토 에르고 숨’은 오롯이 부정된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리는커녕 진실도 없다. 기억은 그렇게 근사하게 부정되고 삶은 그렇듯 지난하게 이어진다. 솔라리스가 실재했는지도 뚜렷하지 않다.

 사람이 힘들 때엔 추억에 몸을 뉘이며 욱신거리는 상처를 눅이곤 한다. 헌데 그런 기억마저 날조된 것이라면 그 무참함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테다. 이렇듯 솔라리스는 약한 자들의 정신적 토대인 추억마저 뒤흔드는 영화다. 나를 나로서 오롯이 서게 하는 게 추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 제기도 가능하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더더욱 알기 힘들다. 아파트인지 직업인지 공들여 만든 몸매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나를 비참하게 하는 것만 명징하다. 추억을 그리워하고 옛것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결국 삶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절엔 추억은 공짜 아편이다.

 그리움을 실재화 시킨다는 솔라리스도 21세기 한국인의 그리움을 알긴 힘들 테다. 나는 무엇을 그토록 갈망하여 후덥지근한 날에 이리도 시간을 견디고 있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